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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울떡증 땀시 죽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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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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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오랜만에 하루종일 볕 쬐어 단내 풍기며 꼬득꼬득하게 말린 고추를 아버님과 푸대에 담고 있는데 저만치서 누군가 소쿠리를 힘겹게 이고 학산댁네 고추밭으로 어렵게 발을 뗀다.

“아프담서 뭣할라고 고추는 이고 나오까이” 누구냐고 묻는 내게 아버님은 “민식이 어매 아니냐?”며 소리치신다. 얼마 전만 해도 먹고살 만한데 악착같이 남의 일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동네아짐들의 지청구를 도맡아 들었는데 오늘 보니 한발 떼기도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말이 아니다. 여름내 손자들 몫으로 들어둔 적금 부으려고 그 애를 쓰더니만 마침내 당뇨병과 울떡증(우울증)까지 겹쳐 세상일 놓아버린 사람같아 보인다.

일찍이 혼자되어 그 많은 전답 건사하고 자식농사도 그런 대로 잘 지어 부러울 것 없어 보이더니 지난달 죽림댁 칠순잔치에 온 막내아들 친구들을 보는 순간 속이 울떡거리며 그때부터 기력을 잃고 배만 고프더란다. 4년 전 막내아들을 사고로 잃은 기억이 덧났나 보다. 이제 육십줄인데 어린 손자생각 해서 힘겹게 버티던 몸이 삽시간에 허물어져버린 것 같다. 같은 처지라고 서로 맘속으로 위로하며 살아온 터라 어머니의 맘이 더 짠하다. 더욱이 자식들은 모두들 서울에 있고 홀로 계시니 허기진 속에 뭣이라도 채워넣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학산댁도 눈에 안 보인다. 농사철이면 이른 아침부터 우리집 앞 밭에서 곡식들 일구고 덮고 하며 농약까지 도맡아 맵게 농사일 하던 양반이 병명도 모른 채 병원신세다. “병원 진단도 아무 이상 없다는데 기력이 하나도 없고 배만 고프니 이게 뭔 일인지 모르것소, 나이 일흔이 넘었어도 내가 이리 쉽게 주저앉을 줄 몰랐소” 하며 지난 장날 병문안 가신 어머니에게 마른 눈물바람을 하신다.

학산양반 술 한잔 들어가면 “이 근동에서 내 살림도 작은 건 아니지”라는 은근한 자랑과 함께 고주알 미주알 옛날 고리짝일도 끄집어내서 사람 화 돋운다더니 자존심 강한 학산댁은 입도 꿈쩍 않고 수다도 떨 줄 모른 채 가슴속에 화를 채워넣고 비울 줄을 몰랐나 보다.

그 깡깡하던 양반은 나오지 않는 병명 받으러 전대병원으로 가고, 학산댁 혼자서는 도저히 농사 못 진다며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그 좋던 고추가 비까지 더해져 쉽게도 죽어간다. 그래도 학산댁은 가까이에 자식들을 두고 있어 좀 낫지 싶다.

요즘 비로 고추농사 엉망되고 가격도 형편없는지라 혼자 사는 할머니들 보기가 딱하다. 농촌에서 혼자 사는 노인이 지을 수 있는 농사는 고추다. 겨울부터 싹 틔워서 모종하고 정성으로 가꾼 고추모 밭으로 내가고 쓰러질까 줄치고, 거름 넣고, 풀 매며 고추 따고 말려 살림 보탤 재미로 반년 넘게 한몸같이 살아온 고추가 이번 비로 딸 것도 없거니와 따놓은 것도 못 쓰게 되자 울떡증 걸린 노인이 많단다. 동네 젊은사람들 보다 못해 “사람도 죽어나자빠지는데 그깟 고추 잊어버리라”고 해도 노인들 짠한 마음에 병이 날 지경이다. 촌동네에 사는 우리회원은 “오매 오매 우리 동네 할매들 불쌍해서 못 보겠다”며 고춧값이라도 올라야 한다고 난리다. 과연 고추 때문만일까? 어제까지 남의 일 다녀 한푼이라도 벌어보려고 했던 기력을 삽시간에 잡아먹은 건 ‘외로움’이 더 크기 때문이지 싶다.


일주일 동안 아이들을 서울 외갓집으로, 작은집으로 보낸 동안 어머니는 거의 울상이 되어 “돈이고 뭐고, 아그덜 없응께 딱 죽겄다. 노인들은 외로워서 죽는겨”라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넘기셨다.

촌동네 여성 노인들에게 불어닥친 울떡증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고민에, 걱정이 앞선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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