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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시아 연대를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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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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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어깨 겯고 아시아 공동체 실현을… 분쟁 떨치고 아시아의 세기 토대 닦아

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이벤트 전문 MC 맹선제(35)씨는 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의 ‘한겨레 남북 공동응원단’ 응원부장이었다. 그는 방콕 하늘 아래 남북이 함께 부르는 아리랑과 꽹과리 소리가 울려퍼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남북한은 방콕의 스리나카린위로트대학 경기장에서 앞뒤로 핸드볼 경기를 벌였지만 남북 응원단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야 했다. “갈라진 조국이 실감났지요.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어깨 겯고 동포애를 나누지 못할 때 참담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뒤 시드니에서 남북이 동시입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코리아 선수단’ 180명이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는 순간 전광판에는 ‘KOREA’라는 선명한 자막이 새겨졌다. 그것은 방콕의 아쉬움을 충분히 씻을 만한 감동이었다.

4년 전 방콕에서의 가슴 아픈 기억

다시 2년이 흐른 지금, 맹씨의 꿈은 ‘아시아의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6월의 신화를 일궈낸 700만명의 함성이 ‘꿈의 1승’과 ‘16강 숙원’에 있었다면, 부산의 함성은 아시아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와 통일에 모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북한팀 서포터스로 참여하는 맹씨의 소망도 더 강렬하다. “승부의 세계에서 메달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기필코 남과 북 그리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다양한 형식으로 어우러지는 축제의 마당을 펼치길 간절히 바랍니다.”


제14회 부산아시아경기대회는 각국을 대표하는 선수들만의 무대가 아니다. 대표선수들이 태릉선수촌과 다른 시설에서 비지땀을 흘릴 때 ‘그들만의 경기’를 ‘아시아인의 잔치’로 승화하기 위해 또 다른 땀방울을 흘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대회 준비를 위해 연인원 15만여명이 참여했고, 대회기간에는 맹씨처럼 수만명이 서포터스로 활동한다.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는 부산은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탈바꿈했다. 현재 부산에 결성된 시민 서포터스만 북한의 3천여명을 비롯해 44개국 4만여명에 이른다. 일부 종목의 경기가 열리는 울산·창원·마산·양산 등지에도 별도의 서포터스가 구성됐다. 북한 서포터스는 ‘함께 가자 통일로, 아시아로, 세계’, ‘One Korea, One Asia’ 등을 공식 응원구호로 정하고, 쌀 1천포와 1억원 상당의 담요·소주 등의 선물까지 준비했다. 9월28일 만경봉92호를 타고 다대포항에 도착하는 북한 응원단을 맞이한 그들은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을 지원하기 위해 40억원을 지원받았고 모금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이번 부산아시아경기대회는 아시아인의 축제로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9월29일부터 10월16일까지 16일 동안 열리는 이번 대회에 선수 6647명(남 4642명, 여 2005명)과 임원 3141명(남 2793명, 여 348명) 등 모두 9788명으로 사상 최대 규모다. 게다가 아시아경기대회 50여년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산하 43개국 회원국이 모두 참여한다. 미국의 폭격으로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4년 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 불참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도 합류했다. 비회원국인 동티모르까지 준회원 자격으로 참가한다.

이주 노동자들의 다짐 “아시아는 하나”

사진/ 방콕대회 유도경기장에 내걸린 태극기와 인공기. (한겨레 곽윤섭 기자)
아시아의 화해와 연대는 그동안 공허한 메아리였다. 한쪽에선 총성과 화염이 끊이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은 23년간의 전쟁과 미국의 공습 등으로 사망자 150여만명에 난민이 350만명에 이른다. 이라크는 OCA회원국 자격정지로 1990년 베이징대회부터 ‘아시아인의 화합’(히로시마 대회)과 ‘국경을 초월한 우정’(방콕 대회)을 나누지 못했다. 이라크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선제공격 위협에 놓여 있다. 인도네시아와 인도의 분리운동, 버마와 필리핀의 내전, 중동분쟁 등이 지속되는 아시아는 지구촌 최대의 분쟁지역으로 꼽힌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아시아경기대회는 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와 화합의 계기가 될 것인가. 미국과 중국이 1970년대 초 ‘핑퐁 외교’를 통해 교류의 물꼬를 텄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 정권은 럭비를 통해 ‘흑백화합’을 꾀했다. 스포츠가 평화의 가교 노릇을 한 셈이다. 갠지스강 용수문제로 인도와 긴장상태에 있는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 노동자로 안산에서 일하는 모하메드(28)는 여전히 뿌리깊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스포츠를 통해 친선을 도모해도 그때뿐이다. 그래도 이번에 부산에서 서로를 친구로 여길 수 있는 다양한 만남이 이뤄졌으면 한다.”

