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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누가 장선우를 말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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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9-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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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이상한 화법, 우리는 진정 그것을 즐길 수 있는가

9월13일 함께 개봉해 추석 연휴의 극장가에서 경합하는 한국 영화들 가운데 <가문의 영광>과 <연애소설>보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12일 현재 예매율에서 현격히 뒤진다. 예매율은 흥행 여부를 사전에 점쳐볼 수 있는 유일한 과학적 잣대다. 지난 9일 <성냥팔이…>의 첫 시사회가 끝난 뒤 한 극장 관계자는 “손익분기점이라는 250만명은 기대하기 곤란한 수같다. 이제 한국영화는 ‘성냥팔이…’ 이전과 ‘성냥팔이…’ 이후로 나뉠 것이다”라고 다소 비감스럽게 말했다. <성냥팔이…>를 바라보는 시야에는 92억원이라는 한국 영화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대작이라는 그물이 둘러쳐져 있다. 제작비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길 만한 볼거리와 재미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걸 기본 전제처럼 깔고 이 영화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럴 만도 하다. 이 영화의 제작비가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제작투자를 담당한 튜브엔터테인먼트는 회사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성냥팔이…>가 흥행에 실패하면, 한국 영화에 대한 투자상황은 결정적으로 빙하기를 맞이할 것이란 예측도 분분하다.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장선우 감독은 태평하다.

“관객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본다”

사진/ "정말로 <성냥팔이…>는 즐길 만한 영화인가."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여 영화를 만든 장선우 감독.
“이 작품은 ‘게임영화’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하나의 게임이다. 플레이어(관객)의 능력에 따라 영화를 본 감회가 다를 것이다. ‘지존’이라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고수’는 슬픔을 느낄 것이다. ‘중수’라면 한번 봐서는 답답해하지만 다시 한번 게임(영화)에 접속해보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아집과 독선에 가득 찬 오만인가, 천재적 작가의 애교어린 훈수인가? 이건 자신의 창작품을 이제 막 시장에 내놓고 살 떨려 하는 여느 감독의 태도가 아니다. 세상에, 게이머에 비유하긴 했어도 당신의 머리 수준에 따라 영화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식의 말투라니. ‘문제적 작가’와 ‘잡놈’이라는 평가가 어우러지는 감독답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선우의 배짱이 허풍만은 아니다. 왜 그런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한국 영화 최고의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라는 허물부터 벗겨내야 한다. 영화를 보면 감독 스스로 거대한 제작비에 대한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았다는 게 명백하다. 짓눌리긴커녕 맘껏 놀아댄 기색이 역력하다. 블록버스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키치적 미학으로 넘치는 캐릭터와 연기가 걸핏하면 튀어나온다. 첫 시퀀스부터가 그렇다. 이난영의 흘러간 트로트 <목포의 눈물>이 간드러지게 흐르는 가운데 마치 코믹 무성영화 같은 이미지가 웃을 수만은 없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부러 컴퓨터 그래픽임을 드러낸 듯한 쏟아지는 눈 사이로 가냘픈 몸매의 성냥팔이 소녀(임은경)가 추위에 떨며 호소한다. “라이터 사세요. 라이터요.” 자막으로 흘러나오는 주위의 반응은 모질다. “라이터 두개 사줄게, 네 몸을 주지 않으련?” “라이터 가스라도 마셔봐. 질 좋은 부탄가스지.” 차가운 외면에 지친 소녀는 라이터의 가스에 취해 몽롱한 꿈을 꾸며 ‘행복하게’ 얼어 죽는다. 장난스러우면서도 장난 같지 않은 서두다. 영화는 이제 게임의 가상현실과 실제현실 사이 속으로 질주를 시작한다. 그런데 또 다른 주인공인 중국집 배달소년 주(김현성)가 가상현실로 접속하기도 전에 엉뚱한 일을 저지른다. 장난전화로 음식배달을 시킨 한 기업과 직원들을 자동소총으로 박살내버리는 상상 장면인데, 하필 그 회사가 엔터테인먼트사임을 분명히 한다(제작비 문제를 놓고 제작사와 신경전을 벌인 장선우 감독의 잠적소동이 이 장면에서 스멀스멀 떠오르는 건 뭘까).

