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이 엿보는 ‘섹스 앤 시티’
이 드라마는 제목부터가 ‘성’과 ‘도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가장 은밀한 ‘섹스’ 이야기. <섹스 앤 시티>는 도시 그것도 세계 최첨단인 뉴욕에 살고 있는 30대 독신 여성의 성에 얽힌 잡다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섹스 앤 시티>의 네명의 여성은 명쾌하고 직설적으로 섹스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몸소 체험한다. 그들에게 섹스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인생의 금언을 깨닫는 때도 섹스에 얽힌 하나의 경험이 막을 내린 순간이다. 섹스는 삶이고, 일상이고, 오락이며 철학이다. 칼럼니스트인 캐리와 캐리어 우먼인 그녀의 친구들이 벌이는 사랑과 섹스 행각은 어떤 금기와 내숭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털어놓고, 서로에게 자문을 구한다. <섹스 앤 시티>는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보지 못한, 아니 미국인들도 쉽게 보지 못한 여성들의 쾌활하고도 씁쓸한 섹스 이야기다. 아니 삶 그 자체.
욕망과 현실 사이의 충격적 진실
왜 하필이면 <섹스 앤 시티>의 주인공들은 잘 나가는 20대가 아니라 30대일까? 30대는 이미 한바탕 사랑과 섹스의 평지풍파를 겪은 나이다. 캐리, 미란다, 샬롯, 사만다는 별다른 환상이 없다. 아니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이라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환상이 왜 없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남녀 누구나의 소원이다. 하지만 꿈을 꾸고, 늘 현실에 부딪히면서 그들은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온다. 가장 보수적인 샬롯조차 평범한 소원이 개구리 왕자를 만나는 일보다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30대는 친구들에게 섹스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하소연하고, 자신이 헤어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그들에게 성이란 환상이 아니다. 그건 일상이고, 낭만적이면서도 비굴한 현실이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낙원이다.
왜 하필이면 <섹스 앤 시티>의 여인들은 로스앤젤레스(LA)가 아니라 뉴욕에 살고 있을까? 캐리와 친구들은 LA로 여행을 떠난다. 따사로운 햇살과 화려한 파티를 꿈꾸며 여행을 떠난 캐리 일행은, 거의 악몽을 꾼 기분으로 돌아와야 했다. 캐리를 거대한 저택으로 초대한 멋진 남성은 늙은 여배우의 개인 비서였고, 가짜 명품에 현혹된 사만다는 플레이보이 발행인 휴 헤프너의 파티에서 망신을 당한다. 미란다가 만난 지적인 남성은 고기를 씹고는 뱉어버린다. LA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절대로 뚱뚱해지면 안 되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할리우드는 위대한 가식과 위선의 도시다. 뉴욕의 네 여성들에게는 적어도 가식은 없다. 그들 역시 우울하면 명품 구두를 사고, 남성들이 모델만 좋아한다며 불평하고, 인기 클럽에서 자신을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신경질을 내는 속물이지만 LA의 유령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뉴욕은 모든 것이 허용되고, 모든 것이 자유롭다. 지나치게 자유로워서 늘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 헤매야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생활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섹스 앤 시티>를 볼 때마다 조금 궁금하다. 뉴욕의 여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섹스를 ‘우리의 삶 그 자체’라고 말하니 사실이라고 믿기는 하지만, 그래도 의심이 간다. 정말 여성들은, 아니 뉴욕 여성들은 저렇게 직설적으로, 자신들의 은밀한 ‘섹스 라이프’를 공유하는 것일까? 영화나 TV 드라마가 다 ‘진실’이라고 믿을 나이는 훨씬 지났지만, <섹스 앤 시티>는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달려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나는 남성이다. 그래서 <섹스 앤 시티>를 볼 때마다 궁금하고,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뚱보에 추녀였다가 성형수술로 슈퍼모델급 몸매와 얼굴을 갖게 된 여인을 그린 만화 <미녀는 괴로워>를 볼 때도 그랬다. 여성이 아니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 같은 것들이 그녀들의 말과 행동에는 있다. 마찬가지로 <섹스 앤 시티>를 볼 때마다 늘 고개를 갸우뚱한다. 여성들의 사랑과 섹스 그리고 욕망은 저런 것일까? 늘 새로운 것을 알려주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는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성적 표현의 한계를 조금씩 깨는 획기적인 작품들이 있었다. 90년대 드라마에서는 <메리 타일러 무어 쇼> <앨리의 사랑 만들기>에 이어 <섹스 앤 시티>라고 한다. <메리 타일러 무어 쇼>는 보지 못했지만, <앨리의 사랑 만들기>는 무척이나 신기했다. 오로지 사랑을 찾아 꿈속을 걷는 것 같은 여인. 그런데 그녀의 직업은 가장 냉철하고 논리적이어야 할 변호사다. 조금씩 이상한 주변 사람들도 적어도 섹스에 대해서만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앨리의 남성 신기록은 만나자마자 세차 기계 속의 차에서 섹스를 나눈 것. 그걸 또 남의 결혼식에서 까발리고 망신을 당한다. 신랑을 가리키며 저 남성이 나의 섹스 상대였다고 털어놓는 바람에.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처하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남성으로서는,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섹스 앤 시티>는 <앨리의 사랑 만들기>를 훌쩍 뛰어넘는다. 아니 완전히 차원 이동을 해서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섹스 앤 시티>는 섹스를 찾아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 섹스를 하면서 자신의 삶과 관계를 구축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남녀의 관계는 제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섹스라는 매개체를 통해 형성된다. <섹스 앤 시티>는 우리에게 인생의 새로운 교훈을 알려준다.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섹스라는 것. 세상의 쓴맛·단맛을 알기 위해서는 섹스에 몰입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너무 많은 섹스를 한 캐리 친구들이 행복한 결혼에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섹스와 결혼은 애초 궁합이 맞지 않는 일이니까.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

사진/ <섹스 앤 시티>의 네 주인공들. 왼쪽부터 사만다, 미란다, 샬롯, 캐리.
