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스터 영화의 전형 비켜선 <로드 투 퍼디션>의 새로운 미학
샘 멘더스는 요설을 부릴 줄 아는 감독이다. 안전한 척 웃고 있는 인물들을 진실의 낭떠러지로 몰아붙이기 위해, 그 허술한 견고함을 뜯어내기 위해 그는 차가운 냉소와 전략적인 과잉으로 영화를 완성한다. 그럼으로써, <아메리칸 뷰티>라는 제목은 아이러니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만든 두 번째 영화는 수다쟁이 톰 행크스(하긴, 이제 톰 행크스는 점점 더 수다쟁이 역할을 맡지 않는다. 또 그런 모습에 어울려져가기도 한다)를 침묵시키면서까지 나른한 감정의 층을 견지하고자 하는 갱스터 영화다. 원래 ‘나른한 감정’이라는 표현과 갱스터 영화는 서로 어울리는 앞뒤가 아니다.
갱스터의 시대에 동시적으로 생겨난 갱스터 영화들은 사회와의 그 부정할 수 없는 기원적 밀접성으로 인해 차가운 외양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샘 멘더스는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의 구도를 부각시키면서 정동의 탑을 쌓는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죽어가는 아버지, 또는 아들이 더 이상 범죄와 인연을 맺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구원행위로서의 복수극. 아버지의 신화는 그 죽음으로써 존속되고 부활한다는 비판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로드 투 퍼디션>(8월13일 개봉)은 공허하게 죽어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미국의 갱스터 시대를 쓸쓸하게 바라본다. 과연 <로드 투 퍼디션>은 갱스터 영화의 자력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으며, 또 얼마나 매혹되어 있는 걸까.
갱스터 시대를 쓸쓸히 바라본다
1930년대에 <리틀시저>(머빈 르로이, 1930), <공공의 적>(윌리엄 웰먼, 1931), <스카페이스>(하워드 혹스, 1932)와 같은 초기 원형적 갱스터 필름의 출현을 요구한 것은 미국 사회의 현실 자체였다. 1919년부터 시행된 금주법과, 1929년 들이닥친 공황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시민들은 법 바깥의 범죄자가 되어갔고, 그 범죄자들은 보이지 않는 미국 경제의 거대주주가 되어갔다(심지어 러시아계 미국인 마피아 마이어 랜스키는 하버드대 경제학자 윌리엄 타우시의 <이윤획득>이라는 책을 읽기까지 했다고 한다!). 법 바깥에서의 힘이 그 안을 지배했고, 그 안에서의 역경이 법을 위반하도록 부추겼다. 도시를 가로지르며 난사하는 기관총은 단지 영화 속의 아이콘이 아닌 현실의 경험들이었다. 그 때문에 갱스터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수가 실존 인물이다.
하워드 혹스는 <스카페이스>의 첫머리에, “이 영화는 정부에게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 말이 진심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영화의 주인공 알 카포네의 성공담에 치중하는 내러티브에의 할애는, 당대의 자기검열 과정으로 인한 필연적 엔딩과는 또 다른 효과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포스러운 현실 경험과 영화 속 인물에의 짜릿한 동일시가 갱스터 영화에서는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갱스터 영화에 관한 두 가지 관점을 시사한다. 한편으로 갱스터 영화는 공황에 빠진 자본경제에서 광기로 써내려가는 프롤레타리아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수기로 비쳤고, 또 한편으로는 그 숙명론적 패배로 점철된 법 바깥의 영웅들에 관한 신화화였다.
1930년대가 지나고 갱스터 영화는 필름 누아르의 음울함으로 수혈된다. 그리고 이후에 등장하는 갱스터 영화들을 통해 그 시대는 다양한 기억으로 소환된다. 모든 장르가 그렇듯이, 갱스터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영화를 갱스터 영화 ‘장르’라고 부를 수 있는 명백한 단정은 이제 흐려졌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통해 비교적 충실히 그 시대적 감성을 재현해낸 것에 비해, 랜스키의 동료이자 라스베이거스의 창시자인 <벅시>는 워런 비티에 의해 낭만적인 로맨티스트로 탈바꿈되었고, 리메이크 버전 <스카페이스>를 만든 브라이언 드 팔머는 알 파치노를 난민으로 바꿔 당대의 미국사회의 문제에 끼워넣었다.
사회의 문제 대신 혈연의 문제 거론
웨스턴의 전통에서 일본 사무라이 영화로, 그리고 다시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이행하는 그 상호적 궤적을 이어받아, 갱스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다시 영화화한 <라스트 맨 스탠딩>은 작품의 성공 여부를 떠나 가장 침울하고, 가장 눅눅한 변종에 속한다. 오히려 현대 갱스터 영화의 마스터피스쯤으로 여겨지는 <대부> 시리즈는 범죄 세계의 저열함을 숭고한 서사극으로 이뤄냈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갱스터 영화에 속할 것이다. 1930년대 갱스터 영화와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은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다. 질주하는 폭력과 자본에의 욕망, 아이콘화되는 도시, 그 도시의 골목이 만드는 계급, 우정과 애증의 간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국에는 만져보고야 마는 파멸.
갱스터 영화의 주인공들은 높이 올라간 만큼 빨리 추락한다. 이건 영화가 어떻게 변하든 거의 모든 갱스터들이 지키는 약속이다. <로드 투 퍼디션>은 추락의 약속을 이행한다. 그런데 너무 빨리 이행한다. 계급과 자본의 긴장관계가 사라진 자리에 부자의 정이 들어선다. 갱스터 영화가 갖는 숙명론적인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패배의 원인을 다른 곳에 둔다. 이 영화가 다른 점은 너무 높이 올랐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면서 부자는 성공에 닿아보지도 못하고 쫓기기 시작한다. 오히려 돈은 쫓기는 동안의 복수극을 위한 준비물로 기능한다. <로드 투 퍼디션>은 사회와의 문제 대신 혈연의 문제를 거론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미국사회와 연관시켜 보기 위해서는 혈연이라는 문제를 우회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이 영화가 스스로 갱스터임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등장하는 기관총의 아이콘은 이제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다. 또한 <로드 투 퍼디션>은 도시와 갱스터가 갖는 치환적인 고리를 끊어놓는다. 모든 갱스터들의 무대가 되는 ‘도시’는,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의 시카고는 두 도망자에게 신비하게 펼쳐진 대저택처럼 보일 뿐, 그곳에서 어떤 이익도 얻을 만한 소지라곤 없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눈여겨볼 만한 캐릭터는 부자를 뒤쫓는 맥과이어(주드 로)다. 갱스터 영화에는 형제 또는 친구 사이에, 혈연과 우정에도 불구하고 충돌이 일어난다는 설정이 자주 등장하는데, <로드 투 퍼디션>은 이 점을 한쪽으로는 양아버지의 친아들 코너와의 관계에 놓고, 또 한쪽으로는 쫓는 자 맥과이어를 부가하면서 새로운 설정으로 제시한다.
‘시대 재현’에 매혹… 아름다운 죽음
이런 것을 묶어놓고 보면, <로드 투 퍼디션>이 특별히 갱스터 영화 장르의 어떤 전통을 부활시키는 것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갱스터가 지시하는 미국의 그 ‘시대 재현’에 매혹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 영화는 그 비열한 거리에서 총을 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정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폭력의 리얼함이기보다는 빛과 색의 주조된 장면으로 감정을 끌어낸다. 아마도 그동안 보아온 갱스터 영화의 총격 장면 중 가장 회화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이 영화에서 볼 것이다.
정사헌 l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