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비리 역사I- 끝까지 군역 요리조리 피한 조선양반들…힘없는 농민은 성기 잘라 기피
이회창 후보의 아들 정연씨의 병역면제를 둘러싼 의혹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 후보 지지자들은 또 그놈의 병풍을 꺼내 재탕·삼탕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는 와중에 18년 만에야 진실이 밝혀진 허원근 일병 사망 은폐·조작사건은 우리의 가슴을 친다. 신의 아들은 형제가 군대를 면제받는데, 어둠의 자식은 라면 맛이 없다고 총 맞아 죽고, 그 죽음조차 자살로 은폐되어야 하다니. 병역기피 문제가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현역으로 복무한 사람들은 속된 말로 꼭지가 돈다. 아니, 돌 수밖에 없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만 바보가 되는 사회에서 ‘자랑스럽게’ 군대 빼먹은 것들을 위해 3년 가까운 세월을 썩어야 했다니.
조선시대, 번상(番上)과 봉족(奉足)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군대가 없는 적은 없었다. 군대의 역사만큼 역사가 오랜 것이 병역기피의 역사다. 군에 복무하는 것이 하나의 신분적 특권이고, 군복무에 대한 대가가 정당하게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병역기피가 심하지 않았지만, 부담만 있고 개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불이익뿐인 사회에서 병역기피나 거부가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병역기피에도 뿌리깊은 역사가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귀족이 전사계급였기 때문에 귀족들의 군복무는 당연한 일이었다. 서양에는 이런 전통이 남아 있다 보니 지배층 젊은이들이 군복무를 해야만 지배층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지도층의 의무를 이야기할 때 군복무가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까지는 이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가 창건되고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고려의 지배층은 무신 성향을 버리고 유학을 배우는 문신귀족으로 변화했다. 고려의 문신귀족들은 점차 숭문천무(崇文賤武), 즉 문을 숭상하고 무를 업신여기는 풍조에 빠졌다가, 무신과 군인들의 반발을 자초해 무신의 난이라는 호된 대가를 치른다. 고려시대에 군인은 전시과 체제 아래 편입되어 군인전(軍人田)을 지급받았다. 군역과 함께 군인전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군인전을 부여받고 군인으로 나가는 특정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을 군반씨족(軍班氏族)이라고 했다. 이들의 지위는 문신이나 무신에는 못 미치지만, 평민농민보다는 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평화가 계속되면서 군인들은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천역으로 변해갔고,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군반씨족 체제의 와해는 불가피했다. 무신의 난 이후 정권을 잡은 최씨 가문은 삼별초를 만들었는데, 형식은 정부군이었지만, 내용으로는 최씨 가문의 사병(私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가 해체된 뒤 왜구의 침략 등 외침이 있으면 농민에서 병사를 징발해 대응하고 전쟁이 끝나면 군대를 해산했다. 상비병 체제의 붕괴 속에서 고대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로 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창건 이후 태종은 개국공신들이 두었던 사병을 혁파하고 군제를 개혁했다. 조선 전기의 군제는 기본적으로 병농일치에 입각한 국민개병제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천인을 뺀 모든 사람들이 군역(軍役)의 의무를 지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군역은 16살에 시작해 환갑상을 받을 때가 된 60살에야 면하는, 평생에 걸쳐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부담이었다. 병농일치의 국민개병제가 원활히 운영되기 위해서는 농민들에게 토지가 지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왕조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급해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의 국민개병제는 성립과 동시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군역은 서울로 올라와 현역으로 근무하는 번상(番上)과 번상하는 군인의 생계를 돕는 보인(保人) 또는 봉족(奉足)으로 구분된다. 고려시대에도 봉족을 두었는데, 고려의 봉족은 주된 임무가 군인전을 경작하는 것인 데 비해, 조선시대의 봉족은 번상을 하는 정군(正軍)들에게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포(布)를 바쳐야 했다. 봉족들이 군역으로 바쳐야 하는 포는 정군의 역종에 따라 달랐지만 대체로 1년에 2필(돈으로는 2량, 쌀로는 6두)로 상당히 무거운 부담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번상하는 일도 점차 포를 바치는 것을 바뀌어 국방력은 매우 약화했다. 승병은 군역기피의 전통? 양반이나 공신의 자제들은 조선 초기에는 충순위(忠順衛)·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 등 특수한 성격의 보충대에 편입되었다. 