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민중가수 ‘스타탄생’?

426
등록 : 2002-09-11 00:00 수정 :

크게 작게

신세대 가수들의 리메이크 민중가요 논란… 세련된 선율에 젊은층 열광해도 의미는 퇴색

사진/ 민중가요가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10대에게 다가서고 있다. <사계의 댄스그룹 거북이(왼쪽)와 <솔아…>의 힙합 가수 엠씨 스나이퍼.
20대 젊은이들로 스테이지에 발디딜 틈 없는 강남의 한 나이트 클럽. 민소매 셔츠와 탱크톱 차림의 젊은 남녀들이 귀를 쨍쨍 울리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든다.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음악은 이제 ‘물 좋은’ 나이트 클럽에서는 ‘입장사절’인 30, 40대에게 익숙한 노래다.

“흰구름, 솜구름 탐스러운 애기구름 짧은 샤쓰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 도네 돌아가네/ (랩)너도나도 짧은 옷차림의 시원한 여름 해변가의 연인들은(나 잡아 봐라∼)/ 이 뜨거운 태양 아래 지붕 하나 가려진 땡볕 아래 나는 힘겨운 나는/ 출렁이는 바다와 노니는 그대들과는 다른 삶의 나는 오늘도 돌아가는/ 미싱기에 의지하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바람불어도 도는 나의 미싱…”

나이트 클럽 최고 인기곡 <사계>


사진/ 민중가요는 시대적 소명을 담은 메시지로 대학가와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됐다.
최근 나이트 클럽 최고의 인기곡인 3인조 댄스그룹 거북이의 리메이크곡 <사계>의 일부로 앞부분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 80년대부터 부른 원곡이다. 지난 봄 발표된 거북이의 데뷔음반에 수록된 <사계>는 지난 달부터 공중파 방송 순위 프로그램에서 10위권에 진입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음악이 독특하고 너무 신나요. 여자와 남자가 같이 하는 랩도 멋있고요.” 방송무대에서 거북이 공연을 보고 반했다는 서채영(16)양의 말처럼 거북이의 홈페이지에 올라가는 팬들의 반응은 대체로 ‘신난다’, ‘랩이 너무나 흥겹다’는 의견들이다. <사계> 원곡이나 ‘민중가요’에 대한 질문들도 자주 등장한다. “클래식(원곡 샘플링-편집자주) 부분 있자나여, 넘 좋아서, 원곡을 듣고 싶은데 원곡 제목도 <사계>인가요?”, “<사계>를 부른 이유가 옛날에 일하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불렀다던데 맞나여?”, “‘미싱은 도라가네’라고 하는 부분 뜻이 모죠? 미싱이 몬가요?” 서태지나 H.O.T보다 노찾사가 친근한 30대 이상의 <사계> 팬들이라면 실소가 나올 법한 질문들이다.

‘민중가요’라는 말조차 생소한 10대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민중가요’는 또 있다. 힙합 가수 엠씨 스나이퍼가 리메이크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도 클럽과 밀리오레 등 신세대들이 자주 찾는 공연무대에서 자주 연주되는 인기곡이다. 홍대 앞 마스터플랜, 소울 트레인 등 클럽에서 5년 동안 활동해온 엠씨 스나이퍼가 지난해 만든 이 노래는 인터넷의 mp3를 통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창살 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라는 원곡의 마지막 부분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원곡의 멜로디가 깔리며 새롭게 만든 래핑으로 진행되는 곡이다. 댄스 장르인 <사계> 리메이크와 달리 <솔아…>는 분위기가 다소 무겁고 노랫말은 전태일의 70년대를 연상시킨다.

“아름다운 서울 청계천 어느 공장 허리 하나 제대로 펴기 힘든 먼지로 찬 닭장/ 같은 곳에서 바쁘게 일하며 사는 아이들 재봉틀에 손가락을 찔려 울고 있는 아이는 배우지 못하고 배고품을 참으며 졸린 눈 비벼 밖이 보이지 않는 숨막히는 공장에 갇혀/ 이틀 밤을 꼬박 새워 밤새 일하면 가슴에 쌓인 먼지로 인해 목에서 검은 피가 올라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타이틀곡으로 올라간 음반 는 힙합 음반으로는 대박이라고 할 만한 7만장의 판매기록을 올렸다.

대중성 확보인가, 의미의 퇴색인가

사진/ 민중가요 대중화를 선도한 꽃다지는 올해로 결성 10주년을 맞았다. 집회 현장에서 공연하는 꽃다지. (이정용 기자)
80년대 뜨거운 ‘현장’의 노래들이 화려한 조명 아래서 백댄서들과 함께 연주하는 댄스곡으로 변한 모습에 곱지 않은 눈길도 적지 않다. 텔레비전에서 거북이의 공연을 봤다는 직장인 조아무개씨(34)씨는 “지난 시절 뜨거운 연대의 기억이 통속화되는 것 같다”, “그런 노래가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젊은 친구들이 단지 흥겹게 춤추며 즐기는 노래로 생각하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씁쓸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리메이크 <사계>가 뜨기 시작한 지난 7월 거북이의 홈페이지에는 때 아닌 민중가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운동가요의 대명사인 <사계>가 나이트 클럽에서 취객들의 흥을 돋우는 노래로 변질돼버린 건 정말 저로서는 참을 수 없습니다… 당신들 노래 들을 때마다 답답하고 참담해요…(심수길)”, “대중성의 외피를 둘러쓴 민중가요 <사계>는 대중가요 <사계>가 되어 우리 귀에 울려퍼진다. 내용성과 역사성이 배제된 채 흥겨운 가락으로만 다가올 뿐이다(개천마리) ”.

