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문화팀 두 기자가 독신들에게 제안하는 ‘나 홀로 연휴 보내기’
명절 연휴는 모처럼 가족이 한데 모이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지만 짧게나마 지친 마음을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기도 합니다. 추석 연휴를 맞아 집에서 손쉽게 뭔가를 음미할 수 있는 건 문화 콘텐츠가 아닐까요. 어쩔 수 없이 긴 시간을 홀로 보내야 하는 문화팀의 독신남녀 두 기자가 스스로 계획표를 짜봤습니다. 연휴에 작은 참고가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독신남의 연휴 보내기
자꾸 한숨이 나온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를 놓고 기획한 ‘독신남들의 수다’에서 독신을 숨막히게 하는 명절 연휴에 절대로 국내에 있지 않겠다고 공언한 지가 불과 한달도 안 되는데, 그걸 지킬 도리가 없게 됐다. 경비 조달의 어려움에 게으름까지 겹쳐 어영부영하는 사이 추석이 코앞에 닥쳐왔다. 꽉 막힐 전국의 도로망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 어디론가 탈출할 엄두를 낼 수 없으니 꼼짝없이 도시에 갇힐 처지다. 그나마 연휴가 짧다는 걸 위안 삼아야 하나. 이제 남은 방법은 비디오·책·만화·텔레비전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어바웃 어 보이> 주인공처럼 즐겁게 가택연금을 자청하려면 목록이 알차야 할 텐데…. 인터넷을 통해 미리미리 책을 주문해두었다는 영화월간지 기자, “평소대로 보내면 되지, 뭐” 하며 태평스러워하는 대중문화평론가, 기적적으로 유럽행 티켓을 끊어놓은 소설가 등 30대에 접어든 독신남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고 났더니 다른 한숨이 나온다. 이걸 언제 다 보고 읽지?
“비디오와 DVD로만 나왔는데, 요즘 우리 회사에서 컬트가 됐어. 이걸 안 보면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야. 엽기발랄하고 기상천외한 이야긴데 이 코드로 이야기하고 웃는 게 유행이지. 특히 우울할 때 보면 직효야.” 우울할 땐 엽기발랄한 게 직효
귀가 번쩍 뜨인다. 국내에는 배우로 더 알려진 벤 스틸러가 감독과 주연을 한 코믹물 <주랜더>를 가리키는 말이다. 출연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오웬 윌슨, 존 보이트, 밀라 요보비치, 데이비드 듀코브니, 빈스 본, 쿠바 구딩 주니어, 위노나 라이더 등. “<오스틴 파워> 이래 이렇게 충격적인 영화는 처음”이라는 어떤 DVD 칼럼니스트의 말까지 듣고 나니 대여 0순위로 올라간다.
그 많은 영화 시사회를 모두 챙길 수 없어 가끔씩 주요 작품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로열 테넌바움>도 그런 사례인데, 유난히 애를 태워야 했다. 같은 층에서 일하는 <씨네21> 기자들이 나만 보면 이 영화 이야기를 해댔다. “앗, 이웃집 소년이다. ‘일라이’라고 테넌바움 가족의 옆집에 사는 친군데, 꼭 이 기자 같아. 끊임없이 이웃집을 배회하는….” 하필 주연도 아니고 조연인데다 마약중독의 말썽꾸러기라니 은근히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도대체 뭘 보고 저러는 건지 (영화를 보지 않아) 오리무중이라는 게 더 답답했다. 아무튼 <로열 테넌바움>은 평단의 극찬과 싸늘한 흥행 성적이라는 대조적 결과를 낳은 작품이다. 파산한 변호사 로열 테넌바움(진 해크먼)이 22년째 아내와 별거한 채 살아가다가 “위암 때문에 6주간의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고 거짓말하며 자신을 싫어하는 가족 품으로 돌아간 뒤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그런데 이 집안 아이들의 감수성과 머리회전이 보통 아니다.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입양아 맏딸 마고(기네스 팰트로), 부동산과 금융 등 사업수완의 귀재인 둘째 채스(벤 스틸러), 뛰어난 테니스 선수 리치(루크 윌슨)까지 모두 천재에 가깝다. 하지만 일찌감치 박제가 돼버린 이들 남매와 도무지 진지함이라고는 없어보이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풍비박산난 가족의 내부를 응시한다. 그러니까 따뜻한 가족주의에 회의를 품어보기에 알맞아 보이는 영화일 것 같다.
미개봉작으로 비디오로 만날 수 있는 최신작으로 <환상특급: 죽음의 환타지>(감독 메리 램버트·브라이언 스파이서, 에릭 로버츠·주드 넬슨·홀랜드 테일러 출연)를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록에 열광하다 디스코 지옥에 빠져버린 두 친구의 에피소드 등 록음악을 좋아하면 드라마를 뛰어넘는 재미를 쏠쏠히 느낄 수 있다고 귀띔해준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텔레비전 시리즈 <환상특급>의 로큰롤 버전이라니 더욱 흥미가 끌린다.
