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아저씨의 마지막 추석
등록 : 2002-10-02 00:00 수정 :
언제 나갔다 오셨는지 아침 일찍부터 아버님은 나들이옷을 입고 계신다. 가끔 출근길 동행의 경험으로 미루어 농협에 일 보러 가시는 줄 알았더니 “금수가 새벽에 죽었단다. 문상 갈라고…”라며 말끝을 흐리신다. 금수 아저씨는 다름 아닌 수영이 할아버지다. 68살로 아버님과 동갑인데 폐가 안 좋아 내내 병원신세지다가 퇴원한 지 하루 만에 돌아가셨단다.
리어카를 끌고가는 수영이 할아버지에다 대고 경적을 울려봤자 허사다. 들을 수 없으니 천천히 따라가든지 차에서 내려 붙들고 손짓발짓해야 길을 내주던 기억이 새롭다. 시골동네에 초상나기는 다반사인데 나도 맘이 안 좋다.
어머니는 수영이 할아버지를 앞세운 89살된 노할머니가 가장 안됐단다. 금수 아저씨는 장돌뱅이인 어머니의 억척으로 제법 돈도 물려받은 터였다. 선천적 청각장애인인 금수 아저씨가 재산을 차츰 까먹는가 싶더니 결국 큰아들이 농기계사업으로 살림을 옴막(몽땅) 거덜내고 부모를 빚더미에 앉혔다. 지지난해에는 농가부채로 남은 빚 때문에 수확해놓은 나락과 살림에 차압이 붙기도 했다.
“아들만 6형제면 뭣혀? 한푼을 보태주기는커녕 뜯어가려고만 하고 이혼한 둘째아들은 아이들 까지 맡겨놓고 나 몰라라 하는디.”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수영이 할머니는 가끔 푸념삼아 내뱉어 놓는다.
남의 땅 서너 마지기 부치는 것이 전부이고 이집 저집 품팔이로 연명하는 수영이 할머니는 다가오는 겨울이 두렵단다. “지금은 삭신 움직여 남의 집 일이라도 다니는데 겨울 되면 일도 없고 요즘은 아침에 눈뜨기가 무섭다”는 수영이 할머니에게 남편 금수 아저씨의 죽음에 목놓아 슬퍼하는게 오히려 사치이지 싶다.
동네 안쪽으로 이사오기 전인 4년 전 수영이 할머니는 늦은 밤 우리집에 찾아든 적이 있었다. 손타박이 심한 금수 아저씨에게 그날도 맞고 집을 나오기는 했는데 갈 데가 없어 동네와 떨어져 있는 우리집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녘에 사라졌다. “이 나이 먹어서도 남편의 매질을 당해야 하느냐”며 이번엔 진짜로 나간다던 수영이 할머니는 다음날로 집에 들어갔다.
초상덕(?)분에 추석 전부터 동네가 들썩인다. 동네 친인척들인 젊은 아이들이 밤늦도록 마을회관 앞에 모여 진을 치더니 출상날 아침에 아버님과 동네 노인들이 상여틀을 준비하고 있다. “저 양반들이 상여를 멜란가?” 싶었는데 다행히 금수 아저씨 아들과 처남 친구들이 상여도 메고 장례를 잘 치렀단다.
송편 빚고, 전 부치고, 나물 다듬고 추석준비로 바쁜데 미정이 엄마가 양말을 전하러 들어선다. 수영이 할머니가 고생한 동네 사람들에게 양말 한 켤레씩 돌리나 보다. 어머니는 “이런 것 안 주면 어쩐다고, 그 집은 추석을 어찌 보낼지 모르겠다”며 짠한 맘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도 수영이 할머니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지 싶다. 아무리 못 나고 미운 사람이라도 영원히 떠나보내기에는 시간이 족히 걸린다. 사방이 조용한 것보다는 낫다.
할아버지 초상과 추석을 정신없이 보냈을 수영이를 학교까지 태워다주며 비껴본 아이의 얼굴은 더욱 굳어보인다. 수영이네 올 겨울나기가 걱정이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