신세대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오로지 가사 때문에 민중의 노래인 노찾사의 <사계>를 변질시켰다고 너무 몰아세우는 걸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청소년들은 이 노래를 듣고 노찾사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계>가 민중가요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거북이가 리메이크해서 부른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단순하게 좋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팝송은 다들 알면서 민중가요는 잘 모른다는 것이 좀 씁쓸했습니다.(시기)” 거북이와 엠씨 스나이퍼의 팬사이트에는 팬들에 의해 원곡이 업로드돼 있고, 민중가요와 민중운동에 대한 장문의 ‘친절한’ 해설이 올라 있기도 하다.

그러나 두 리메이크곡의 인기를 가지고 ‘민중가요의 부활’, ‘신세대 민중가수 등장’을 떠드는 것은 호사가들의 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창작자와 팬, 그리고 평자들의 반응이다. <사계>를 리메이크한 거북이의 래퍼 이성훈(터틀맨, 27)씨는 홈페이지에 올라간 나이든 팬들의 질책에 “<사계>가 민중가요라서 리메이크한 것은 아니고 거북이가 연주하는 노래 역시 민중가요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그는 “고등학교 때 <사계>를 듣고 소풍 가면 친구들과 함께 부를 정도로 좋아했지만,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노래가 그냥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으로 리메이크를 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런 말이 그 시대를 산 분들에게는 언짢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이라고 전제하면서 “민중가요도 가요 가운데 하나인데 민중이라는 두 글자 때문에 폐쇄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사실 대중들에게 잊힌 민중가요의 변형이 대중적 전파매체를 타기 시작한 것은 광고에서부터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직후 삼성에서는 기업 이미지 광고에서 김민기의 <상록수>를 썼고, 같은 음악인이 작곡한 <천리길>은 지난해 유공 엔크린의 기업 이미지 광고에 쓰였다. 이 밖에 월드컵 때 현대해상화재는 <그날이 오면>을 원곡과 아이들의 합창, 연주곡 버전으로 이용했고, 생활정보지 벼룩시장은 <광야에서>를 배경음악으로 깔았다. 이 음악들이 사용된 데는 무엇보다 30대 이상 소비자층의 향수를 자극한다는 포석이 깔려 있다. 현대해상화재 광고를 만든 금강기획의 송진아씨는 “민중가요라는 메시지보다는 노랫말에 있는 기대감에 초점을 맞춰 사용하게 됐다. 처음에는 광고주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칠까 싶어 우려하기도 했지만 민중가요의 광고음악 사용이 처음은 아니라 부담이 크지는 않았고, 원작자인 노찾사 역시 단순한 상업적 이용이 아니라 월드컵이라는 소재에 이용된다는 데 흔쾌히 허락했다”고 말했다. 벼룩시장 광고를 만든 실버 블랫의 유도균 부장은 “처음 선택할 때 고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민중가요 멜로디가 최근엔 하나의 트렌드로 바뀌어서 광고효과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밝혔다.

광고에서 바람 불어… 상업적 ‘리모델링’

사진/ 최근 민중가요가 광고 음악에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민중가요가 30대 이상 소비층의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최근 일고 있는 민중가요 논란을 가장 어이없어하는 편은 여전히 현장에서 노래하고 있는 민중가수들이다. 오는 9월14일 결성 10주년 공연을 준비하는 꽃다지 멤버 민정연씨는 “민중가요는 창작자와 유통, 수용자 세편이 어떻게 주체적으로 소통하는가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최근 방송을 통해 나오는 가요 리메이크나 광고음악을 들으면 솔직히 가슴이 철렁해진다”고 고백했다. 그는 곡의 리메이크를 허락한 작곡자들이 “이미 80년대를 떠난 삶을 사는 게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리메이크곡들이 아무리 원곡의 내용에 충실했더라도 그 노래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추억과 앞으로의 싸움에 가져가야 할 것에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덧붙였다. 80년대 ‘노동자노래단’을 이끌며 활발한 작곡활동을 벌였고, 지금은 운동가요 사이트인 ‘노동의 소리’(www.nodong.com)를 운영하는 김호철씨 역시 “작곡자가 자신의 노래의 상업적·자본적 쓰임을 허락했으면 대중들이 그 노래를 민중가요로 과거 불러왔을지언정 민중가요의 뜻은 이미 없어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작곡자는 노찾사에서 활동한 가수 안치환씨다. 그는 자신의 곡을 리메이크한 “엠씨 스나이퍼의 진지한 태도나 노력이 기특해보였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민중가요 부활 운운하는 것은 어이없다는 생각이다. “운동가요는 그 노래가 나온 시대적 상황이나 진보운동과 나눠 생각할 수 없는데 지금 젊은이들이 지나간 노래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최근의 민중가요 리메이크 인기는 하나의 논란 이전에 현상이다. 노래가 좋아 리메이크했고, 노래가 좋아 즐긴다는 신세대를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민중가요 작곡가 윤민석씨의 바람은 신세대 가수들이나 팬들도 한번 귀기울여 볼 만하다. “젊은 가수들이 잊힌 노래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것은 고맙기도 하다. 그렇지만 방송에서뿐 아니라 지금 파업이 벌어지는 병원이나 공장에 가서 이 노래를 연주할 수는 없을까? 당시 부모나 삼촌이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지금도 힘든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