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녀의 연휴 보내기
야호! 연휴다. 어… 근데 생각해보니 예사로운 연휴가 아니다. 민족대명절이 끼어 있는 민족대연휴네. 같이 놀 만한 친구들은 다들 고향으로, 시집으로 흔적을 감추고, 놀러갈 만한 장소는 아이들 빽빽 울어대는 ‘다복한’ 가족들로 점거되며, 오랜만에 모인 식구들은 5년 전부터 변함없는 주제곡 “이제 결혼해야지”를 메들리로 불러댈 그 연휴다. 음 환상이군. 명절 때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많은 독신일수록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스케줄 관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명절이 끝난 뒤 잃은 것은 밤샘 채팅으로 상한 시력이요, 얻은 것은 한 체급 더 올라간 몸무게밖에 더 있겠는가.
스케줄 관리란 대단한 게 아니다. 소박하지만 시간 허비할 선택이 아니라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일단 피할 것. 연휴 첫날부터 영화나 한편 볼까 하고 극장가에 나갔다가는 짜증과 분노, 저주로 남은 시간을 보낼 공산이 크다. 대단한 예술영화가 아니고서야 좌석이 있을 리 만무고 가까스로 표를 구하더라도 연휴 뒤 정형외과를 들락거려야 할 지경의 외진 자리기 쉽다. 돈 버리고, 시간 버리고, 기분까지 버리고 싶지 않다면 비디오숍에 가서 평소 최신작 따라가기에 허덕이며 빌려보지 못했던 비디오들을 고르는 게 현명하다.
닮고 싶은 그들을 비디오로 만난다
명절이 괴로운 독신여성들이 동병상련을 느낄 만한 영화로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맨 처음 놓일 만하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크리스마스 가족파티. 그러니까 우리의 추석 같은 ‘민족대명절’에 서른넷의 독신녀 브리짓이 친인척으로부터 수난을 당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술끊기, 담배끊기, 살빼기, 직장에서 성공하기, 애인만들기,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브리짓. 스스로는 너무 한심하지만 옆에서 보면 새삼스러울 것 없는 독신여성인 브리짓 존스의 좌충우돌 시련기가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완벽한 남성 두명이 브리짓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싸움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멋진’ 남성이 전공분야만 넘어서면 얼마나 ‘후져’질 수 있는지 유쾌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뒤집어지게 웃고 싶다면 <악마같은 여자>도 의외의 발견. 이 영화는 왕자와 하녀라는 로맨스 영화의 흔해빠진 공식을 공주와 마당쇠의 구도로 바꾸어놓는다. 잘 나가는 정신과 의사에다 완벽한 외모의 주디스는 남자를 애완견 정도로 생각하는 여성. 그는 술집에서 자신에게 껄떡거리는 실버맨을 자신의 애완견으로 낙점찍는다. 멍청하지만 입 안의 혀처럼 굴릴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실버맨은 여자친구의 아침 준비하랴, 다리털 깎으랴 분주한 나날에 삼총사 친구들을 외면하게 되고, 친구를 빼앗긴 또 다른 두명의 멍청이들의 기상천외한 ‘친구찾기’ 대소동이 벌어진다.
<안토니아스 라인>이나 <바그다드 카페>는 ‘결혼이 뭐 대수랴’ 하는 생각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는 영화다. 현실 속 모계가족의 일대기를 유쾌하게 그리는 <안토니아스 라인>은 스스로 모든 걸 책임지는 만큼 풍요롭게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바그다드 카페>는 사랑보다 공고한 여성들의 우정을 따뜻하고 귀여운 시선으로 포착한 영화다.