이들 부대들은 군사적 성격보다는 문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위한 대기소 역할을 하는 것으로써, 국민개병제의 본래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조선 초기의 양반 자제들은 이런 식으로나마 군역의 의무를 졌다. 조선의 법제상 양반이란 신분의 개념이 아니라 문반과 무반의 관료를 뜻하는 것이며, 법제상의 신분은 양반을 포함한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였다. 그러나 제도는 하나의 이상이었을 뿐,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은 특권귀족화하였다. 양반들은 자신들이 일반 평민들이 져야 하는 군역을 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니, 달가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군역을 지지 않는 것이 양반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인구 구성에서 양반이 10% 미만이고, 노비 등 각종 천민이 40∼50%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만이 군역을 전담한 것이다. 포 2필이라는 만만치 않은 군역을 거의 평생 져야 하니 농민들 사이에 군역을 피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엄격한 신분제 아래서 양인의 신분은 노비보다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군역의 부담이 무겁다 보니 양인의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고 세도가나 힘 있는 양반 가문의 노비가 되는 것을 자원하는 일이 많았다. 스스로 노비의 길을 택해야 할 만큼 군역의 부담은 무거운 것이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승려가 되는 길이었다. 조선시대 승려의 지위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천인에 속하는데, 양인인 농민이 사회적 신분을 낮춰 승려가 되는 데는 불심의 발동보다 군역의 무서움을 피하기 위한 것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농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는 일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국가에서 토목공사에 동원하는 요역 대상이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이 출현한 것도 호국불교의 전통보다 승려집단이 군역기피자의 소굴이라는 인식과 더 관련이 깊다. 이도저도 안 되는 농민들은 도망을 쳐서 군역을 모면했다. 또 당시에는 대립(代立)이 공공연히 인정되어 돈 있는 사람은 자기가 번상해야 할 차례에 돈을 주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현역근무를 하게 했다. 양인들 가운데서 그래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은 향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군역을 피했다. 해방 이후 대학생에게 징집을 연기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는 향교에 입학해 교생(校生)이 되면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서양과는 달리 유교문명권에서는 평민도 여건이 허락되면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민 가운데도 드물기는 하지만 문과나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향교의 교육 기능은 매우 취약했다. 이미 중종대에 이르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향교는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소굴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울 상실했다. 더구나 이미 군역면제의 특권이 있는 양반들은 평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득시글대는 향교에 자제들을 보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7세기 이후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고, 공교육기관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붕괴한 것도 군역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갓난아기도 군역, 죽은 사람도 군역
임진왜란 이후인 인조대에 이르면 전국의 교생 수가 4만명을 넘었다. 교생들이 향교에 적을 두는 이유가 유학 공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역 기피에 있었고, 평생을 교생으로 있으면서도 글 한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정부에서는 낙강충군법(落講充軍法)이라는 것을 제정해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생들에게도 군역을 지게 하는 방안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아직 향교에 빈한한 양반 자제들이 적지 않게 다니는데다가, 군역을 지느냐의 여부가 양반층의 신분의 상징이 되어버린 마당에 이 법을 시행하는 것은 곤란했다. 결국 “민심은 잃어도 좋으나 선비들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民心可失 士心不可失)”라는 명분 아래 이 법은 시행 6개월 만에 폐지되었다.
