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거리며 하루 천릿길… 30년간 묵묵히 카트를 끌어온 홍익회 변준옥씨
그러니까 그게 원래는 장항선이었다. 전화로 듣기에는 분명히 장흥이었는데. 서울역 1번 홈에서 오전 10시40분에 출발하는 장항선. 솔직히 난 장흥이든 장항이든 아무 차이가 없었다. 나와 약속한 사람은 ‘기차를 타는 사람’이니 기차가 어디로 간들 어떠랴. 블라디보스토크행이나 러시아 평원을 가로질러 간다면 더 좋을 것이다. 기차여행은 오래 가야 제 맛이다. 코트 깃을 올리고 싸∼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머∼언 곳으로 가는 여행자. 차창 너머 보이는 강 언덕을 넘어오는 옛 추억. 그런 낭만이 도저히 없을 수 없는 게 기차여행 아닌가. 물론 “자, 오징어 있어요, 땅콩 있어요” 하는 꼬리 긴 발성에 퍼뜩 정신이 들 것이다. 사람은 낭만만으로 살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일깨우는 일성이다.
기차에서 내려도 땅이 흔들흔들
지난 30여년간 일해오며 승객들에게 기차여행의 낭만에 현실성을 부여해주고 있는 변준옥(57) 팀장을 만나러 플랫폼에 서 있는 열차로 다가섰다. 기관실 바로 옆이 물품 보관실이다. 열린 문 사이로 오징어 꾸러미가 보이고(역시!) 누군가의 손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변 팀장과 그의 동료 한 사람이 카트에 물품을 차곡차곡 꾸려넣고 있었다. 곧 영업에 나설 태세였다. 주스, 비스킷, 양갱(옛날에는 이걸 ‘요깡’이라고 했다), 신문, 커피. 난 아침부터 침을 삼키며 물었다. 저 삶은 달걀은 없나요? 의자 손잡이에 톡톡 두드려서 소금에 찍어먹는 달걀. 추억의 달걀. 그가 대답했다. “요새 찐 달걀은 팔지 않아요. 그 대신 구운 달걀이 있어요. 맥반석에서 구운 것이라 영양이 더 좋습니다.”
요즘 기차 안에서 파는 물건들은 종류가 무척 많아졌다. 옛날 열차 칸에서 팔던 상품과는 품질 면에서도 비교하기 어렵다. “그때야 뭐 이것저것 섞어서 팔았죠. 그런데 요즘은 그러면 안 사 먹으니까 다 고급품으로 바뀌었어요.” 기관실에서 나는 소음으로 겨우 말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탄 칸에는 의자가 하나도 없었다. 물건 상자가 여럿 쟁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예 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달리는 열차에서 인터뷰를 하다니, 웬지 영화 찍는 기분이 들어 어깨가 으쓱했다. 순간 열차가 덜컹하면서 몸이 기우뚱했다. 옆에 있는 상자를 의지 삼아 겨우 엉덩방아 찧는 창피를 면했다. 생각보다 균형잡기가 힘들었다. 변 팀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입니다. 처음엔 저도 많이 흔들렸지요. 일과를 마치면 기차에서 내렸는데도 그냥 땅이 흔들흔들거렸어요. 한 10년 지나고 몸에 익숙해졌지요.” 넘어지지 않는 비결은 흔들리는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는데 그게 말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다음 번에 넘어질 경우 무엇을 잡을까 주위를 재빨리 살펴두었다. 기차가 한강 다리를 지났다. 그가 오늘 종횡무진 누빌 열차는 무궁화호. 통로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입석 승객들이 서 있었다. 핸드백 하나 메고 지나가기에도 힘들 것 같은데 그 틈새를 변 팀장은 술술 통과했다. “우등열차 입석이 전체 좌석의 50%거든요. 근데 입석 타는 분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수가 있으니 어떤 칸에는 70% 이상이 서 있을 때도 있어요. 사실 맨몸으로 빠져나가기도 힘들죠. 그런데 이 카트가 있으면 길이 그냥 열려요.” 그가 대견스러운 듯 카트를 내려다본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복작거리는데 꼭 장사를 해야겠느냐고 핀잔을 주죠. 그러면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드려요.” 설명인즉, 그가 속해 일하는 철도 홍익회는 철도근무 중 공상을 입고 퇴직한 사람들을 위한 원호와 복지를 우선으로 하는 비영리단체이며 판매이익금 가운데 해마다 120억원이 원호기금으로 쓰인다는 것을 말이다. “승객들이 불편을 무릅쓰고 길을 열어주죠.” 하지만 그런 내용보다는 성실함에서 우러나오는 태도가 승객들을 감동시키는 힘인 듯했다. ‘새마을’보다는 ‘무궁화’가 많이 팔려
