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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리는 진정 그들을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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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9-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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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

‘영웅’ 베토벤과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 실체는 사라지고 각색된 모습만 남아

예전에 본 영화 가운데 <전망 좋은 방>이란 작품이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로 여행을 간 영국의 귀족집안 아가씨가, 평민 출신 청년을 우연히 만나 우여곡절 끝에 서로 애정을 느끼고 나중에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결혼한다는 줄거리다. 내가 여기서 재미있게 본 대목은 여주인공이 베토벤 소나타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그녀의 숨겨진 열정을 암시하는 부분이었다.

하긴 근엄하기 이를 데 없었고 금욕적이었던 혁명가 레닌도 “내가 알기로 열정소나타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이라도 듣고 싶을 정도다”라며 “이 끔찍한 지옥에 살면서도 그런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었던” 베토벤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숭배자들이 예술로 승화시킨 초상화


사진/ 초상화의 베토벤은 영웅적 용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로는 추악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베토벤은 음악을 통해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하는 인간의 위대한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러한 베토벤의 영웅적 풍모는 동시대 작곡가 베버의 묘사에서도 읽힌다. “그의 머리카락은 굵고 회색이며 곤두서 있었는데 더러는 완전히 백발이었다. 이마와 두개골은 특별히 넓게 굽은데다 마치 탑처럼 높다랗게 솟아 있었다. 코는 사자의 코처럼 네모졌고, 입은 고상하게 생겼으며 부드러웠다. 턱은 넓고 그의 모든 초상화에 나타나 있듯이 조가비 모양의 홈이 파여 있었는데, 두개의 턱뼈는 아무리 단단한 호두라도 깨물어 부술 것처럼 강해 보였다. 얽은 자국이 있는 넓은 얼굴은 어두운 붉은색이었다. 숱 많은 짙은 눈썹 아래서 작고 빛나는 눈이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부드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베토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의 음악을 흠모하던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특히 50살 직전에 슈틸러와 슈몬이 각각 그린 초상화는 무수하게 복제되어 숭배자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요사이까지도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도상이 되었다. 생전에 베토벤의 초상화는 십대의 모습에서 데드 마스크까지 26여개가 제작되었다. 그런데 이 초상화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데, ‘도대체 이게 다 베토벤 그린 거 맞아?’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서로들 닮은 구석이 없다. 44∼45살 사이에 그려진 두개의 초상화는, 막달레나 빌만이라는 여인이 베토벤을 ‘못생기고 반미치광이’라고 비웃었다는 쓰라린 연애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사실 베토벤은 성격과 행동이 괴팍했고 외모도 추악한데다 전혀 다듬지도 않아 ‘빗질이라고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머리털은 제멋대로 솟구쳐 메두사 머리의 뱀들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천재를 이해 못하던 여인들로부터 번번이 구애를 거절당하기 일쑤여서, 급기야 일기에 ‘너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니다’는 자괴지심을 적기에 이르렀다. ‘불멸의 연인’에게 보낸 편지란, 애당초 대상이 없지 않았나 하는 추측까지 해본다.

베토벤 초상화의 수수께끼는 결국 ‘보잘것없는 용모의 영웅이란 있을 수 없다’는 뭇 사람들이 가진 어처구니없는 통념을 증명하는 한 가지 예일 것이다. 한 인간의 얼굴을 그저 묘사할 뿐인 초상화, 그러나 이 단순한 그림에서도 작가가 의식하던 그렇지 않던 ‘의미부여’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노골적으로 행해지는 장면을 다시 목격한다.

미국의 대중적인 일러스트 작가들이 그린 현대판 베토벤 초상을 보라. 어느새 영웅적인 작곡가는 사라지고, ‘현대의 영웅’ 뉴욕 월가의 최고경영자(CEO), 할리우드의 액션 배우로 변해 있다. 펑크 스타일의 베토벤 앞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추악한 외모의 영웅은 없다”

사진/ 관능미만 남아 있는 마를린 먼로. 그는 휘트먼의 시를 읊는 교양인이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사진기를 비롯한 영상기계의 발달로 말미암아 자신의 얼굴을 초상화로 남기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한 인간의 초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없어지진 않았다. 러시아인들이 풍선껌과 더불어 미국문화의 상징이라고 말했던 마릴린 먼로의 초상에서 재발견한다.

마릴린 먼로에 대하여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이들은, 그녀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금발의 백치’가 아니라, 머리카락도 원래 갈색이었고 휘트먼의 시를 한수 읊는 교양인이자 독서가였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재치도 있어서, 좋아하는 소설이라고 밝힌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그루셴카의 이름을 어떻게 쓰냐는 어느 기자의 갑작스럽고도 짓궂은 질문에 “G.라고 쓰면 되죠”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할리우드와 대중들은 조명과 카메라 앞에서 그녀의 본명인 노마 진이 아닌 마릴린 먼로이길 원했고, 그녀의 타고난 관능미도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 그들은 섹스를 아이스크림이나 팝콘쯤으로 여기는, 머리는 없고 몸뚱이만 있는 여배우이길 원했던 것이다.

뭇 남성들의 욕망을 아직도 끓게 하는 <뜨거운 것이 좋아> <7년만의 외출>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등등에 나오는 뇌쇄적인 모습들 속에서, 섹스 심벌이란 이름으로 그녀에게 씌운 허물을 발견한다. 이것은 강요되고 거짓된 초상이었지만 마침내 그녀의 일상을 덮어버리고 정체성까지 혼란스럽게 하여 결국 그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끝까지 숨긴 섹스 심벌의 진실

그녀도 이러한 사실을 내내 고민해,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일생 동안 마릴린 먼로라는 역할만 했어요. 내가 그와 결혼하면 마릴린 먼로를 벗어버릴 수 있을 같아요”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번의 유산과 더불어 결혼과 탈피의 몸부림은 실패했고, 곧이어 케네디 형제와 위험한 불장난에 빠진다. 베토벤에게 씌운 영웅이란 초상은 베토벤의 삶을 그저 운명적으로 두드릴 뿐이었지만, 섹스 심벌이란 마릴린 먼로의 초상은 주홍글씨와 같은 저주였고 삶의 ‘STOP’이었다(1956년작 <버스 정류장>(Bus Stop)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아 육체파 배우라는 오명을 벗었지만 그녀의 영화인생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그녀의 죽음은 허물이 몸과 생명을 삼켜버린 결과였다. 8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그녀는 알몸으로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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