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댁, 필리핀댁…
등록 : 2002-09-11 00:00 수정 :
농촌의 중국댁, 필리핀댁들….
가을걷이때면 보배네 콤바인 조수로 따라다니던 성규총각이 재혼해서 잘 산단다. 고향에서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것이 바람이던 성규총각은 힘들고 고되다던 콤바인 조수일도 마다하지 않더니 자기 땅의 규모도 늘려가고 큰 기계도 제법 끌고 다닐 만하니 어느덧 30을 훌쩍 넘겨버렸다. 백방으로 찾아봐도 촌으로 시집올 여자는 없고 애가 단 부모님과 가족 성화에 조선족 여성과 결혼을 하고 몇달 잘사는 가 싶더니, 부인이 가출을 해버려 심한 상처를 입고 고향을 떠났다. 명절 때나 살짝 왔다갈 뿐 고향은 그리움과 더불어 그에게 깊은 생채기를 남겨놓았다. 그러더니 인천 어디쯤에서 우리나라 여자 만나서 잘 산단다. 그래도 아직 농촌에서 살고픈 꿈을 접지 못하고 부인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는데 쉽지 않다며 힘없이 웃는 성규씨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농촌 노총각은 이제 사회 이슈도 되지 못하는 사이에 촌동네가 국제화를 맞아 요동친다. 영광에만 해도 86명이나 되는 외국인 여성 가운데 주부가 58명이고, 전남지역의 경우 1600여명의 농촌 외국주부가 살고 있다. 전남이 농도임을 감안하면 농촌 노총각과 동남아시아 여성의 국제결혼 증가의 결과로 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예전엔 화교여성이나 특정종교에 의존하던 것이 이제는 중국·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의 여성들까지 한국 농촌 총각들과의 결혼을 위해 날아온다.
그러나 언어소통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파경을 맞는 부부가 전남만 해도 10%를 넘어서고 가정폭력·성폭력 등의 문제로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래서 각 자치단체에서 나름대로 프로그램을 펼치기는 하지만 이 여성들이 실제적으로 부딪치는 고민을 풀어내지 못한다.
최근 전남 각처에서 살고 있는 농촌 외국여성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 여성들은 가족들에게서조차 이방인 취급받는 것을 가장 서러워했고, 가부장적인 가족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 여성들이 농촌의 가정에 적응하기란 무척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본국에서 듣기와는 다른 살림형편과 과도한 농업노동, 혈연으로 맺은 인간관계에 섞여들기 또한 난제다.
이제 농촌 사회는 외국 여성들과 함께 동거할 채비를 차려야 한다. 농촌총각의 결혼율이 도시 남성 95∼97%보다 10%나 낮고 장가 못 간 노총각이 7만명에서 10만명을 헤아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농촌 총각과 외국 여성의 국제결혼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도 책임지지 않고 우리나라 여성 누구도 마다하는 농촌에 시집오는 외국 여성들을 무시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 의문이다.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2층 행사장까지 올라오는 인도네시아 여성에게 “지금 계단 올라다니면 나중에 무릎이 아파서 안 돼요. 꼭 엘리베이터를 타세요”라는 우리의 안내에 고향에 있는 친정엄마를 떠올렸을까? 서툰 말로 “고맙습니다”라며 하얀 이를 드러낸다. 그날 모인 외국 여성들은 농촌 동네 어귀에서 고추를 매만지는 우리네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