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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자본이여, 금메달을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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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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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올림픽 감동의 순간은 CF효과 극대화의 순간… 공식후원기업들의 마케팅전쟁

(사진/남자 육상 1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딴 모리스 그린. 선명한 성조기 무늬에 날렵한 나이키가 빛나는 순간이다)
모리스 그린(26·미국)이 던진 것은 ‘나이키’ 신발이었다. 시드니의 올림픽 스타디움에 운집한 11만명의 관중이 환호했다. 지난 9월23일 시드니올림픽 남자 육상 100m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였다.

그린이 감격에 겨워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다. 그는 결승점을 통과하자마자 신발을 벗어 목에 걸었다. 세계의 모든 눈이 그에게 쏠리는 순간, 카메라의 앵글은 정확히 그린의 가슴께에 가 닿았다.

세계에 전파된 나이키의 힘


선명한 성조기 무늬에 날렵한 나이키 표시가 빛났다. 금메달을 딴 것은 그린이었지만, 그 영광의 순간을 빌려 세계에 전파된 것은 나이키의 힘이었다. ‘전쟁의 신’ 나이키가 그린을 빌려 오늘에 다시 현현한 것이다.

그린은 광고모델로서 상상가능한 최고의 역할을 해냈다. 그의 역주는 연출되지 않은 CF였고, 신발을 벗어던진 것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아마도 다음 계약 때 그는 더 많은 돈을 나이키사에 요구할 것이다.

올림픽은 그렇게 승리의 원초적인 감격을 만끽해야 할 순간까지도 자본의 개입에 문을 열어놓는다. 이를 놓고 ‘아마추어리즘의 훼손’이라고 목청을 높인다면 그 또한 순진한 것이다.

스포츠의 아마추어리즘은 이미 난센스다. 자본과의 상호작용 없이 스포츠는 없다. 사실 아마추어리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순진한 것이었다. 19세기 유럽의 귀족들이 점증하는 국가간의 대립과 ‘천박한’ 상업주의에 구애받지 않고 정당한 경쟁을 즐기자고 주창한 것이 아마추어리즘이다.

그들이 경계한 상업주의란 도박이 성행했던 노동자들의 스포츠 경기였다. 청정무구의 그 이념은 호의호식하던 귀족들이 유럽대륙에서 스러져간 순간 함께 사라져버렸다. 올림픽을 근대에 되살린 것이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이었음은 놀랍지도 않다.

2000 시드니올림픽은 자본의 힘이 넘실대는 새 천년 스포츠 제전의 집성터다. 세계 유수의 다국적 기업들에게 올림픽은 더할 나위 없는 광고시장이다. 이번 올림픽에 공식 후원업체로 등록된 기업은 모두 24개. 이 가운데 11개사는 전세계를 통해 올림픽의 지적재산권을 광고 및 홍보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각 부문별로 독점적인 권리를 갖는 이들 11개 기업을 TOP(The Olympic Partner)이라 부른다. 나머지 13개 기업은 오스트레일리아 내에서만 올림픽의 지적재산권 사용이 가능하다.

TOP 기업이 올림픽에서 갖는 지위는 막강하다. 올림픽 관련 결제카드는 무조건 VISA카드, 모든 무알코올음료는 코카콜라, 모든 컴퓨터 시스템은 IBM, 모든 오디오·비디오 설비는 파나소닉, 모든 차량은 홀덴, 모든 휴대폰은 삼성…. 이런 식이다. 대부분이 다국적기업인 이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이벤트인 올림픽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이들이 이번 올림픽에서 독점적인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IOC 등에 지불한 총액은 모두 5억5천만달러. 당연히 이들 기업은 더 많은 올림픽 파생수입을 확신하며 스폰서 비용을 내놓았다. 신용카드 회사인 비자는 그 대표적인 경우다.

400만장 신규카드 발급한 비자

(사진/시드니올림픽 경기장을 방문한 MS회장 빌게이츠.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이벤트인 올림픽은 다국적 기업에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
시드니가 2000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직후인 지난 97년 비자는 오스트레일리아 관광청과 독점적인 제휴를 맺었다. 동시에 오스트레일리아 내의 광고를 확대하고, 연계관광상품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이후 3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는 해외관광객이 7% 증가에 그친 반면, 비자카드를 소지한 해외관광객은 무려 23%나 급증했다.