효종은 청나라의 침략에 굴복한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에 힘을 기울였다. 민족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북벌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 당시의 군비 확충은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 이른바 양역변통(良役變通)의 논의를 낳았다. 여기서 양역이라 함은 곧 군역을 말하는 것으로, 양반들이 전혀 군역을 지지 않아 양인들만 지게 된 사정을 반영한다. 좁은 지면에 복잡한 논의를 소개할 수는 없지만, 과도한 군역 부담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유일한 방안은 양반을 포함한 모든 가호에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는 데로 모아졌다. 그러나 군역을 지지 않는 것을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던 양반들은 이 제도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영조는 호포법이 실시되면 자신이 가장 먼저 호포를 바치겠다고 선언하며 양반들의 양보를 촉구했으나, 양반들은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호포법은 시행되지 못하고 대신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었다. 균역법은 종래 포 2필인 군역의 부담을 1필로 반감하는 조치였다. 균역법은 호포법만큼 강력하지는 못했어도, 잘만 시행되면 농민들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균역법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세율을 줄인 대신, 세원을 넓히고자 한 정부는 군적에 올라 군역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총원인 군액(軍額)을 크게 늘린 것이다. 영조의 전 임금인 숙종대에 30만이던 군액은 영조대에 이르면 50만으로 크게 늘어났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흔히 삼정(三政)의 문란이란 말을 많이 쓴다. 삼정이란 정부 수입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토지세인 전정(田政), 군역을 포(布)로 받는 군정(軍政), 정부의 구휼미 제도로 사실상 고리대금업이 돼버린 환곡(還穀)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 가장 무거운 부담이 군정이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세율은 낮아졌지만, 세원을 확대하다 보니 16살 이상 60살 이하의 장정이 아니라도 군역의 부담을 져야 했다. 갓난 아이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이미 죽은 사람도 살아 있는 것으로 꾸미거나 체납액을 이유로 군적에서 삭제해주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계속 군포를 거둬가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친척이나 이웃에 부과하는 족징(族徵)·인징(隣徵) 등은 군역이라는 이름 아래 농민들을 쥐어짜는 고전적 수법이었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도망갈수록 남아서 땅 파고 있는 농민들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학질은 떼도 첩역은 못 뗀다”
또 조선 후기에는 군제가 복잡해지면서 농민들도 자신이 어떤 군영의 군역을 지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의 이 군영, 저 군영이, 또는 지방의 군영에서 각각 군역을 부과해 한몸으로 여러 곳에 군역을 져야하는 첩역(疊役)의 폐단도 자주 일어났다. 때문에 농민들은 학질은 뗄 수 있으나 첩역은 뗄 수 없다고 탄식했다.
농민의 부담이 이렇게 무겁다 보니 아전들에게 뇌물을 바쳐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사람들은 자꾸 늘어났다. 아니, 아전을 탓할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더 큰 책임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정부는 부족한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납속책(納粟策)을 써서 곡물이나 돈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벼슬을 팔았다. 벼슬 임명장인 교지에 이름을 비워놓은 이른바 공명첩(空名帖)인데, 이 벼슬을 산 사람은 호적에 납속, 즉 돈으로 산 것임을 밝혀 군역을 면제받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지켜질 리 없었다. 돈 주고 공명첩을 살 정도의 재력가라면, 아전들에게도 돈을 먹여 호적에 납속 두 글자를 빼고 기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가난한 양반들은 조상이 받은 여러 장의 교지 가운데서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팔아먹고, 이를 산 사람은 교지의 주인공이 자기 조상이라 우기고, 또 족보를 위족하고 해서 조금 힘 있는 사람들은 다 군역을 빼먹었다. 이렇게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꿔가며(換父易祖) 얻은 양반 지위는 실제 양반 사회에서 양반으로 대우받을 수 없었지만, 국가를 상대로 군역을 면제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문란과 관련해 호적을 분석해 양반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가 넘는다는 통계가 나오는 것도 다 이들 군역기피자들 때문이다.
그러면 호적을 정리하고 인구를 파악해 군정을 닦는 군정수(軍政修)를 해 이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았을까?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아전이라는 것들은 일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일이 있어야 먹을 것이 생기니, 군정을 닦는다고 호적을 재정리하면 아전의 이익이 될 뿐 오히려 농민에게 부담이 될 뿐이라서, 군정수는 현명한 수령이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이다. 다산 같은 철저한 개혁가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된 것이다.
천민의 다수가 조선 후기에 가면 양인에 편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떤 사회도 특권층이 40%를 넘는다면 유지될 수 없다. 경제적·사회적 형편이 좋은 상위 40% 정도가 군역을 지지 않고, 또 노비 등 천민들을 빼고 나니 중하위층 30, 40%의 양민들만 군역을 부담하게 된 것이다. 정약용이 ‘애절양(哀絶陽)’이란 끔찍한 시를 쓴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시아버지 돌아가 벌써 상복을 벗었으며/ 갓난 아기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첨정되어/ 군보에 올랐네/ 하소연하러 가니/ 호랑이 같은 문지기 지켜 섰고,/이정(里正)이 호통치며/ 외양간에서 소마저 끌어갔네/ 칼 갈아 방에 들어가/ 자리에 피 가득한데/ 스스로 한탄하는 말/ 애 낳아 이 고생당했구나.” 이리저리 다 군역을 피하는데, 그럴 힘도 주변머리도 없는 불쌍한 농민이 군역의 부담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성기를 자른 것이다. 피임수술도 기구도 없던 시절, 아이 하나 더 태어나면 군포 2필씩 부담이 되니 그곳에 칼을 댄 것이다. 정력에 좋다는 것은 모두 다 잡아먹어 멸종위기에 놓인 정력공화국 대한민국의 아아, 가련한 조상의 끔찍한 군역기피여!
