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 잇따른 흥행 참패로 위기설 득세… 탄탄한 기획력·맨파워로 돌파구 찾아
폭우로 물난리가 날 지경에 ‘성소’라는 태풍이 들이닥친 격이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개봉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하 성소)의 흥행 성적은 9월24일 기준으로 전국 14만명. 한국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110억원을 들였으나 비용을 건질 만한 길이 안 보이는 수치다. 이제 산업으로서의 한국영화는 <성소>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됐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좌절인가 한국영화의 위기인가?
영화판 뒤흔드는 ‘성소의 재앙’
<8월의 크리스마스> <처녀들의 저녁식사> <무사> <화산고> 등 도전적인 상업영화를 패기있게 만들어온 (주)싸이더스 차승재 대표는 솔직히 너무 괴롭다고 한다. “조정기가 아니라 분명한 위기다. 조정을 하기에는 제작비가 너무 올랐다.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건 <예스터데이> <아 유 레디?> <성소>로 이어지는 70억원 이상의 대작들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단 세편을 통해 200억원가량의 제작자본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영화는 흥행이 잘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다. 하루아침에 휘발유가 없어졌으니….”
그래도 뭔가 해결책이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잠시 말을 멈춘다. “…없다. 그냥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말고는….” 차 대표는 <성소>를 만든 당사자가 아니다. 그는 최근 수년간 한국 영화계를 주도해온 정상급 프로듀서이자 제작자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비관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성소>를 만든 (주)튜브엔터테인먼트 김승범 대표는 “솔직히 (회사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아직 믿고 투자해주는 분이 있으니까 설득 중”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사의 위기를 아주 좁게 보면, 현재 제작 중이거나 기획 중인 수십편의 영화가 연쇄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후반 작업 중인 <내츄럴 시티>와 <튜브 2030>, 촬영 중인 <데우스 마키나> 등 50억원 이상의 대작에 어떤 형태로든 금이 갈 수 있고, 기획·개발 중인 대여섯편의 영화가 ‘올스톱’될 수 있다. 직접적인 여파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ㄱ영화사는 순제작비 22억원의 영화 제작비 전액을 튜브엔터테인먼트로부터 투자받기로 계약을 맺은 지 두달이 넘었지만, 돈이 들어오지 않아 제작진행을 못하고 있다. 튜브엔터테인먼트와 한배를 탄 운명에 놓인 영화사가 이곳말고도 서너군데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신한 기획력을 인정받는 ㄱ영화사 대표가 말하는 상황은 지금 영화계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잘 말해준다.
“올해 들어서면서 돈줄이 마르기 시작했지만 지금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캐스팅까지 마친 또 다른 영화도 파이낸싱이 안 되고 있다. 그 전에는 배우 캐스팅이 완료되면 제작비 조달은 어렵지 않았다. 온갖 투자사·배급사를 찾아다녔지만 아주 냉담하다. 장르가 뭐냐고 물어보고 코미디가 아니면 (기획안을) 보여주지도 말라는 식이다. CJ엔터테인먼트 같은 탄탄한 회사도 마찬가지다.”
블록버스터를 ‘양산’하느라 지난 2년간 끊임없이 투자자를 찾아다닌 튜브엔터테인먼트의 김 대표는 “올해 상반기를 통해 돈 놓고 돈 먹기 하겠다는 단기 금융자본은 다 떠난 것 같다”고 말했다.
제작비 폭등으로 금융자본들 쓴맛
갑자기 위기라니? 한국 영화의 상반기 점유율이 46%에 이르고, 주5일 근무제가 확산되고 멀티플렉스 극장이 증가하는 등 영화산업의 성장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외친 게 바로 얼마 전 아닌가. 외형적 수치만 보면 언뜻 그렇게 보인다. 상반기 영화관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9.1% 증가한 1780만명을 기록했다. 특히 한국 영화 관객 수는 무려 46.9% 증가한 834만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기간에 개봉한 한국 영화 44편 가운데서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다섯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공공의 적>(300만명)이나 <집으로…>(420만명)같은 대형 흥행작들이 손님 대부분을 모셔갔다는 뜻이다. 반면 평균 제작비는 2∼3년 전보다 두배가량 오른 40억원에 이르러 투입 대비 손실이 그만큼 커졌다. KTB네트워크, 산은캐피탈, 무한기술투자 등 벤처캐피탈이 쏟아부은 수백억원의 돈이 큰 타격을 입었고, 각종 영화펀드 대부분이 상반기에만 20%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최근 한국 영화의 제작비 구성은 벤처캐피털을 중심으로 형성된 금융자본이 50∼60%, 양대 산맥을 이루는 CJ엔터테인먼트와 플레너스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한 배급사가 30∼40%, 제작사가 10%를 이룬다. 단기 금융자본이 대박을 기대하고 주로 돈을 쏟아부은 블록버스터들이 줄지어 무너졌으니 돈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법도 하다.
