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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마음의 상처는 평생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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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9-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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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로 인한 심리적 후유증이 정신건강 위협… 좌우 뇌 균형 발달 막고 스트레스에 쉽게 노출

김아무개(31·여)씨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겪은 일이다. 부모님이 타지에서 사업을 하는 관계로 외가에서 자랐다. 어느 날 할머니의 장롱에 있던 10여만원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외삼촌은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아무리 자신이 훔치지 않았다고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외삼촌의 완력에 옥상으로 끌려가 쇠파이프로 온몸을 두들겨맞았다. 끝내 거짓 자백을 하고서야 2시간여의 매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던 탓이다. 가슴에 맺힌 피멍은 지워지지 않았다. 몇년이 지난 뒤 칼을 들고 잠자는 외삼촌 방에 들어간 일도 있다.

김씨는 지금도 악몽처럼 당시를 떠올리곤 한다. 온몸이 시커멓게 멍들었던 육체적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치유됐다. 하지만 정신적인 상처는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심장을 때때로 옥죄곤 한다. 누군가 자신의 감정을 억압한다고 느끼면 머리칼이 치솟는 분노를 느낀다. 무엇인가에 강압이라고 느끼는 순간 공포와 울분이 얽히고 설켜 감정이 폭발하고 만다. ‘말대꾸’라는 식으로 폭력적으로 매도당했던 경험이 자신의 감정을 소용돌이에 빠뜨리는 것이다. 극단의 감정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감정이 차가워진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에 괴로운 나날


사진/ 아동학대의 상처는 평생 개인을 괴롭힌다. 한국이웃사랑회 회원들이 아동학대 예방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아동기의 성적 학대가 살인으로 이어져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드러내놓고 치료를 받지 않은 탓에 혼자만의 고통을 감내한다. 문제는 지금도 아동들이 끊임없이 학대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01년 아동학대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아동학대 신고전화(국번 없이 1391)에 접수해 학대로 판정된 사례만 2105건이었다. 학대 유형으로는 아동을 굶기거나 제대로 입히지 않는 등의 방임형 학대가 전체의 32%로 가장 높았으며 △신체학대 22.6% △방치 6.4% △정서학대 5.4% △성적 학대 4.1% 순이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잠재학대 아동 수는 44만9천명이나 된다. 추정 아동의 0.5%만이 신고를 통해 학대로 판정받을 뿐 절대 다수가 은폐되고 있는 셈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정신적 상처가 성인기 정신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정신발달 과정에서 입은 치명적인 상처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것이다. 육체적 학대는 물론이고 성적·감정적 학대 등도 정신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친다. 유년 시절의 기억이 성년기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동안 아동학대는 아주 심하지 않은 경우라면 당시의 치료로 상처가 아물 것으로 여겨졌다. 서울보훈병원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클리닉’ 정문용 과장(신경정신과)은 “어린 시절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성인은 상처받을 당시의 모습을 마음속에 두고 살아간다. 자기 패배적인 강박이 신경증으로 발달하거나 사회심리적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말한다.

아동학대의 여파는 연령대별로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난다. 내적으로는 우울증·불안·자살충동·외상후 스트레스 등으로, 외적으로는 공격성향·충동·약물남용 등으로 표출된다. 때론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복잡한 질환을 일으키기도 한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정서나 행동, 대인관계가 매우 불안정한 이상 성격으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장애다. 이 질환을 앓는 사람은 곧잘 다른 사람을 흑백논리로 판단한다. 처음에는 대상을 우상화하다가, 어느 순간 모욕감이나 배신감을 느끼면 신경질적으로 비방하게 된다. 미국 하버드 의대 정신의학부 마틴 타이커 교수는 “아동학대로 인해 대뇌반구의 안쪽과 밑에 있는 변연계의 발달을 방해한다. 변연계는 서로 연결된 신경 중심부로 감정과 기억을 조절하는 중추로서 해마는 학대의 경험을 회고하고, 편도체는 신경증적인 감정을 일으킨다”고 밝혔다.

신경생물학자들은 아동학대의 영향으로 편도체가 과도한 전기적 반응상태에 이르거나 스트레스 호르몬에 지나치게 노출돼 해마의 발달이 지체되는 것으로 추측한다. 매사추세츠주 벨몬트 맥린대학의 연구자들은 뇌파를 통해 변연계의 자극반응을 측정했다. 그 결과 어린 시절 정신적 충격을 받은 환자 중 54%가, 심각한 육체적 성적학대를 경험한 환자의 경우 72%나 비정상적인 뇌파를 가지고 있었다. 아동학대 경험이 있는 성인의 왼쪽 해마 크기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12%가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 해마는 고밀도의 스트레스 호르몬 조절 수용체를 지닌 곳이다. 우울증이나 민감성, 적대감 등의 감정과 관련된 왼쪽 편도체의 크기도 평균 9.8%가 적었다.