대중소설도 넉넉하게 즐겨봐야지
번역체 문투가 껄끄러워 국내 소설로 자꾸 좁혀온 습관도 이번 기회에 한번 바꿔봐야겠다. “프랑스 작가인 아멜리 노통의 <오후 네시>를 좋게 봐서 <사랑의 파괴>라는 근작을 주문해놨어. <오후 네시>는 짧은 글인데, 시골에서 조용히 고립감을 느끼며 살고 싶어하는 부부에게 오후 4시만 되면 옆집 사람이 침입하듯 찾아오는 이야기야. 그렇다고 그 손님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차만 마시고 가거든. 인간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교류를 피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단순한 상황을 철학적이면서도 쉽게 풀어가는 게 인상적이었어.”
이런 조언이 아니라도 아멜리 노통은 프랑스에서 성공한 벨기에 출신 작가로 이름이 높다. 비평가들로부터 천재의 탄생이란 찬사를 받으며 대중적으로도 크게 성공해 프랑스인들은 아멜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욕심을 내는 김에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작품까지 손대볼까 한다. 대중적 장르의 글쓰기를 하면서 장르의 관성을 슬그머니, 기가 막히게 뛰어넘는 재주로는 미국의 폴 오스터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스모크>와, 그의 유쾌하고도 서글픈 자전적 이야기 <빵 굽는 타자기>로만 접해봤을 뿐이어서 이참에 <거대한 괴물>과 <페허의 도시> 등을 목록에 올려놓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대중작가 덕분에 일본 소설에 푹 빠진 적이 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또 누구 없을까? 한·일 합작 영화로 만들어져 호평을 받은 <고>(GO)의 원작자 가네시로 가즈키를 권해온다. 원작 소설도 재미있지만 나오키 문학상을 받은 그의 데뷔작 <레벌루션 No.3>도 심상찮아 보인다. 3류 고등학교의 열등생 남학생들이 일본 주류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우성인자를 가진 일류 학교 여학생들과 유전적 결합을 시도한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다. <고>는 일본 청춘남녀의 방황 속에 남북한 분단문제, 재일동포의 정체성 문제까지 고루 다루는데, <레벌루션 No.3>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주인공의 집안은 아버지가 애인의 목욕탕에서 비누를 밟고 뇌진탕으로 식물인간이 된 뒤로 파탄이 났고, 한 친구는 조선인임을 야유하는 일본인을 죽이려다 전날 산 컴퓨터가 아깝다는 생각에 사고치는 걸 가까스로 피해간다는 식이다.
일본 하면, 만화를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망가 제국’이다. 얼마 전 완간된 <몬스터>의 우라사와 나오키의 신작 <20세기 소년>이 어느덧 9권까지 나왔다. 과거·현재·미래를 종횡무진 오가며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의 세기말적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샐러리맨을 주인공으로 다룬 성인만화 <시마과장>의 히로카네 케이시에게서도 찾아볼 만한 작품들이 많다. <황혼 유성군> <인간교착점> <라스트 뉴스> 등. <시마과장>에서 마초적 시각으로 여성의 나신을 등장시킨 그가 <황혼 유성군>에서 오래전에 청춘을 떠나보낸 이들의 사랑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궁금해진다. 입사 이후 30년간 일에만 매달려온 중년의 은행원이 퇴출대상에 오른 사실을 알고 훌쩍 스위스로 떠났다가 매력적인 또 다른 중년 여성을 만나 뜨거운 열정을 느끼는 에피소드 등을 담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작품으로 ‘낙인’찍힌 <침묵의 함대>의 카와구치 카이지의 신작이자 정치물인 <메두사>도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4권이 나왔는데, 앞의 3권에서 68년 일본의 학생운동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한다.
“이성애자에게도 눈길만 보내면 영락없이 넘어오게 하는 ‘마성의 게이’ 제빵사와, 유일하게 그의 마성을 피해간 동창생이 운영하는 과자점 이야기인데, 엉뚱해보이면서도 일상의 잔잔함이 흐르는 느낌이 아주 좋아.” 나오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양골동 양과자점>(요시나가 후미)도 적극 추천을 받았다.
소주보다 독한 <청춘의 사신>
목록을 작성해보니 국내 작품은 없고 대부분 재미 위주인 것 같다. 읽다가 보다가 지치면 우리의 술, 소주로 허기를 달래야지, 하다가 문득 책 한권이 떠오른다. “<한겨레21>이 놓치고 지나갔는데, 읽어보니 아주 좋더라”는 말을 누군가 했던 <청춘의 사신>(창작가비평사 펴냄)이다. 간첩죄로 사형선고까지 받고 오랜 시간을 감옥에 갇혀 지낸 서승·서준식씨를 형으로 둔 서경식씨가 쓴 미술 에세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 등을 통해 고통스런 현대사의 자취를 깊은 성찰로 짚어가는 책이다. 어쩐지 소주가 주지 못할 ‘독한 느낌’을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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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녀의 연휴 보내기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방기황.
“비디오와 DVD로만 나왔는데, 요즘 우리 회사에서 컬트가 됐어. 이걸 안 보면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야. 엽기발랄하고 기상천외한 이야긴데 이 코드로 이야기하고 웃는 게 유행이지. 특히 우울할 때 보면 직효야.” 우울할 땐 엽기발랄한 게 직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