어른들의 다리 사이로 고사리 같은 손이 카트를 잡는다. “우리 꼬마 손님, 뭘 드실까요?” 그는 꼬마가 물건을 고르는 시간을 넉넉히 준다. 아이는 주스병을 뽑아들면서도 과자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지난해 언제는 하루 만에 300만원 이상을 팔았어요. 아마 우리 판매 역사상 최고기록이었죠.” 가장 많이 팔리는 품목은 음료수. 500원 남짓 하는 주스를 팔아 그 정도 실적이었으면 그의 발품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는 이제 정년을 4개월 앞두었다. 젊었을 적에는 인쇄업을 했다. 하다가 동업자의 배신으로 완전히 망해버렸다. 일을 찾다가 처음엔 철도청으로 들어왔다. 어느 세월이든 월급은 박봉인 모양. 철도청 월급쟁이보다는 성과급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열차 안에서 판매하는 영업사원 자리가 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운이 아주 좋으면 며칠 장사를 해서 남들 한달 월급을 손에 쥘 수 있는 경우도 가끔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네 삶에서 그런 날보다는 어려운 날이 더 많은 법. 그렇지만 그는 성공한 사람이다. 수많은 판매원들이 일주일을 못 견디고 나갔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자식들 모두 대학 교육시키고 마음도 풍족하게 살고 있다.
“요즘도 보면 다들 쉽게 직장을 바꾸죠. 제가 후배들한테 말해요. 좀 어렵다 싶어도 고비를 넘겨보자 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웬만한 어려움은 극복이 된다. 다른 데 가서 또 그만한 어려움 겪는 거하고 비교해봐라, 그 말이죠.”
영업사원들은 전 구간 열차를 순번제로 돌아가며 탄다. 한반도의 모든 노선을 한번 완전히 도는 데 총 49일이 걸린다. 예컨대 변 팀장의 경우 오늘은 장항선이면 내일은 경부선 모레는 전라선… 등 전국노선을 누빈다. 두 사람이 한팀을 이룬다. 열차시간표에 따라서 움직이니 밤낮 구별이 있을 수 없고, 귀가시간도 들쑥날쑥하다. “보통 시기의 업무량을 100으로 잡으면 휴가철이나 명절, 즉 대운송 특별기간은 170∼180 정도로 보면 됩니다. 이 시기에는 휴가는커녕 개인적인 이유로 시간을 낼 엄두를 못 내죠.” 평생 일해오면서 명절기간에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기회는 겨우 4번 정도. 퇴근 시간이나 개인 시간을 칼 같이 지키고 싶어하는 요즘 사람들이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직업이다. “뭐 그런 점이 있긴 하지만 전문대 출신도 많이 오고 4년제 대졸자도 있어요.” 열심히 한 만큼 벌이가 되는 성과급제도니 얼마를 버느냐는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열차노선이나 종류에 따라 매상 정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열차 승객들이 가장 많이 사먹나요? 새마을인가요?
“아니죠. 무궁화에서 많이 팔려요. 새마을 타는 승객 가운데는 아무래도 대한민국에서 내가 최고다 싶은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아요. 좀처럼 잘 안 사먹죠. 옆 사람이 미리 사면 그제서야 슬슬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고, 신세대들은 뭐 눈치 안 보고 먹긴 하지만요.” 그래서 새마을에는 그 긴 열차에 판매원이 달랑 혼자 일한다.
“통일호를 타면 아직 옛날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어요. 고향에서 된장찌개 먹는 그런 구수한 맛 같은 그런 분위기죠.”
어려운 시절의 살풍경들
그는 대한민국 열차문화의 산 증인답게 지난 세월을 말한다. “우리 70∼80년대가 다 그랬잖아요. 의식주 가운데 특히 ‘식’이 해결이 안 되던 시절이었잖아요. 야간열차에는 늘 술에 절어 통로에 쓰러져 자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어요. 차를 탄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통로마다 쓰레기들이 이렇게 더미로 쌓였죠. 지나가기가 힘들 지경이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외국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열차여행하는 외국인들이 늘었다. “영어로 물건을 팔아야 해요. ‘메이 아이 헬프 유’ 하면 아주 반가워해요. ‘하우 머치’ 하고 물으면 또 말하고, 이번 월드컵 기간에 손님 많았지요. 저희는 그 전에 몇 개월간 따로 영어회화 공부를 했죠.”
