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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성 로커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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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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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밴드 눈요기 멤버에서 간판스타로… 그들은 한국 록의 역사를 다시 쓸 건가

확실히 여성 멤버를 품고 있는 록 밴드들이 늘었다. 내가 멤버로 있는 ‘3호선 버터플라이’에도 여자 멤버가 있다. 솔직히 말해 내가 이 밴드를 탈퇴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어도 여자 멤버(남상아)가 그렇게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만일 내가 밴드를 탈퇴하면? 밴드는 처음에 조금 휘청거릴지 모른다. 그러나 얼마 후 나보다 더 젊고 멋진 기타리스트가 교체 멤버로 들어와 밴드가 더 잘 꾸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상아가 밴드를 그만두면? 두말할 것 없이 그 즉시 밴드가 ‘해체’될 것이다. 이유는 뻔하다. 여자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상아는 화를 낼지 모른다. “무슨 소리냐, 우리는 똑같다. 함께 하는 것이다!” 뭐 그러면서 굳이 ‘평등’을 강조해줄 것이다.

여성 이미지가 없었던 전통 록 밴드

사진/ 좀 더 대중적이고 발랄한 음악으로 돌아온 체리필터.
물론 옛날에도 여성 록 밴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제니스 조플린 같은 불세출의 보컬리스트는 사이키델릭한 시대를 풍미한 이른바 ‘3J’(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을 포함한)의 한명이었다. 또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밴드의 노래들에서 여자 록 싱어의 목소리를 지우면 그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포함된 이러한 고전적인 록 밴드에서 여자는 대부분 남자 멤버들이 음악적인 모든 것을 만들고 이끌어나가는 상황 속에서 그 상황에 종속된 일부(특히 보컬)였다. 그들은 단지 모든 것을 형상화하는 ‘프론트 걸’이었을 뿐이다.


신중현이 이끈 왕년의 밴드들에서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한 역할 역시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김추자·김정미 같은 불세출의 가수들에 있는 음악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밴드 안에서 그들의 역할이 아무리 중추적인 것이었다 해도 주도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실은 그렇게라도 여자가 록 밴드 안에 있는 것조차 전통적인 록 밴드의 이미지에 비춰보면 예외적인 것이었다. 전통적인 록 밴드의 이미지에는 여자가 없다. 여성의 음역까지 올라가는 머리 긴 남자가 노래를 하니 여성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는 오히려 남성성을 강화한다. 신화에 등장하는 ‘암수동체’의 신처럼, 이런 로커의 이미지는 더 완벽한 남성성의 현현으로 귀결된다. 여자까지 포함하고 있는 완벽한 남자 말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 밴드말고도 수많은 밴드에 여성 멤버가 있다. ‘자우림’이나 ‘체리 필터’ 같은 밴드는, 남자들이 여자 멤버를 데리고 있는 게 아니라 여자 멤버가 남자들을 거느린 느낌이다. 수적으로도 열세인데 말이다. 그보다 어린 세대의 밴드에서는 아예 여자들 ‘여럿’이 남자 한둘을 거느린 형식의 밴드들도 있다. 일전에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에 출연할 신인 밴드를 뽑는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일이 있었는데, 여자들이 주도하는 록 밴드가 많아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이제 그냥 마이크만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는 자기 몸보다 큰 기타며 베이스며를 들고 전면에 나서 밴드를 이끈다.

전통적 ‘뇌쇄성’에 힘찬 보컬까지

사진/ 성기완(오른쪽), 남상아(왼쪽), 김상우(가운데)가 결성한 '3호선 버터플라이'.
남자들이 길길이 뛰는 밴드들도 매력이 없지는 않지만, 여성 록 밴드의 묘한 매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매력의 배경에는 물론 아름다운 여자들이 발산하는 전통적인 ‘뇌쇄성’이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매력에 쉽게 빠지고 만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그것말고도 여러 점에서 여자들이 하는 록 밴드가 신선하다. 우선은 기타 같은 악기를 다루는 모습 자체가 그렇다. 기타는 전통적 록 밴드에서는 남근의 연장이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자기 성기의 외면적 표출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들이 멘 ‘기타’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 기타는 여자들이 부드럽게 품고 있는 무엇이다. 귀엽고 예쁜 털북숭이 애완동물이거나, 아니면 더 진지할 경우에는 아기처럼 보인다. 여자들은 기타를 쓰다듬는다. 잔뜩 발기된 성기를 마구 휘두르는 듯한 기타 솔로가 여자들의 기타에는 없다. 물론 현란한 기타 솔로를 하거나 마구 험하게 노이즈를 내는 여자 기타리스트들도 없지는 않지만 그럴 때조차, 그 기타는 상처를 아프게 뜯어내는 자해의 도구처럼 보인다.

사진/ 최근 4집 앨범을 낸 자우림, 보컬 김윤아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미국에는 한때 ‘라이엇 걸’이라고 해서 남자들이 무대에서 하던 과격한 짓을 그대로 여자들이 대신하는 밴드들이 한창 나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매우 처절했다. 남자들이 쥐고 있는 판에 뛰어들어 격렬하게 몸싸움을 하는 격이었다. 라이엇 걸들의 활약이 없었으면 지금처럼 여자들이 앞장서서 록을 하는 상황을 맞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활약이 정치적으로 중요했고 선구적이었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음악이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남자들이 하던 것을 그냥 여자가 대신하는 정도라면 뭐 다를 게 있겠나. 그러나 요즈음 여성 밴드들은 남자들이 하던 것의 의미론적 코드들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새롭게 느껴진다. 사실 이건 여자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그냥 남자들이 치던 기타를 들고 그들이 하던 역할을 ‘대신한다’는 정도로는 불충분하다. 그렇게 되면 일종의 헤게모니 싸움이 된다. 그들의 록 음악이 남자들이 하던 것과 ‘다른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건 나의 괜한 걱정일지 모른다. 기본적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기만 하면 달라지니까.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밴드 이름이겠지만 ‘네눈박이 나무밑쑤시기’라든가 ‘뷰렛’, ‘내스티 요나’, ‘파스텔’, ‘라비앙로즈’ 같은, 여자들이 중심인 최신 여성 록 밴드들은 실제로 그렇게 ‘다르게’ 록 음악에 접근해 다른 소리와 느낌을 전한다. 여성 트윈 기타 솔로 같은 것도 들을 수 있고, 힘찬 여자 보컬도 들을 수 있다. 못된 느낌의, 뇌쇄적인 여인이 아주 감각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을 볼 수도 있고, 인형을 만들 듯 음악을 만드는 밴드도 있고, 인디언 소녀 같은 이미지의 귀여운 친구들이 거친 노이즈를 뿜어내는 것도 들을 수 있다. 과거에는 듣거나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들은 앞으로 한국 록 음악의 중추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젠 남성성도 하나의 스타일일 뿐

확실히 지금의 남자들은 기껏해야 꼴사나운 근육질을 과시하는 것말고는 할 것이 별로 없는 시대다. 물론 길길이 뛰는 젊은 남자들의 이미지가 록 밴드에서 여전히 주도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자를 마음대로 다루고 우습게 아는 남자가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의 그런 개성을 뽐내느라 애쓰는 꼴을 좋게 봐줄 사람이 있을까. 록 밴드는 더 이상 남자들의 여자에 대한 권력관계에서의 우위를 상징하지 않는다. 활기 넘치는 남성성을 무대 위에서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스타일의 하나일 뿐이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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