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문인 김학철 선생 1주기 맞아… 민족문학의 지평 넓힌 투사의 생애
지난달 25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는 ‘한국조선족문화예술인후원회’와 ‘중국옌볜인민출판사’ 주최로 <20세기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의 <김학철문학편> 출간기념회가 김학철 선생 서거 한돌 추모행사로 열려 미망인 김혜원 여사와 외아들 김해양 형을 비롯해 조선족 문인들이 참여해 조촐하면서도 알차게 치러졌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시종 기이한 감동에 휘감겨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런 모임이 중국 현지에서가 아니라 이 서울에서 열렸다는 점 때문이었다. 중국 안에서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서 평생동안 우리 글을 써왔으니, 비록 중국 국적은 지니고 있었지만, 어릴 때 떠나온 고국, 즉 우리 문학의 반열에 들겠다는 열망임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겠다. 바로 그 때문에 살아생전에 고인과 자별한 정을 나누었던 필자에게는 싸아하게 가슴이 아려오기부터 하였다.
서울에서 열린 감동적인 추모행사
그렇다. 고인께서는 자신이 조선 사람임을 끝까지 견지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이승 떠나서도 고향 땅 원산에 묻히기를 간절히 소망하셨다. 여북하면 유언으로까지 이 중국 땅엘랑 묻지 말라, 화장해서 뼛가루를 두만강에다 뿌려라, 그렇게 바닷길로라도 고향 땅 원산으로 가고 싶노라고 했을 것인가. 엄연히 현 중국 국적이었으면서도, 끝끝내는 자신이 조선 사람임을 굳건하게 견지하신 점, 그 모순을 모순대로 끌어안고 말년에 이를수록 혼자 괴로워하신 점은 곁에서 보기에도 여간 안쓰러워 보이지 않았다.
더러 서울 오셨을 때도 손자 아이를 서울로 유학 오게 할 수 있는 길이 혹 없을까 하고 조심조심 말씀을 꺼내기도 하셨는데, 진짜 속셈은 손자 아이만이라도 당신의 조국 땅으로 아주아주 돌아오게 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필자 나름으론 날카롭게 간취했다. 어릴 때 떠난 고향 원산 바다를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외아들의 이름까지 해양(海洋)이라고 지었을 것인가.
선생은 1916년 강원도 원산시 용동에서 출생했다. 필자가 태어난 현동에서 불과 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하여 필자를 만날 때마다 둘이 손잡고 고향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서울 보성고 재학 중에 윤봉길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에 고무되어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일제와 싸우던 중 중상을 입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무기형을 선고받는다. 그렇게 일본 히로시마 감옥에서 부상당한 다리 하나를 절단, 평생을 외다리로 지내시면서도 파란만장한 세월을 올곧게 버텨오셨다. 필자가 선생께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문학의 길로 처음 들어선 것은 히로시마 감옥 안에 있을 때 역시 같은 수인으로 갇혀 있던 송지영 선생의 권고였다는 거였다.
“앞으로 설혹 풀려나가더라도 다리가 이 모양이니 뭘 해먹고 살아야 할는지 원” 하고 어느 날 푸념을 하였더니 송지영씨가 “몸이 그러고도 한 가지 할 만한 일이 있지. 글쓰기, 가령 소설쓰기 같은 것” 하더라는 것이다. 듣고 본즉, 그렇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결국 선생은 외다리로 광복을 맞아 서울로 돌아오자 실제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1946년 평양으로 들어가 만 4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가 갖은 파란곡절 끝에, 6·25전쟁 중에 중국으로 들어간다.
그 뒤로 베이징과 옌지에서 문학 창작에 정진, 1967년에는 우파로 몰려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찍히게 되고 이른바 문화대혁명 때는 미발표작 <20세기 신화>로 얽혀 10년 동안이나 옥고를 치른다. 1977년 만기출옥해 1980년에 무죄선고를 받은 뒤 65살의 고령으로 다시 왕성한 창작 생활로 돌아와 우리 한국방송의 ‘해외동포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러다 선생은 2001년 9월25일에 옌지에서 세상을 떠난다.
선생이 남긴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1954), <격정시대>(1986), <20세기 신화>(1996) 소설집 <새 집 드는 날>(1953), 전기문학 <항전별곡>(1986), <최후의 분대장>(1995),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2001), <김학철 문집>(전 5권).
선생께서는 소련권이 줄줄이 붕괴되고 중국도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를 겪는 속에서도 끝끝내 자신이 유물론자이고 정통 사회주의자임을 안간힘을 쓰며 견지하셨다. 그 점이 필자 같은 사람에게는 조금 억지스러운 오기로 비치기도 했으나, 선생은 이 점에서만은 시종일관 끄떡없었고 어디서나 거리낌이 없으셨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현 중국이나 북한의 일당 독재체제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 완강하고 견결하게 반대 입장임을 천명하곤 하셨다. 그 모습이 더러는 여간 안쓰러워 보이지 않았다.
특히 선생의 최후 모습은 그 점에서도 한치 틈도 없이 장렬하였다.
임종 전, 2001년 9월5일에 작성한 유언장부터가 평소의 선생다웠다.
“남기는 말.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 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김학철.”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김학철 구술, 김해양 기록. 2001년 9월9일(금식 닷새째).”
“원산 앞바다 행 유골로 고향을 찾아”
본인 유언대로 유골은 두만강에 뿌리고, 남은 것은 우편국의 우편박스에 담아 두만강 물에 띄웠고, 그 장례행렬의 맨 앞에는 다음과 같이 적힌 깃발이 들려 있었다.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친우 보내드림.”
그렇게 임종하시기까지 꼭 스무날간의 금식 과정의 자취(외아들 김해양 기록)도 명실공히 86살의 늙은 투사답게 한치도 빈틈이 없고 거인다웠다.
어떤가. 이리하여 김학철 선생은 국내의 어느 작가보다도 치열하고 의연했던 민족작가이지 않았을까. 살아생전 그이의 바람도 그랬을 것이다. 이 나라 민족문학의 반열에 확고히 들고 싶어하셨던 것이다.
마땅히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이호철/ 소설가

사진/ 지난 9월25일 열린 김학철 선생 추모행사 모습.

사진/ 민족작가로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등의 소설과 전기문학, 산문집 등을 남긴 김학철 선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