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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강의 숨결을 느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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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9-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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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신정일씨가 추적한 한강 천삼백리의 역사와 사연들

날마다 한강변의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를 지나며 또는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은 아마도 “왜 이리 차가 막혀?”일 것이다. 한강은 때로 시원한 강바람으로 때로 아름다운 노을빛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줍은 프러포즈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무뚝뚝하게도 차 속에서 빨리 한강을 지나 어딘가에 도착하기만 바란다. 천천히 한강변을 걸으며 흐르는 강물을 응시하기에는 너무 바쁘다. 시간의 여유가, 아니 그보다 마음의 여유가 더 없는 것이다.

사진/ <한강역사문화탐사> (신정일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
차로, 지하철로 한강을 건너는 것도 느려 속타는 세상에 향토사학자 신정일씨는 한강 천삼백리 길을 뚜벅이 걸음으로 걸었다. 차로 달리면 대여섯 시간 길을 발에 물집 잡혀가며 16일 동안 걷는 ‘미련한 짓’(추천의 글을 쓴 주강현씨의 표현처럼!)을 감행했다. 그 여정의 기록인 <한강역사문화탐사>는 서점에 쌓여 있는 ‘한강변 드라이브 코스’류의 서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느리고 우직한 책이다. 두 다리에 의지해 그가 만나는 것은 ‘맛집, 멋집’이 아니라 한강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 한강을 둘러싼 역사의 흔적, 개발과 훼손의 흉터, 그리고 아름다운 시들이다.

한강의 탄생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한강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자’는 마음 하나 가지고 천천히 한강을 걸어가면서 강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모든 사물들을 만나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자연과 사람이 서로 더불어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싶었”던 그의 여정은 한강의 발원지 강원도 태백의 검용소에서 시작된다. 한강 물줄기는 고목나무샘에서 발원해 검용소를 거쳐 하장천, 골지천으로 흘러가 정선아우라지에서 송천과 합해진다. 영월에서 동강 서강을 받아들인 남한강은 평창강, 주창강을 합하고 단양을 지나면서 또 많은 지류를 합친 뒤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이 한강은 계속 북서방향으로 흐르며 작은 지류를 합류해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생을 마감한 뒤 서해로 들어간다. 이 책은 한강의 탄생에서 마지막 순간까지를 조용히 지켜본다. 시작과 끝 사이에는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의 터전이 된 한강의 역사와 사람들의 숨결, 지은이의 깊은 사색이 들어차 있다.

사진/ 한강의 발원지 검용소. 하루 2천여톤 가량의 수원이 석회암반을 뚫고 나온다.
책을 펼치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지은이가 직접 찍은 한강의 사진들이다. 눈 덮인 검용소의 물길과 산과 나무로 둘러싸인 한강의 지류, 한강변의 희귀한 야생화들, 큰 눈을 껌뻑이는 소, 길에서 만난 사람들 등 한강과 한강에 기대 살고 있는 자연에 대한 지은이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한강 상류쪽의 아름다운 정경들은 하류로 내려갈수록 댐과 다리 등 인공물들로 변한다. “화새가 모이는 정자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봉정리라 이름 지은 마을 강변. 버들강아지가 늘어져 있는 맑은 강 속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더 푸르게 가라앉아 있다. 한 폭의 풍경화가 어찌 저 물빛을 온전히 닮을 수 있을까.” 글로 묘사되는 청명한 풍경과 고즈넉한 삶의 풍경도 하류로 내려올수록 탁해지고 지은이의 탄식의 한숨소리가 잦아진다. “봉정리 소수력발전소 앞에서 물은 산을 뚫고 딴 길로 돌려진다. 잦아든 물길은 작은 도랑물처럼 흐르다가 결국엔 완전히 사라진다. 옛날에는 물 반, 고기 반이었다는데 인간의 편리 때문에 자연 자체가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만 것이다.”

한강의 정경과 함께 지은이는 방대한 역사적 자료를 그러모아 한강변의 굽이보다 더 많은 굴곡을 가진 한강의 역사와 전설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정선에서 아우라지의 그림 같은 풍경만 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조 때 관리들의 학정을 견디지 못한 민중들의 봉기를 읽는다. 아라연의 아름다운 정경에서는 세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혼백이 갈 곳을 잃어 멍한 채 이곳저곳을 떠돌아 이곳에 들어왔다가 물고기들의 간청으로 태백산에 들어갔다는 슬픈 전설을 알게 된다.

사진/ 광나루 지나 올림픽대교가 보이는 한강 전경.
그러나 지은이가 구성지게 풀어놓는 역사의 흔적을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서울의 한강에 들어오면 역사는 거의 지워지고 만다. 단양8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만 해도 마포8경이 있었다. “용산강(용산지역의 한강을 부르던 말) 물 위로 뜨는 달, 마포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강 건너 방학 언덕의 밤낚시, 밤섬의 깨끗한 모랫벌, 동바위마을의 저녁 연기, 와우산의 소 말 방축, 양화나루의 석양 무렵의 낙조, 관악산의 맑은 날의 아지랑이” 가운데 지금도 볼 수 있는 것은 물 위로 뜨는 달밖에 없다. 서거정은 “양화도(지금의 한강 양화지구) 어귀에서 뱃놀이를 하니/ 별천지가 바로 예로구나”라고 한강의 경치를 노래했지만 지금은 요란하게 네온사인 빛나는 강변 레스토랑만이 옛 시절의 영화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근친혼을 한다 하여 ‘음란하기 이를 데 없다’고 손가락질당하던 고려시대 밤섬 사람들의 이야기나 불과 70여년 전에 6척 고래가 잡힌 적이 있다는 비사를 통해 무심히 지나던 한강의 숨은 모습을 보는 건 흥미진진한 독서가 아닐 수 없다.

사라진 역사의 흔적들… 숨은 한강 찾기

514km라는 긴 여정은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 끝은 기실 진정한 마침표가 아니다. ‘적은 이곳을 보고 있다’는 살벌한 표지판 아래서 지은이 일행의 여정은 중단됐기 때문이다. 애기봉을 지척에 두고 발걸음을 돌리는 신씨는 “한강이 그냥 한강이 아니구나. 한이 많아 한강이로구나” 하고 씁쓸한 소회를 적는다. <한강역사문화탐사>는 한강에 대한 이야기이자 한강을 따라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다. 그 길은 차를 타고 지나면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길이다. 이 책은 더딘 걸음을 통해 길을 만날 때 그 길이, 그리고 우리 국토가 얼마나 넓고 풍요로운 곳으로 바뀌는지 보여준다. 더불어 저자는 이야기한다. “지금 나는 너무 서둘지 않는가. 나의 삶의 여정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가” 퉁퉁 붓고 물집 잡힌 발로 천삼백리 길을 걸으며 지은이가 길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건네고 싶은 말은 이 말이 아니었을까.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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