가상·현실 좌충우돌… 유치한 캐릭터

사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국내 최고의 제작비가 들어갔음에도 감독이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또 성냥팔이… 게임에 접속한 주를 돕거나 방해하는 캐릭터들은 어딘가 유치하다. <툼 레이더>의 라라 크로포트를 연상시키는 여전사 라라(진싱)는 지성을 겸비한 미녀의 원작 버전이 아니다. 성전환자에다다 과격하고 무식한 티를 폴폴 풍긴다. 성냥팔이 소녀(성소)의 사랑을 차지하려는 5인조 갱들은 양아치에 가깝고, 그들의 대사와 연기는 1960, 70년대 깡패영화식의 과장미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홍콩 최고의 무술촬영팀을 불러다놓고 <매트릭스> 식의 세련된 액션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일그러뜨려 차용한다. 사람들은 <화성침공>을 만든 팀 버튼 감독에게 “넌, 왜 외계인 침공이라는 이야기를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거창하고 감동적으로 만들지 않고, 유치하면서도 조롱기로 가득 찬 영화로 만들었니?”라고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을 마구 쓰며 자기 개성껏 영화를 만드는 그를 높이 칭찬한다. 그렇다면 장선우 감독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넌, 왜 충무로의 피 같은 돈을 무지막지하게 갖다쓰면서 매끈한 블록버스터를 만들지 않았니?”가 아니라 “넌, 네 맘대로 영화를 찍어놓고 즐기라고 하는데 이 영화가 정말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니?”라고.

<너에게 나를 보낸다> <꽃잎> <나쁜 영화> <거짓말> 등 만들 때마다 입방아에 오른 그의 작품들이지만, 늘 지지자가 있었다. <화엄경>을 빼놓고는 대체로 흥행에 실패하지 않았다. <성냥팔이…>의 기호도 전작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양립이 불가능해보이는 게임 규칙부터가 그렇다. 다른 방해자(또는 게이머)를 막아 슬픈 동화처럼 성소를 얼어 죽도록 하라니(살려내라는 게 아니고). 또 죽도록 놔두라면서 성소의 사랑을 얻으라고 한다. 두 주인공인 성소와 주는 시스템이 부여한 규칙 속에서 행복을 얻으려 한다. 성소는 가상 속에서, 주는 현실 속에서 공히 ‘루저’(패배자)다. 힘 없는 패배자가 어떤 성취를 이루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이들은 시스템의 규칙에 반하는 버그를 일으킨다. 착하기만 한 성소는 자기를 얼어 죽게 하려는 시스템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기 시작하고, 주는 규칙과 반대로 성소의 생명을 지켜 사랑을 나누려고 한다. 시스템이 보기에 그들은 ‘바이러스’가 됐다. 제거작업이 시작된다.

그만의 깨달음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어느덧 영화의 눈길은 ‘바이러스’쪽으로 기운다. 그런데 장선우 감독은 세상이 지독하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절감해왔다. 하찮은 바이러스가 시스템을 쉽사리 이겨내는 건 할리우드식 화법이다. 그래서 버전1의 서글픈 결말이 나온다. 그의 영화는 늘 그래왔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행복감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버전2의 행복한 결말이 이어진다. 주가 시스템을 극복하는 방법은 금강경의 한 구절로 예시된다.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만약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진리)를 보리라).” 마침내 주와 성소는 이상향의 섬에서 행복한 삶을 꾸린다. 게임을 이긴 그들에게 시스템은 계속 돈을 쌓아주는데, 이건 시스템이 파괴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시스템을 이겼으나 시스템은 여전하고, 그 속에서도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비결을 이 영화만 보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장선우 감독 자신은 이를 온전히 깨달은 모양이다. 시스템과 다투면서도 시스템이 주는 100억원대의 돈을 가지고 맘껏 영화를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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