만화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만화책을 쌓아놓고 방 안에서 뒹굴뒹굴하는 것도 연휴 때 빼놓을 수 없는 행사가 아닐 수 없다. 단 만화책에 빠져 자신이 먹고 있는 송편의 접시 수를 망각하는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정신없이 먹다 보면 문득 <미녀는 괴로워>(서울문화사·전 5권)의 칸나 이야기가 남같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원래 엄청난 뚱보에 추녀였던 칸나는 사랑하는 코스케의 연인이 되기 위해 점심도 굶어가며 돈을 모아 성형미인이 된다. 그러나 식당에서 화장실 옆에 앉는 등 움츠렸던 과거의 버릇을 떨치지 못해 벌이는 에피소드가 폭소를 자아낸다. 성형 비판도, 예찬도 아닌 이 만화에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칸나의 씩씩함은 때로 감동적이기조차 하다.
일본 교토의 전통과자점 세 딸들의 이야기를 그린 <후꾸야당의 딸들>(서울문화사·전 11권)은 가족애와 일본 특유의 대를 잇는 장인정신에 대해서 차분하게 그린 만화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전통과자점을 운영하는 세 딸, 순종적이고 책임감 있는 첫째와 천방지축 망나니 둘째, 그리고 아직 어린 막내가 펼치는 사랑과 결혼, 훈훈한 가족애를 보여주는 ‘딱’ 명절용 만화.
이 밖에 귀신 이야기 모음집인 <백귀야행>(시공사·전 9권)은 귀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면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디 아이>가 연상되지만 무섭다기보다 매우 로맨틱하고 인간적인 귀신들을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19권으로 다소 길지만 네컷 만화기 때문에 완파하겠다는 야심 없이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보노보노>(서울문화사)도 적극 권할 만하다. 귀여운 애니메이션에서 아옹다옹하기만 했던 포로리와 너부리의 존재론적 성찰(?)까지 느껴볼 수 있는 철학적 만화다.
만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하는 신선놀음은 그러나 어느 선에서 자제해야 한다. 분위기 파악 못하고 만화 삼매경에 빠져 있다가는 조용히 방에 들어와 하늘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로부터 소리 없는 테러를 당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평소 서너장 펼치다 덮고 마는 책 두세권을 독파하는 것도 스케줄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만화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읽히면서도 완파한 보람을 느낄 만한 소설은 흔치 않다. 드물게도 독일의 여성주의 사회학자 에바 헬러가 쓴 <복수한 다음에 인생을 즐기자>(열린 책들)가 그런 소설이다.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남자들의 영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지빌레는 어느 날 애인 미하엘로부터 일방적인 결별을 통고받는다. 미하엘은 돈 많은 여의사 아그네테를 만나며 가차없이 자신을 버린 것이다. 지빌레는 절묘한 시간차 공격과 변장을 통해 둘이 사는 집에 가정부로 들어가 치밀한 복수극을 벌인다. 실연으로 인한 여성의 좌절과 당당한 극복을 이만큼 유쾌하게 그린 소설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 같은 작가가 쓴 <다른 남자를 꿈꾸는 여자>(열린 책들)도 권할 만한다.
시련은 있어도 좌절하지 않을래
추석 연휴기간 브라운관을 통해 폭탄처럼 쏟아지는 단란한 대가족의 풍경에서 벗어나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는 독서는 어떨까.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문학사상사)이 비추는 가족의 풍경은 안온하지 않다. 작가는 예리한 시선으로 70년대 개발 드라이브에 편승해 땅투기로 졸부가 된 한 가족- 봉건적인 할머니와 돈에 목숨건 부모, 이들을 보기 좋게 배신하는 딸- 3세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중심으로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허위의식을 잘근잘근 찢어놓는다.
결혼한 동료들이 가족들과 씨름하느라 시간보낼 때 여유 있는 고지에서 미래를 도모하는 독서도 한권쯤은 필요하다. <유리천장 통과하기>(현암사)는 여성들이 직장생활에서 남성과의 경쟁을 가로막는 ‘유리천장’ 통과하는 법을 소개하는 책이다. 리더십 개발전문가 캐롤 갤러허가 <포춘> 선정 연간 총수익 8억달러 이상 받는 최고의급 여성 임원 100여명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으로 유리천장의 틈새를 찾아내고 통과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방기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