비관론이 팽배하지만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어 50억원짜리 대작 을 만든 명필름의 이은 프로듀서의 셈법도 현재 드러나는 수치와 크게 차이가 없다. 지난해에 영화 투자의 붐이 절정을 이뤘고, 그 과실을 받아 그 전 해의 두배에 이르는 평균 40억원 정도가 올해 개봉되는 60여편에 들어갔다. 2400억원 정도가 비용으로 들어간 셈이다. 올해 한국 영화가 벌어들일 수 있는 규모는 1200억원 정도니까 1천억 정도를 손해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 해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손해의 대부분은 금융자본이다. 영화도 자본주의화됐기 때문에 수익성이 있으면 돈이 몰리고, 수익성이 적어지면 돈이 빠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정도의 문제지 돈이 완전히 빠지지는 않는다. 번 곳이 있고, 비전도 있기 때문에 여전히 투자는 계속된다. 상대적으로 지난해보다 파이낸싱이 어려워지니까 기획단계부터 더욱 탄탄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다시 상품이 좋아진다. 일정한 자정 기간을 거쳐 이런 발전적 과정을 기대할 수 있다.”
“발전적 자정 거치면 상품성 높여”
많은 영화인들이 블록버스터에 대한 시도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는다. 비용을 많이 쓴다는 건 새로운 소재와 형식에 도전한다는 뜻이고, 국내외 시장 개척에 앞장 설 수 있기 때문이다. 튜브엔터테인먼트의 김 대표가 고집하는 게 이 대목이다. “블록버스터에 매달린다기보다 질 높은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챔피언>도 필요하니까 수억원을 들여 로스앤젤레스에서 특설링을 만들어 찍고, <공동경비구역 JSA>도 완성도를 높이려니까 수억원을 들여 판문점 세트를 제작하는 게 아닌가. <성소>는 큰 비용을 들인 데 비해 관객들에게 매력을 주는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실수를 많이 했으니까 꼭 만회하고 싶다. 세계 시장을 겨냥해 더 안정된 형태의 블록버스터를 만들고 싶다.”
블록버스터 제작의 문제는 애초 기획한 일정과 범위가 끝없이 늘어지면서 프로덕션 과정이 통제되지 못하고, 그 결과 비용은 비용대로 늘어나면서 작품의 질은 관리되지 못하는 현상이 되풀이되는 데 있다. 이은 프로듀서는 “평균 제작비가 두배로 뛴 주된 원인은 인건비 상승에 있지만, 그동안 스태프들이 받을 걸 못 받았기 때문에 결국 오를 게 올랐다고 봐야 한다. 프로덕션 과정의 세분화·전문화를 통해 촬영기간을 줄이는 식의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진짜 위기는 영화라는 상품이 다양한 맛을 잃고 소비자의 신뢰를 놓치는 데 있다. 홍콩 영화가 그랬다. 어떤 작품이 잘 나가면 질이야 어찌 됐든 죽어라 비슷한 영화를 양산하는 체제였다. <해피엔드>와 <와니와 준하>를 생산한 청년필름의 김광수 대표가 당장 차기작들의 제작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으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낙관하는 이유가 성격 탓은 아니다. “조폭 코미디가 잘된다고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짜임새 있는 게 잘된다. <오아시스>도 100만명을 돌파했고, <폰> 같은 호러 장르도 흥행이 잘되는 등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고 있다. 또 장르와 상관없이 흥행을 이어가는 배우들이 있다. 제작쪽에서 (노하우 등) 준비가 안 됐는데 한탕을 노리고 뛰어든 게 문제였다. 지금의 어려움을 잘 활용하면 오히려 긍정적인 정리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캐스팅 대란이라는 것도 제작사가 난립했고, 그만큼 영화사 만들기가 누워서 떡먹기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여전희 희망의 근거가 뿌리내린다
능력 있는 제작자들의 생각이 극과 극을 달릴 정도로 한국 영화계는 혼돈 속에 빠져 있다. 하지만 희망은 늘 있게 마련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허문영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는 ‘관찰자’의 위치에서 이렇게 말한다. “90년대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붐이 일어나던 무렵과 비교하면, 창의적인 대중 영화와 장르 영화가 감퇴하고 있다는 건 명백하다. 시장에서도 그런 영화가 외면받고 있다. 그럼에도 전망은 어둡지 않다. 한국 영화는 흡족하지 않은 조건에서 늘 돌파구를 마련해왔고 지금도 그 힘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의 원천은 맨파워에 있었고, 좋은 인력들은 여전히 모여들고 있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그래도 뭔가 해결책이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잠시 말을 멈춘다. “…없다. 그냥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말고는….” 차 대표는 <성소>를 만든 당사자가 아니다. 그는 최근 수년간 한국 영화계를 주도해온 정상급 프로듀서이자 제작자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비관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