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의 신화로 기억될 이주일의 유훈… 정녕 코미디언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나
코미디언의 비애를 몸으로 체험할수 있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첫 번째는 코미디언 서영춘의 장례식장에서 코미디언 송해가 고인의 생전 업적을 기리는 추도사를 낭독할 때의 얘기다. “고인은 한국 코미디의 발전을 선도하며 뚜렷한 족적을 남기셨고, 대표적인 유행어로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고뿌가 없으면 못 마셔요! 가갈갈갈, 요건 몰랐지!’ 등을 남기셨습니다. 흑흑흑…”
일동은 순간 폭소와 오열의 중간쯤 되는 감정의 복받침을 경험해야만 했다. 두 번째 얘기는 조금 슬프다. 대부분의 코미디언은 늘 기묘하게 웃는 얼굴, 아니면 웃기기 위해서 이상한 포즈를 취한 사진만 찍기 때문에, 정작 죽고 나면 영정으로 쓸 마땅한 사진을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코미디언은 죽어서도 누군가를 웃겨야만 한다. 그런데 고인이 된 이주일은 웃기면서 죽음을 맞이하진 않았다. 웃기기는커녕 엄청난 수의 흡연자를 포함한 국민에게 평생 다짐한 대로 ‘뭔가 보여주고’ 떠났다. 영정 속의 그의 웃음에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한국에서 코미디언으로 산다는 것은
‘한국에서 코미디언으로 산다는 것’의 완벽한 기승전결을 담고 있는 그의 인생은 그래서 그의 후배들에게 도전이 불가능한 전범(典範)이 되었다. 도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후배들의 실력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진실이든, 가설이든, 그가 헤쳐온 시대보다 우리 시대는 덜 고통스럽다고 믿기 때문이다. 코미디는 시대의 거울이다. 인간 정주일에겐 그의 시대가 고통이었지만, 코미디언 이주일에게는 다시 오기 힘든 행운의 시대였다. 이 패러독스를 설명하자면, 그의 코미디를 말할 때 늘 따라붙는 단어인 ‘저질’이라는 두 글자가 필요하다.
짐작과는 달리 저질사회에서 오히려 고품격 코미디가 탄생한다. 저질사회란 솔직하지 못한 사회다. 소수의 탐욕과 전횡에 의해 다수가 탄압받는 사회다. 고품격 코미디란 그런 저질사회에서 탄압받는 다수의 비애를 어느 어릿광대가 솔직하게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다수를 억누르는 소수의 횡포를 다수에게 직설화법으로 소구하면, 그건 혁명가의 정치선언이 된다. 소수는 모르게, 다수만이 알아듣게 완곡한 은유로 표현하는 것이 코미디다. 그걸 얼마나 고도의 은유로 하느냐, 얼마나 소수는 모르게 다수만 알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품격의 정도가 달라진다.
이주일이 그야말로 2주일 만에 떠서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다가, 6개월 만에 신군부에게 ‘숙청’된 즈음이 현대사의 가장 대표적인 코미디적 저질상황이었다. 신군부는 그 즈음을 ‘정의사회’라고 했지만, 민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주일은 말 한마디 못하고 탄압당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말 없는 코미디를 온몸으로 실연해보였다. 위정자와 외모가 비슷해 TV에 나올 수 없다니 세계사에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는가. 그것도 하필이면 늘 스스로 못생겨서 죄송하다던 그 외모가 말이다.
코미디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2인 구조다. 멍청하게 웃기는 녀석과, 그리 웃기진 않지만 대신 그 멍청한 녀석을 꾸짖는 역할의 조연자로 구성되는 2인조가 원형적 코미디 구조다. 일본에는 ‘만담’(漫談)이라는 전통적 코미디가 있다. 두 사람에게 필요한 소품은 스탠드마이크와 종이부채다. 종이부채는, 한 사람이 멍청한 얘기를 했을 때, 그의 머리를 때리는 회초리 역할을 한다. 웃기는 사람은 쉴새없이 떠들고, 옆사람은 “정말이냐! 멍청한 녀석! 그것도 말이라고 하느냐!” 하는 추임새를 넣으며 그를 때려준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농담에 관한 한 이보다 완벽한 역할 분담은 없다. 이주일은 이 2인 구조 코미디의 가장 대표적인 수혜자다. 누구나 이주일의 대표작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오리궁둥이 걸음’이 바로 이주일·이상해의 2인 무언극에서 탄생했다. 익살맞은 수지큐 음악과, 뭐든 못하겠다고 빼는 이주일, 결국 뭐 한번 하다가는 바로 이상해에게 얻어맞는 이주일의 놀란 표정을 기억하는지.