왜 하필이면 <섹스 앤 시티>의 여인들은 로스앤젤레스(LA)가 아니라 뉴욕에 살고 있을까? 캐리와 친구들은 LA로 여행을 떠난다. 따사로운 햇살과 화려한 파티를 꿈꾸며 여행을 떠난 캐리 일행은, 거의 악몽을 꾼 기분으로 돌아와야 했다. 캐리를 거대한 저택으로 초대한 멋진 남성은 늙은 여배우의 개인 비서였고, 가짜 명품에 현혹된 사만다는 플레이보이 발행인 휴 헤프너의 파티에서 망신을 당한다. 미란다가 만난 지적인 남성은 고기를 씹고는 뱉어버린다. LA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절대로 뚱뚱해지면 안 되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할리우드는 위대한 가식과 위선의 도시다. 뉴욕의 네 여성들에게는 적어도 가식은 없다. 그들 역시 우울하면 명품 구두를 사고, 남성들이 모델만 좋아한다며 불평하고, 인기 클럽에서 자신을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신경질을 내는 속물이지만 LA의 유령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뉴욕은 모든 것이 허용되고, 모든 것이 자유롭다. 지나치게 자유로워서 늘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 헤매야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생활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섹스 앤 시티>를 볼 때마다 조금 궁금하다. 뉴욕의 여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섹스를 ‘우리의 삶 그 자체’라고 말하니 사실이라고 믿기는 하지만, 그래도 의심이 간다. 정말 여성들은, 아니 뉴욕 여성들은 저렇게 직설적으로, 자신들의 은밀한 ‘섹스 라이프’를 공유하는 것일까? 영화나 TV 드라마가 다 ‘진실’이라고 믿을 나이는 훨씬 지났지만, <섹스 앤 시티>는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달려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나는 남성이다. 그래서 <섹스 앤 시티>를 볼 때마다 궁금하고,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뚱보에 추녀였다가 성형수술로 슈퍼모델급 몸매와 얼굴을 갖게 된 여인을 그린 만화 <미녀는 괴로워>를 볼 때도 그랬다. 여성이 아니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 같은 것들이 그녀들의 말과 행동에는 있다. 마찬가지로 <섹스 앤 시티>를 볼 때마다 늘 고개를 갸우뚱한다. 여성들의 사랑과 섹스 그리고 욕망은 저런 것일까? 늘 새로운 것을 알려주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는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성적 표현의 한계를 조금씩 깨는 획기적인 작품들이 있었다. 90년대 드라마에서는 <메리 타일러 무어 쇼> <앨리의 사랑 만들기>에 이어 <섹스 앤 시티>라고 한다. <메리 타일러 무어 쇼>는 보지 못했지만, <앨리의 사랑 만들기>는 무척이나 신기했다. 오로지 사랑을 찾아 꿈속을 걷는 것 같은 여인. 그런데 그녀의 직업은 가장 냉철하고 논리적이어야 할 변호사다. 조금씩 이상한 주변 사람들도 적어도 섹스에 대해서만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앨리의 남성 신기록은 만나자마자 세차 기계 속의 차에서 섹스를 나눈 것. 그걸 또 남의 결혼식에서 까발리고 망신을 당한다. 신랑을 가리키며 저 남성이 나의 섹스 상대였다고 털어놓는 바람에.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처하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남성으로서는,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섹스 앤 시티>는 <앨리의 사랑 만들기>를 훌쩍 뛰어넘는다. 아니 완전히 차원 이동을 해서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섹스 앤 시티>는 섹스를 찾아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 섹스를 하면서 자신의 삶과 관계를 구축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남녀의 관계는 제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섹스라는 매개체를 통해 형성된다. <섹스 앤 시티>는 우리에게 인생의 새로운 교훈을 알려준다.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섹스라는 것. 세상의 쓴맛·단맛을 알기 위해서는 섹스에 몰입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너무 많은 섹스를 한 캐리 친구들이 행복한 결혼에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섹스와 결혼은 애초 궁합이 맞지 않는 일이니까.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