보수적 대원군조차 실각시킨 호포법
1862년 대기근이 들고 삼남지방은 흔히 민란이라고 하는 농민들의 항쟁에 휩싸였다. 삼정의 문란, 특히 군정의 문란은 농민항쟁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대원군이 집권한 것은 안으로는 거센 농민항쟁에, 밖으로는 서양의 동아시아 침략에 직면한 상황에서였다. 안팎으로 조여오는 위기상황에서 대원군은 나름대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국방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보수적 개혁가인 대원군의 여러 정책 가운데서 군역과 관련된 것은 17세기 말부터 양역변통 논의 때마다 대안으로 제기됐으나 양반들의 저항으로 시행되지 못한 호포법의 시행이다. 보수적 실용주의자인 대원군은 정부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양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포법을 시행했지만, 결코 양반들의 신분적 특권을 약화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군포를 부담하지 않는 것을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던 양반들의 입장을 고려해 양반가에서 호포를 낼 때는 노(努)의 이름으로 내게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양반들은 대원군을 용납하지 않았다. 병인양요·신미양요 등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와 미국 함대를 ‘격퇴’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하고,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보수적 양반의 지지를 받은 대원군이 실각한 결정적 요인은 민감한 호포법의 시행, 곧 양반들이 자신의 신분적 특권의 상징이라 여기는 군포를 부과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초기에는 국민개병제를 표방해 양반들도 군역을 져야 했지만, 세월이 흐르자 군역면제는 양반의 특권으로 자리잡았다. 이회창 후보 일가의 병역면제 의혹을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거론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교가 뿌리내린 근 천년의 세월 동안 우리나라 지배층의 덕목에 군복무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반인과 똑같이 군역을 지는 것은 오히려 치욕적인 일이었다. 조선시대였으면 상류층의 병역면제는 전혀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회창 후보는 시대를 잘못 만난 불행한 지도자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조선시대의 지배층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유의 글을 쓰다 보면 당연히 지배층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지만, 조선시대의 지배층들은 나름대로 매우 엄격한 자기관리의 잣대가 있었다.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에도 조선왕조가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당시 지배층이 그들 나름대로 엄격한 책임감으로 사회를 지탱해왔다는 점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을 선비정신이라 부르든, 유교 지식인들의 자기성찰이라 부르든 불행히도 오늘날의 상류층은 그런 전통사회 지배층의 책임감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렇다고 무(武)의 전통을 이은 서구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체현하는 것도 아니다. 이 땅의 주류는 정녕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려 하는가?(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병역기피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사진/ 양인과 천민으로 신분이 갈렸던 조선시대. 군역의 부담이 무겁다 보니 양인의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고 양반 가문의 노비가 되는 것을 자원하는 일도 많았다. 단원 김홍도의 <기와이기>. (조선시대 풍속화)
고대사회에서는 귀족이 전사계급였기 때문에 귀족들의 군복무는 당연한 일이었다. 서양에는 이런 전통이 남아 있다 보니 지배층 젊은이들이 군복무를 해야만 지배층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지도층의 의무를 이야기할 때 군복무가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까지는 이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가 창건되고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고려의 지배층은 무신 성향을 버리고 유학을 배우는 문신귀족으로 변화했다. 고려의 문신귀족들은 점차 숭문천무(崇文賤武), 즉 문을 숭상하고 무를 업신여기는 풍조에 빠졌다가, 무신과 군인들의 반발을 자초해 무신의 난이라는 호된 대가를 치른다. 고려시대에 군인은 전시과 체제 아래 편입되어 군인전(軍人田)을 지급받았다. 군역과 함께 군인전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군인전을 부여받고 군인으로 나가는 특정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을 군반씨족(軍班氏族)이라고 했다. 이들의 지위는 문신이나 무신에는 못 미치지만, 평민농민보다는 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평화가 계속되면서 군인들은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천역으로 변해갔고,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군반씨족 체제의 와해는 불가피했다. 무신의 난 이후 정권을 잡은 최씨 가문은 삼별초를 만들었는데, 형식은 정부군이었지만, 내용으로는 최씨 가문의 사병(私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가 해체된 뒤 왜구의 침략 등 외침이 있으면 농민에서 병사를 징발해 대응하고 전쟁이 끝나면 군대를 해산했다. 상비병 체제의 붕괴 속에서 고대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로 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창건 이후 태종은 개국공신들이 두었던 사병을 혁파하고 군제를 개혁했다. 