비자가 TOP에 참여한 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때는 나가노지역의 비자카드 가맹점 매출이 1000% 이상 증가했고, 평소 2%에 그쳤던 카드 결제비율도 20∼40%에 이르렀을 정도다. 세계최고의 관광지로 손꼽히는 시드니에서는 이보다 더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비자의 분석이다.

그런 식으로 지난 14년간의 올림픽 후원활동 기간 동안 비자는 모두 2천만장 이상의 카드를 발급했고, 이번 올림픽에서도 전세계적으로 400만장의 신규카드발급을 예상하고 있다.

비자가 ‘속보이는’ 돈놀음에 열중하고 있다면, 코카콜라는 제법 의연한 모양을 갖췄다. 이미 세계 음료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한데다, 세계 최고의 브랜드 인지도를 자랑하는 코카콜라는 ‘이미지 관리’에 더 신경쓰고 있다.

1928년 이후 줄곧 올림픽을 후원해온 코카콜라는 ‘환경올림픽’이라는 취지에 걸맞게 100대의 무공해 자동판매기를 올림픽파크 곳곳에 설치했다.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 대신 하이드로 카본을 냉매가스로 사용한 자동판매기다. 또 코카콜라의 PET병을 소재로 한 티셔츠까지 만들어 나눠주고 있다. 올림픽마다 각국 선수와 취재진들이 기념핀을 교환하는 데 착안해 대규모 ‘핀교역 센터’도 시드니 시내에 설치했다.

그렇다고 베풀기만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1700대의 ‘환경파괴적 자동판매기’가 발길 닿는 모든 곳에 버티고 있다. 청량음료는 물론 물 한잔까지도 코카콜라의 제품만 마셔야 한다. 예의 그 검붉은 광고판을 논외로 치더라도 코카콜라는 지겹도록 올림픽의 모든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번 올림픽에서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TOP 대열에 끼어든 삼성은 ‘후발주자’답게 물량공세를 통해 인지도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시드니 올림픽파크 내에 1230평 규모의 대형 홍보관을 설치한 삼성은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선수들과 가족들이 서로 상봉할 수 있는 공간까지 만들었다. 브랜드 인지도가 낮다는 판단에 처음부터 대대적인 광고공세를 펴고 있는 셈이다.

처음으로 TOP 대열에 뛰어든 삼성

(사진/선수들과 가족들이 서로 만날수 있는 공간을 만든 삼성.브랜드 이미지가 낮다는 판단에 따라 대대적 광고공세를 펴고 있다)
삼성전자의 홍경표 과장은 “하루 5만명 이상이 홍보관을 찾는 등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며 “오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올림픽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더 폭넓은 스포츠마케팅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각 기업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올림픽을 통한 마케팅에 달려드는 것은 올림픽이 가진 무한한 경제적 효과 때문이다.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올림픽을 치르고 있는 시드니는 올림픽 기간 동안만 25만명의 해외손님을 끌어들였다.

97년 이후 올림픽 관련 해외방문객은 160만명이다. 모든 경기는 96애틀랜타올림픽보다 많은 220개국에 중계되고 있고, 연인원 40억명이 올림픽 기간 동안 이 방송을 시청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번 올림픽으로 발생한 총수입은 방송권 중계료 13억1800만달러를 비롯해 모두 27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천문학적인 이 시장에 각국의 거대기업이 군침을 흘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할리우드가 ‘자본’이듯이 이제 올림픽 또한 그렇다. 올림픽은 자본의 품에 안겼다. 아니, 처음부터 그럴 운명이었다. 이 거대한 인류의 잔치에 밑천을 제공할 곳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밖에 없다.

이제 올림픽의 수많은 ‘모리스 그린’들은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더이상 연출하지 않는다. 모두 멋진 CF의 주인공이 되기를 꿈꿀 뿐이다. 올림픽은 그 속에서 더 성대해지고 있거나 혹은 초라해져가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살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스포츠 마케팅 시장이다.

시드니=안수찬 기자 /한겨레 스포츠레저부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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