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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시공을 초월한 ‘성적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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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9-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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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의 ‘섹슈얼리티전’… 여섯 연출가의 발랄한 상상력 돋보여

<로빈슨 크루소의 성생활>(연출 이해제, 9월15일까지 서울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02-762-0810)이 착안한 출발점은 상상이긴 해도 꽤 현실적이다. ‘28년 동안 무인도에서 산 한 건장한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성욕을 채웠을까’라는 궁금증이다. 이건 대니얼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담에 열중한 나머지 크루소의 ‘인간적 고뇌’ 한 가지를 외면해온 우리의 뒤통수를 치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 연극, 발칙하다. 개, 염소, 원숭이, 살쾡이를 의인화한 캐릭터들이 개그 같은 몸짓과 말투로 웃음을 유발하나 이들을 통해 성욕을 해소하려 달려드는 크루소의 진지한 격정은 객석을 긴장하게 만든다. 수간(獸姦)과 시간(屍姦)이 코앞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순간, 어찌 당혹스럽지 않을까. 웃음과 도발이 뒤얽힌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객석은 아주 조금씩 크루소의 내면으로 안내된다. 성욕을 넘어 치명적인 외로움에 몸무림치는 한 인간의 고통은 극단적으로 다뤄졌을지언정 보편성을 얻을 만한 소재다. 비록 따스한 인간의 숨결을 통한 방식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순간의 욕망을 채워가는 크루소가 더욱 심한 허기를 느껴가는 모습도 설득력을 갖는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을 패러디한 험프리 리처드슨의 소설을 각색해 만들었다.

무인도의 크루소는 어떻게 성욕을…

<로빈슨 크루소의 성생활>은 제도화된 성과 날것의 성, 고전적인 성과 현대적인 성이 충돌하는 순간을 탐색하는 ‘섹슈얼리티전’의 첫 번째 공연물이다. ‘혜화동 1번지’의 3기 동인으로 활동하는 이해제·박장렬·송형종·김낙형·양정웅·오유경씨 등 여섯명의 연출가가 성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각기 다른 작품을 잇따라 내놓는 것. 지난해 봄에 시작된 기획으로 연극계에서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이렇게 집단적으로 탐색작업을 벌이는 건 처음이다.


접근로는 다양하다. <이브는 아담을 사랑했을까>(9월19∼29일, 김수미 작, 박장렬 연출)는 끊임없이 성형수술을 하면서 자신의 외모와 함께 남자를 바꿔가는 한 여성의 성적인 정체성을 그려간다. 성형수술에 집착하는 건 예뻐져야겠다는 희망이라기보다 과거의 나를 내던져버리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바꿔 쓴 가면을 통해 얻는 건 환멸뿐이다. 세 번째 무대에 오르는 <스트라이크 아웃 낫 아웃>(10월3∼13일, 최원종 작, 송형종 연출)은 동성애를 다룬다. 이제 동성애 소재의 예술 창작은 낯설지 않다. 이번에는 동성애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막상 세상에 드러내놓고 사랑하기에는 어려운 난처한 처지를 야구의 특정한 상황에 빗대어본다. 아웃이지만 아웃이 아닌 순간, ‘스트라이크 아웃 낫 아웃’이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다가오는 공포감과 혐오감, 그리고 황량한 존재감을 그 찰나에 대입해본다.

먼 과거로도 올라간다. <미실-신라의 파랑새 여인>(10월31일∼11월10일, 양정웅·이철우 작, 양정웅 연출)은 <화랑세기>에 전하는 이야기를 극화했다. 신라시대 화랑 사다함의 애인이면서 진흥왕 등 3대에 걸쳐 왕의 섹스 파트너였던 미실이 주인공이다. 그를 통해 시대에 따라 성을 대하는 시선의 차이를 드러낸다. 당시에는 자유로웠고 도덕적으로 문제되지 않던 성 관념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 기준에 의해 재단되는 모습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성생활> 못지않게 흥미로운 소재와 유쾌함으로 성에 대한 논의를 대담하게 펼치는 작품이 <오! 발칙한 앨리스>(11월14∼24일, 김나영 작, 오유경 연출)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패러디해 원작에 있는 줄거리와 캐릭터들이 그대로 나오지만 이는 모두 성적인 상징들이다. 코에 발가락을 넣는 것이 삽입 성교인 이상한 나라다. 하지만 어린 앨리스는 사람들이 왜 성교를 나누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알지 못해서 보고 느낀 대로 말하는 앨리스를 통해 성은 거침없이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대상으로 객관화된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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