할머니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대학생 넷이서 의자 한개에 붙어 옹기종기 가고 있었다. 변 팀장의 카트를 멈추고 음료수를 골랐다. 그 장면을 찍으려고 사진기자가 촬영협조를 구했다. 발랄한 학생들은 즉시 대환영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입고 있는 옷 브랜드를 가려야 하느냐? 이 음료수 상표 보여도 되느냐? 하며 광고규제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었다. 친구한테 전화가 오니까 “야, 나 지금 촬영 중이야, 끊어” 하며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언젠가 열차 안에서 부딪친 한 판매원이 내게 말했다. “저희가요, 이렇게 서서 하루 천리를 가요. 그것도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요. 뒤로 갈 때는 더 힘들죠.” 변 팀장은 그런 어려움은 내색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묵묵히 기차를 ‘밟으며’ 살아왔다. 손님에게 커피캔을 건네며 짓는 변 팀장의 웃음이 듬직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달리는 우리 기차를 닮은 듯하다. 이번 추석 연휴에도 그는 가족과 지내는 대신, 평생 그래왔듯이 승객들에게 지역 특산품이나 찐 달걀, 아니 구운 달걀을 권하고 있을 것이다.
자유기고가

사진/ 입추의 여지없이 입석승객들이 들어찬 객실 통로. 변준옥씨는 카트를 밀고 술술 통과한다. (김종수 기자)
요즘 기차 안에서 파는 물건들은 종류가 무척 많아졌다. 옛날 열차 칸에서 팔던 상품과는 품질 면에서도 비교하기 어렵다. “그때야 뭐 이것저것 섞어서 팔았죠. 그런데 요즘은 그러면 안 사 먹으니까 다 고급품으로 바뀌었어요.” 기관실에서 나는 소음으로 겨우 말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탄 칸에는 의자가 하나도 없었다. 물건 상자가 여럿 쟁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예 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달리는 열차에서 인터뷰를 하다니, 웬지 영화 찍는 기분이 들어 어깨가 으쓱했다. 순간 열차가 덜컹하면서 몸이 기우뚱했다. 옆에 있는 상자를 의지 삼아 겨우 엉덩방아 찧는 창피를 면했다. 생각보다 균형잡기가 힘들었다. 변 팀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입니다. 처음엔 저도 많이 흔들렸지요. 일과를 마치면 기차에서 내렸는데도 그냥 땅이 흔들흔들거렸어요. 한 10년 지나고 몸에 익숙해졌지요.” 넘어지지 않는 비결은 흔들리는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는데 그게 말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다음 번에 넘어질 경우 무엇을 잡을까 주위를 재빨리 살펴두었다. 기차가 한강 다리를 지났다. 그가 오늘 종횡무진 누빌 열차는 무궁화호. 통로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입석 승객들이 서 있었다. 핸드백 하나 메고 지나가기에도 힘들 것 같은데 그 틈새를 변 팀장은 술술 통과했다. “우등열차 입석이 전체 좌석의 50%거든요. 근데 입석 타는 분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수가 있으니 어떤 칸에는 70% 이상이 서 있을 때도 있어요. 사실 맨몸으로 빠져나가기도 힘들죠. 그런데 이 카트가 있으면 길이 그냥 열려요.” 그가 대견스러운 듯 카트를 내려다본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복작거리는데 꼭 장사를 해야겠느냐고 핀잔을 주죠. 그러면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드려요.” 설명인즉, 그가 속해 일하는 철도 홍익회는 철도근무 중 공상을 입고 퇴직한 사람들을 위한 원호와 복지를 우선으로 하는 비영리단체이며 판매이익금 가운데 해마다 120억원이 원호기금으로 쓰인다는 것을 말이다. “승객들이 불편을 무릅쓰고 길을 열어주죠.” 하지만 그런 내용보다는 성실함에서 우러나오는 태도가 승객들을 감동시키는 힘인 듯했다. ‘새마을’보다는 ‘무궁화’가 많이 팔려

사진/ 서울역 플랫폼에서. 30년 경력의 변준옥 팀장은 대한민국 열차의 산 증인이다. (김종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