사진/ 아동학대는 중뇌 영역인 변연계에 과다자극을 일으킨다. 해마는 입수된 정보를 장기적인 기억으로 저장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편도체- 개인의 생존과 감정적 욕구에 따른 감각정보를 해석하고 걸러낸다.

해마 발달 지체로 우울증 등에 걸려

흥미로운 것은 아동학대의 경험이 뇌의 왼쪽 부분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환자는 오른손잡이일지라도 뇌의 우반구가 우세했다. 뇌의 좌반구는 언어 인지능력을, 우반구는 부정적 감정을 주로 처리한다. 학대받은 아이들이 끔찍했던 기억을 우뇌에 저장하고 그 기억을 회상하기에 우뇌가 활성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아동학대 경험자의 뇌반구 활동 촬영에 따르면 일상적인 기억을 떠올릴 때는 좌반구가, 상처받은 기억을 떠올릴 때는 우반구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좌우 뇌의 통합이 이뤄지지 않아 중간부분의 뇌량도 훨씬 적었다. 중간부분에 있는 소뇌충부는 신경전달물질 노르에피네프린과 노파민의 생성과 배출을 제어하는 뇌간핵을 조절한다. 이 부분에 비정상적인 발달이 이뤄져 쉽게 정신질환에 노출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 사회 각계 인사들이 아동학대 반대 문구를 새긴 오색풍선을 날리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이렇게 어린 시절의 학대 경험은 뇌에 치명상을 입히는 심각한 스트레스다. 특히 유아기의 스트레스는 뇌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방해하는 독성물질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사실 스트레스는 연령대를 초월해 뇌의 활동을 방해한다. 스트레스가 일어나면 10여분 뒤에 감정과 지적능력을 조절하는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피질의 축선에 문제를 일으킨다. 시상하부에 이상이 생기면 기억과 학습에 영향을 끼치는 글루코코티코이즈라는 호르몬의 집합체가 과다하게 형성된다. 그렇게 되면 기억과 인식작용에 문제가 발생해 정신장애로 이어지기 쉽다. 실제로 부모의 손길을 벗어난 보호시설 등지에서 자란 아이는 글루코코티코이즈의 양이 많아져 성인기에 스트레스에 쉽게 노출된다. 스트레스를 받는 아동들은 혈압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감정 조절에 치명적인 영향을 입으면서 인체에도 독소로 작용하는 셈이다.

당신의 자녀는 학대받지 않는가

사진/ 아동학대는 뇌의 발달을 방해해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 초등학생이 그린 아동학대 관련 그림.
어린이들의 뇌는 대개 8살 정도까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발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뇌세포는 경험의 영향으로 살거나 죽게 마련이다. 그것도 일방적인 학대에 의한 경험이라면 뇌세포에 치명상을 입힐 게 틀림없다. 영남대학교 심리학과 장현갑 교수(생물심리학·한국심리학회 회장)는 “뇌의 발달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상태에서 학대로 인한 공포를 경험하면 뇌가 영구적으로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손상된 뇌에서는 아드레날린 분비가 지나치게 많아져 정서상의 혼란에 처하기 쉽다”고 지적하며 “장차 성인이 되었을 때 뚜렷한 이유가 없이도 일상에서 공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물론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을 조절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한다.

스트레스는 비단 어린 시절뿐 아니라 세대를 초월해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뇌를 자극한다. 아동에게서 1% 정도의 발병률을 보이는 정신분열증은 유전적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일란성 쌍둥이 중 하나가 정신분열증 환자일 때 다른 하나가 같은 병을 앓을 확률은 50% 이하다. 불안증이나 공황증세 등도 세로토닌 운반 유전자에 특정변이가 생겨 나타나는 장애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요즘 연구자들은 유전적 성향에 따른 정신질환을 규명하려고 한다. 정신장애에는 여러 유전자가 개입되고 상황요소도 큰 영향을 끼치기에 유전적인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정신장애를 예방하려면 무엇보다 뇌가 학대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 당신의 자녀가 스트레스 호르몬에 노출되어 마음의 건강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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