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지식권력으로 작동한 관상… 지식·과학 독점한 지식인의 행태 드러내
인사동이나 대학로 같은 곳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행인을 유혹하는 관상가들의 논리나 이야기가 서양에서 오래도록 학문으로 존재해왔다는 건 좀 낯설다. 그래서 제목을 보면 언뜻 번역서 같다. 속을 들여다보면,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서양사의 중심부에서 때론 정통 과학의 얼굴로, 때론 유사과학의 그림자로 이리저리 변신해온 관상학에 대한 파헤침이다. 역사학자 설혜심씨가 4년여에 걸쳐 방대한 국내외 자료를 뒤지며 연구를 시작한 첫 장면부터 이 책의 남다른 가치가 보인다. 설씨는 1997년 여름, 영국 도서관에서 자료조사를 하던 중 17세기 관상학서를 발견했다. “운세상담 아저씨들이 읽을 법한 그런 그림들이 두꺼운 종이와 금박 장정을 입힌 17세기 영국의 고서적 속에 가득히 그려져 있는” 책과의 마주침은 그야말로 ‘발견’이었다. 대출해주던 영국인 사서조차 자기 나라에 이런 책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서양 역사학에서 관상학을 통시적으로 개괄하는 책이 단 한권도 없다는 지은이의 말도 귀를 솔깃하게 한다.
계층 차별의 도구, 문명 침략의 이유
이 책이 미지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성과에 만족하는 건 아니다. 관상이란 관행이 서양 역사의 한복판에서 일종의 지식 권력으로 작동해온 흔적들을 면밀히 추적한다. 관상학의 기본은 외형적 생김새를 통해 한 사람의 성격, 체질, 나아가 운명을 추론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관상학자 조피로스는 소크라테스의 관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멍청할뿐더러 고루하다. 왜냐하면 빗장뼈에 움푹 팬 곳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를 밝힌다.” 이를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이 관상이 옳으며 자신은 단지 이성을 통해 악덕을 극복하는 법을 배웠다고 대꾸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철학자·의학자·신학자·예술가들이 관상을 그때그때의 패러다임으로 과학화하면서 관상학은 “보이는 육체를 인식하는 문화적 코드이자 규율”이 된다. 그 규율은 안으로는 자신들의 사회 내 계층 간의 차별을 만들어내고, 밖으로는 다른 문명권으로의 침략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동물과의 비교를 통해 관상의 기본을 세운 아리스토텔레스부터가 그렇다.
“암컷들이란 모두 진지하지 못하고, 힘이 없고, 쉽게 길들여지고, 좀더 쉽게 다룰 수 있다. 신체의 특징 때문에 위풍당당하기보다는 남을 즐겁게 해주기에 알맞다.” 남녀에 대한 구별짓기는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인종적으로 차별짓는 ‘원죄’를 낳는다. “아시아 지역 사람들은 기술이나 지성은 있으나 기운이 없다.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노예 상태가 되는 것이다.” 18세기 말 괴테의 절친한 친구인 스위스의 라바터는 그때까지의 과학적 성과를 응용해 <관상학>을 썼고, 그 책은 유럽 상류사회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며 희대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가 흑인의 선천적 열등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노동자와 기업가의 얼굴을 구별하는 관상학을 펼친 건 갑작스런 일이 아니다. 이처럼 관상학은 지식 권력층의 지원사격을 받아 불순한 기능을 발휘해왔다. 이 책의 결론 가운데 “관상학이 과학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결국 누가 관상학을 행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대목이 있다. 1530년 영국에서는 의학, 관상학 또는 수상학에 대해 ‘아는 체하는’ 사람을 처벌한다는 법령을 공표했다. 지배층을 형성하는 지식인들이 관상학을 행하는 건 처벌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떠돌아다니는 하층계급이 관상을 행하면 처벌받기 일쑤였다. 지식과 과학을 독점하려는 엘리트 지식인들의 일면이라고나 할까. 음침한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우기는 했어도 관상학을 유사과학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얼굴 생김새에 따라 승용차를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진다는 한국 경영학계의 한 논문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얼굴 유형이 사각형이면 스피드, 역삼각형이면 안전성, 원형은 외관, 광대뼈가 튀어나온 마름모형은 주행 연비를 가장 우선시하며 차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쿠엔틴 마시스. <늙은 여인>(투니스의 여왕)

사진/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 설혜심 지음, 한길사 펴냄. 2만2천원.
“암컷들이란 모두 진지하지 못하고, 힘이 없고, 쉽게 길들여지고, 좀더 쉽게 다룰 수 있다. 신체의 특징 때문에 위풍당당하기보다는 남을 즐겁게 해주기에 알맞다.” 남녀에 대한 구별짓기는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인종적으로 차별짓는 ‘원죄’를 낳는다. “아시아 지역 사람들은 기술이나 지성은 있으나 기운이 없다.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노예 상태가 되는 것이다.” 18세기 말 괴테의 절친한 친구인 스위스의 라바터는 그때까지의 과학적 성과를 응용해 <관상학>을 썼고, 그 책은 유럽 상류사회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며 희대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가 흑인의 선천적 열등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노동자와 기업가의 얼굴을 구별하는 관상학을 펼친 건 갑작스런 일이 아니다. 이처럼 관상학은 지식 권력층의 지원사격을 받아 불순한 기능을 발휘해왔다. 이 책의 결론 가운데 “관상학이 과학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결국 누가 관상학을 행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대목이 있다. 1530년 영국에서는 의학, 관상학 또는 수상학에 대해 ‘아는 체하는’ 사람을 처벌한다는 법령을 공표했다. 지배층을 형성하는 지식인들이 관상학을 행하는 건 처벌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떠돌아다니는 하층계급이 관상을 행하면 처벌받기 일쑤였다. 지식과 과학을 독점하려는 엘리트 지식인들의 일면이라고나 할까. 음침한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우기는 했어도 관상학을 유사과학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얼굴 생김새에 따라 승용차를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진다는 한국 경영학계의 한 논문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얼굴 유형이 사각형이면 스피드, 역삼각형이면 안전성, 원형은 외관, 광대뼈가 튀어나온 마름모형은 주행 연비를 가장 우선시하며 차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