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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책/ 다시돌아보는 문단의 ‘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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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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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중견 문인들에 대한 비평적 접근 활발… 삶과 사유와 문학에 대한 재해석

최근 들어 작고 문인 및 중견 문인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 매우 다채로운 방식으로 또한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김수영의 시세계를 철학의 현미경으로 접근한 김상환의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민음사)을 비롯해, 황광수의 <소설과 진실-조정래의 문학세계>(해냄), 임철우를 포함한 후배 문인들이 소설가 한승원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한 <한승원의 삶과 문학>(문이당)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철학자 김상환의 <풍자와 해탈…>을 관류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시각은 ‘교량술로서의 사유’, 쉽게 말해 이질적인 사유의 충돌과정을 통해 의미있는 ‘소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유들, 서로 만나지 않던 사유들을 부르고 소식을 전하게 하는 것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장소가 소통하도록 다리를 건축하는 것이다. 사유는 교량술이다.” 저자는 김수영의 시에 대한 논의를 통해, 문학과 철학, 인식론과 존재론, 시와 시인, 현실과 이상을 적극적으로 박치기시키는 풍경을 연출한다.

김수영은 '다리'이다


저자의 교량술로서의 사유가 가장 인상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제1부에 해당하는 ‘시적 사유와 존재 사유’에서이다. 저자는 이 장에서의 논의를 통해 김수영의 시가 “한글 세대 이전과 이후, 도시와 농촌, 전근대와 근대, 주지주의와 감성주의, 전통과 현대, 나아가서 근대와 탈근대를 이어놓는 가교”로서의 의미를 가진다는 다소 상투적이지만 의외로 의미심장한 전언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저자의 전언에 따르면 김수영이야말로 “이질적인 사유의 충돌과정”을 체화(體化)시킨 시인이라는 것이다. 고로 김수영은 ‘다리’이다.

다리는 이질적인 것의 중계자이자 동시에 그것의 담지자다. 때문에 김수영의 삶과 시는 이 분열과 종연횡의 지속적인 항진과정으로 나타나며, 그것이 김수영 시의 존재론을 구성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론이다. 이 입론의 기본형은 저자에 의해 다음과 같이 발성된다. “해탈이 죽음의 기술이라면 풍자는 사랑의 기술이다. 김수영에게서 이 두 기술은 서로를 완료한다. 죽음은 사랑을 완료하고 사랑은 다시 죽음을 완료한다. 거꾸로 양자는 서로의 시발점이다. 죽음은 사랑에서, 사랑은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 둘은 나눌 수 없는 하나이다.” 이제 ‘다리’는 ‘꼬리를 문 뱀’의 형상으로 전환되는 셈이다.

한 가지 독자들에게 귀띔을 하자면, 이 책은 질긴 오징어를 씹어먹듯이 그렇게 게으르게 읽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2부의 ‘시인과 책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밤’이란 책과의 친밀성이 부재한 공간 속에서 시인이 견디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동시에 철학과의 친밀성이 부족한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겪을 법한 ‘고통의 시간’을 암시한다.

이에 반해, 황광수의 <소설과 진실>은 저자의 확고한 시각 때문인지 매우 용이하게 읽힌다. 이 책은 <조정래 문학전집>(해냄)의 발간에 즈음하여, 조정래의 문학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맥>을 기점으로 이전의 문학을 ‘전반기 문학’으로, 이후의 문학을 ‘후반기 문학’으로 규정하고 있는 시기구분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식적인 분기점이 ‘리얼리즘의 상상력’으로 봉합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에 견고한 일관성을 부여한다. “리얼리즘의 성긴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부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서 리얼리즘의 반성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 인식틀이다.”

조정래, 리얼리즘의 확대

저자는 조정래의 전반기 문학과 후반기 문학의 차이가 ‘직접체험의 선택과 배제’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주로 단편문학으로 구성된 전반기 문학은 작가를 둘러싼 신산스런 역사적 체험을 능동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배제하려는 ‘강박관념’이 작동되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상상력이 거침없이 펼쳐질 수 있는 문학적 공간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후반기에 이루어진 체험의 직접적인 수용은 억압되었던 기억을 해방시킴으로써 오히려 상상력이 자유로움을 얻어 자신의 체험을 우리 민족의 역사적 장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설 때, 조정래의 전반기 문학은 알레고리적 성격을 보여주며, 후반기 문학은 역사에 대한 총체적 조망을 가능케 하는 리얼리즘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결론적으로, 조정래 문학은 ‘사적 체험의 직접적 수용’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확대의 과정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의미는 조정래의 문학에 대한 비평적 탐구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때 조정래의 문학은 오늘날의 현실 문학지형에 비추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도달한 문학적 수준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20세기를 넘어설 수 없다”라는 다소 과장된 주장이나, “이제 우리는 민족, 민중, 역사, 계급, 이념, 혁명 등의 개념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도 과거를 탐색하고 인간적, 미학적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주장들이 거침없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한승원의 삶과 문학>은 표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한편에서는 작가 한승원의 문학적 위상을,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인간됨을 매우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체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독자들이 가장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아마도 제4장에 해당하는 ‘내가 만난 사람 한승원’일 것이다. 후배 및 동료 문인들의 눈에 비친 한승원의 내면풍경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들은 그의 문학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서늘한 세계상과 끈적한 한’의 발생론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료들의 눈에 비친 ‘인간’ 한승원

그런데 이 제4장에 실린 글들은 대체로 격의 없이 솔직하게 쓰여져서 그런지 읽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가령 비평가 김주연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그렇다. “토굴이라 한 것은 한형 때문에 이를 존중하는 표현일 뿐, 그의 집은 신선놀음 하듯, 바다를 내려다보며 대밭을 뒤로 한 산기슭에 위치한 근사한 별장이었다. 비단 한형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른바 시골에 내려가 ‘우거’한다는 작가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한승원에게는 시간이 있는가’라는 작가의 체험적 고백이었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숙명을 믿지 않는다”라는 작가의 삶에 대한 신념은, 유년 시절 위대한 작가가 될 손금이 아니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수년간 자신의 손금을 날카로운 칼로 후벼파던 바닷가 소년 한승원의 치기에 가까운 안타까운 열정을 독자에게 여과없이 보여준다.

“운명을 믿는 자는 자기의 손바닥에 새겨진 손금을 자기 뜻한 바대로 교정하면서 산다. 그것은 운명에 대한 거부이고 도전이다.” 숙명과 한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 속에 형상화해온 작가의 이러한 뜻하지 않은 고백을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인 독서의 체험을 독자들에게 선사할 듯하다.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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