조선 전기의 군제는 기본적으로 병농일치에 입각한 국민개병제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천인을 뺀 모든 사람들이 군역(軍役)의 의무를 지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군역은 16살에 시작해 환갑상을 받을 때가 된 60살에야 면하는, 평생에 걸쳐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부담이었다. 병농일치의 국민개병제가 원활히 운영되기 위해서는 농민들에게 토지가 지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왕조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급해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의 국민개병제는 성립과 동시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군역은 서울로 올라와 현역으로 근무하는 번상(番上)과 번상하는 군인의 생계를 돕는 보인(保人) 또는 봉족(奉足)으로 구분된다. 고려시대에도 봉족을 두었는데, 고려의 봉족은 주된 임무가 군인전을 경작하는 것인 데 비해, 조선시대의 봉족은 번상을 하는 정군(正軍)들에게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포(布)를 바쳐야 했다. 봉족들이 군역으로 바쳐야 하는 포는 정군의 역종에 따라 달랐지만 대체로 1년에 2필(돈으로는 2량, 쌀로는 6두)로 상당히 무거운 부담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번상하는 일도 점차 포를 바치는 것을 바뀌어 국방력은 매우 약화했다. 승병은 군역기피의 전통? 양반이나 공신의 자제들은 조선 초기에는 충순위(忠順衛)·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 등 특수한 성격의 보충대에 편입되었다. 이들 부대들은 군사적 성격보다는 문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위한 대기소 역할을 하는 것으로써, 국민개병제의 본래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조선 초기의 양반 자제들은 이런 식으로나마 군역의 의무를 졌다. 조선의 법제상 양반이란 신분의 개념이 아니라 문반과 무반의 관료를 뜻하는 것이며, 법제상의 신분은 양반을 포함한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였다. 그러나 제도는 하나의 이상이었을 뿐,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은 특권귀족화하였다. 양반들은 자신들이 일반 평민들이 져야 하는 군역을 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니, 달가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군역을 지지 않는 것이 양반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인구 구성에서 양반이 10% 미만이고, 노비 등 각종 천민이 40∼50%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만이 군역을 전담한 것이다. 포 2필이라는 만만치 않은 군역을 거의 평생 져야 하니 농민들 사이에 군역을 피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엄격한 신분제 아래서 양인의 신분은 노비보다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군역의 부담이 무겁다 보니 양인의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고 세도가나 힘 있는 양반 가문의 노비가 되는 것을 자원하는 일이 많았다. 스스로 노비의 길을 택해야 할 만큼 군역의 부담은 무거운 것이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승려가 되는 길이었다. 조선시대 승려의 지위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천인에 속하는데, 양인인 농민이 사회적 신분을 낮춰 승려가 되는 데는 불심의 발동보다 군역의 무서움을 피하기 위한 것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농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는 일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국가에서 토목공사에 동원하는 요역 대상이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이 출현한 것도 호국불교의 전통보다 승려집단이 군역기피자의 소굴이라는 인식과 더 관련이 깊다. 이도저도 안 되는 농민들은 도망을 쳐서 군역을 모면했다. 또 당시에는 대립(代立)이 공공연히 인정되어 돈 있는 사람은 자기가 번상해야 할 차례에 돈을 주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현역근무를 하게 했다. 양인들 가운데서 그래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은 향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군역을 피했다. 해방 이후 대학생에게 징집을 연기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는 향교에 입학해 교생(校生)이 되면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서양과는 달리 유교문명권에서는 평민도 여건이 허락되면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민 가운데도 드물기는 하지만 문과나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향교의 교육 기능은 매우 취약했다. 이미 중종대에 이르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향교는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소굴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울 상실했다. 더구나 이미 군역면제의 특권이 있는 양반들은 평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득시글대는 향교에 자제들을 보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7세기 이후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고, 공교육기관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붕괴한 것도 군역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갓난아기도 군역, 죽은 사람도 군역

사진/ 벼슬을 산 사람은 군역을 면제받지 못하도록 중앙정보가 곡물이나 돈을 받고 판 공명첩. 그러나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사진/ 담뱃대를 문 조선시대 양반. 조선 후기 신분제의 문란 속에 양반 인구가 전체의 40%가 넘는다는 통계가 나온 것도 다 군역기피자들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