동남아시아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은 모처럼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어쩌면 그들은 ‘아시아는 친구’라는 슬로건을 몸으로 느끼며 사는지도 모른다. 파키스탄에서 3년 전 한국에 온 네임(33)은 이웃 나라 출신의 친구들과 함께 안방 응원전을 벌일 예정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서로 친구가 됐다. 함께 자기 나라를 응원하면 더욱 가까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벌써부터 고국을 응원할 구호도 정했다. 그는 ‘파키스탄이여 영원하라!’(Pakistan Zindabad)를, 인도네시아의 친구는 ‘해내자 인도네시아’(Ayo Indonesia)를 소리 높여 외친다.

서울에서는 부산아시아경기대회와 맞물려 다양한 아시아 문화행사가 열린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아시아의 꿈을 ‘범∼아시아’에 담아보려는 것이다. 오는 10월17일에는 시민의식에 나타난 외국문화, 아시아 각국의 문화 차이와 갈등 극복방안 등 아시아 문화를 주제로 하는 세미나가, 10월27일에는 한강공원 여의나루에서 아시아 문화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번 행사를 마련한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는 “월드컵 붉은악마의 열기는 배타적 민족주의에 있지 않다. 우리 사회에도 이주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다민족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아시아경기대회 역시 아시아 각국을 새롭게 이해하고 지구촌 사회의 일원임을 확인하며 아시아 공동체를 일구는 마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

해묵은 이념 논란은 이제 그만

사진/ '통~일조국!' 부산대회 개막식에서 남쪽의 하형주씨와 북쪽의 계순희 선수가 성화점화를 위해 뛰고 있다. (박승화 기자)
아시아의 연대는 단지 희망사항만이 아니다. 남한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북한이 전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아시아의 연대에 시사하는 게 적지 않다. 아시아경기대회가 분단을 뛰어넘고 총성을 멈추게 한 것이다. 부산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 정순택 위원장은 “북한의 참가로 대회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 아프가니스칸과 주변국들의 갈등이 신경쓰이는 게 사실이지만 스포츠를 통해 아시아의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아시아가 세계를 선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이념적 틀에 갇힌 논란이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한반도기 논란이 그것이다. 한반도기는 베이징대회를 앞두고 1989년에 열린 남북 간 체육회담에서 처음으로 거론됐다. 90년 대회에서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대회가 끝난 뒤 11월에 남북공동 깃발로 하얀색 바탕에 하늘색 지도를 새긴 한반도기를 채택했다. 그리고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렇게 남북을 연결하는 오작교 구실을 하는 한반도기가 동시입장을 앞두고 개최국에서 논란을 빚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공기 논란도 마찬가지다. 회원국의 국기의 지정 장소, 경기장 게양은 OCA 헌장에 따른 당연한 권리임에도 말이다.

사실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올림픽이나 월드컵과는 사뭇 다르다. 올림픽은 나치, 테러, 국제 보이콧 등의 재난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스포츠의 최고 영광을 상징하는 대회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선수들은 부와 명예도 거머쥔다. 금메달 하나를 따면 월 100만원의 연금이 나온다. 하지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적어도 금메달 두개를 따야 월 30만원을 받는다. 월드컵은 단 1승만으로도 국운 상승 운운하며 ‘4강 신화’로 예정에도 없던 병역혜택에 수억원대의 포상금까지 주었다. 하지만 아시아경기대회는 금메달을 차지한 남자 선수에 병역혜택이 주어질 뿐, 비인기종목은 포상금이 아예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민의 참여 열기도 뜨뜻미지근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시아경기대회를 폄하할 수는 없다.

남북 단일팀으로 감동축제 실현을

이제 부산에서 통일과 평화의 아시아드 막이 올랐다. 백두산과 한라산에서 각각 채화돼 임진각 망배단에서 합친 남북한 성화와 42개국에서 채화한 성화를 하나로 만드는 합화(合火)식도 있었다. 한글 자모순에 따라 네팔이 처음으로 입장했고, 개최국인 한국은 북한과 함께 맨 마지막 순서로 동시입장했다. 아직은 우리에게 ‘감동축제’로 자리매김하기에는 모자라는 게 많다. 남북이 손을 맞잡고 함께 응원하는 모습은 여전히 바람일 뿐이고 남북이 경쟁의 종지부를 찍고 함께 어우러지는 단일팀을 이루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이번 부산아시아경기대회는 그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아시아의 연대, 그 풋풋한 희망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시아의 축제는 시작됐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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