권력에 당하고 시청률에 치이고
TV 속에서 늘 뒤통수를 얻어맞던 이주일은, 그러나 TV 밖에서는 자주 우리들의 뒤통수를 쳤다. 80년대 초반, 우리나라 축구대표 선수들이 외국의 잔디구장에 적응을 못해 성적이 시원찮다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적에 쾌히 돈 1억원(역시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액수였다!)을 잔디구장 건립기금으로 내놓은 일이 그랬다. 극장식당 ‘초원의 집’의 ‘쥔’(당시 그의 명함에 적힌 직함이다)으로 있던 시절, 연예인 납세실적 4년 연속 1위를 차지한 것이나, 난데없이 정치에 입문해 사정없이 그만둔 일까지, 모두가 우리들의 뒤통수를 친 사건이었다.
사실 TV 밖에서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기에 가장 좋은 직종은 바로 코미디언들이다. TV 무대 속에서는 익살을 보여주지만, 그 익살은 생활의 슬픔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 과실이기 때문이다. 그건 이주일을 포함해서 그 전후의 모든 코미디언들에게 해당하는 문제다. 피에로 분장에서 눈가의 눈물 자국이 빠지지 않듯이 내가 아는 한 TV 밖의 코미디언들은 늘 슬프고 대부분 진지하다. 코미디언이란 마치 자판기처럼 동전만 몇개 넣으면 언제든 같은 당도, 같은 온도의 웃음이 한컵 담겨져 나오는 줄 아는 수많은 시청자들은, TV 밖에서 그들을 만날 때도 그들의 우울한 얼굴을 오해하기 일쑤다. 코미디언들이 종종 “뜨더니 건방져졌다”는 소문에 휩싸이는 이유다. 현실 속 슬픔의 농도와 밀도가 높을수록 그의 코미디도 고품격이 된다는 이 가시나무새 같은 원죄를 그들도, 시청자도, 방송사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주병진이나, 신동엽처럼 삶에 커다란 굴곡을 겪은 코미디언들은 오히려 사후 방송 가치가 높아지는 전화위복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둘은 아주 특별한 극소수에 속한다. 대다수의 ‘못 나가는’ 코미디언들은 이주일의 시절과는 또 다른 슬픔에 직면해 있다.
이주일을 살찌운(?) 슬픔이 신군부의 탄압이나 가난, 외모, 아들의 죽음 같은 드라마틱한 개인사였다면, 지금 현재 한국의 정통 코미디언들을 옥죄는 슬픔들은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문제들이다. 말하자면 시청률 같은 것이다. 개인기를 앞세운 흉내쟁이 가수들이나, 운동선수, 탤런트, 심지어 작곡가 출신의 점령군들에게 매정하게 출연 기회를 빼앗긴 채, 호구지책을 위해 TV 밖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그들에게 지금 가장 큰 슬픔은 단 한 가지다. 평생을 해왔고, 할 줄 아는 유일한 것이며, 그리고 가장 잘한다고 믿는 코미디 연기를 보여줄 TV 프로그램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 옛날 신군부의 저질시비보다 무서운 위력이 있는, 어린 시청자들의 “유치해, 시시해!”라는 평가는 시청률이라는 무소불위의 무기가 되어 그들의 삶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저질시비보다 무서운 “유치해 시시해”
자신의 주무기인 콩트 코미디를 선보일 무대가 없어, 최근 드라마 조연으로 삶의 방향을 바꾼 데뷔 경력 12년차의 어느 코미디언은 얼마 전 연출자에게, “코미디 그만하고 이제 연기자로 업그레이드해야지”라는 말을 듣고 무척 불쾌했다고 한다. 코미디를 ‘다운’으로 정극연기를 ‘업’으로 상정한 그 드라마 연출자의 세계관이, 이주일의 영결식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옛날 코미디언들, 많은 네티즌들의 표현대로 ‘그리웠던 얼굴’들이 가슴에 담고 있는 가장 큰 슬픔인 것이다(TV 코미디언에게 “오랜만에 뵈니 정말 반갑네요!” 같은 인사말이 사실은 얼마나 가시가 되는지, 사인받는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변변한 유언도 없이 떠난 고인이, 후배 최병서에게 임종 전에 간곡히 부탁한 것도 ‘중장년층을 위한 TV 코미디의 부활’이었다고 한다. 어느 방송사에선 구체적으로 이번 가을개편에 고인의 뜻을 반영하는 작업에 이미 착수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장례식 마지막날 새벽, 영결식장에서 며칠 밤을 새워 땀과 눈물로 쩐 ‘뽀식이’ 이용식이 소감을 묻는 TV 카메라를 향해 던진 지친 한마디가, 코미디언으로 산다는 것의 모든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러고 가서 또 녹화해야 돼. 또 가서 웃겨야 돼. 그게 우리 인생이야. 형님도 평생 그러다 가셨어!”
김일중/ 방송작가


사진/ 이주일씨는 2주일 만에 떠서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다가 6개월 만에 신군부에게 숙청돼 한국사회의 코미디적 저질 상황을 역설했다. (KBS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