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골한 고추들의 아우성
등록 : 2002-08-21 00:00 수정 :
먹장구름 걷어낸 하늘은 볕을 내어주고 있다. 그래도 변덕스런 날씨가 언제 비를 뿌릴지 몰라 오늘도 빨래를 내어 널지 못한다.
잠시 잠깐이라도 비가 멈추면 따놓은 고추 길가에 펼치기 바쁘고 높(일꾼) 얻어 한 고랑의 고추라도 더 따려고 요즘 농민들 ‘하늘 눈치’ 보기에 바쁘다. 그제 아침 잠깐 볕에 속아 새벽부터 마을회관 앞 공터에 앞다투어 한가득 널어놓았던 고추를 한 시간도 못 가 뿌리는 비에 다시 거두느라 이집 저집에서 뛰어나오고 비설거지로 소란스러웠다. 비닐하우스가 부족한 수영이 할아버지는 비닐만 덮은 채 고스란히 비에 내맡긴다.
우리집도 지난 휴가 때 큰형님네와 시동생 식구들이 한바탕 따놓은 고추가 아직도 하우스에서 골골거리며 썩어가고 있다. 아버님은 때아닌 장마비가 시작된 지 한 며칠 고추밭을 들락거리며 하나라도 성하게 달려 있을 때 따려고 애쓰시더니 일주일을 넘기자 포기해버린다.
빨간 고추들이 비에 녹아내려져 꼬투리에서 쑥쑥 빠져 밭고랑을 빨갛게 물들인다. 그런 놈은 따도 곯아 희나리(하품고추)로나 팔아먹을 수 있다. 고추를 기계에 쪄서 말리는 ‘화건’이라면 걱정이 덜할 텐데 볕에만 의지해 말리는 ‘태양초’다 보니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일 뿐이다.
초벌·재벌 고추 다 합쳐도 80근밖에 말리지 못했는데 완도 사는 외숙모의 170근 주문에 “은제나 말려서 줄까이?”라며 어머니는 하늘 한번 내다보시고 골은 고추 골라내러 하우스로 내려가신다.
애기 팔뚝만하던 고추가 주렁주렁 달리던 매산댁네 고추밭은 비로 거름독 오른 고추나무들이 죽어만 간다. 매산양반도 “보기 사나운께 다 죽어나 버렸으면 쓰겄다”며 동네사람 아무라도 따다 먹으라고 고추 포기를 선언했다는 소문이다.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영광 고추시장은 알아준다. 이맘때면 광주 등지에서 먹을 고추 사러 오는 아줌마, 타지 상인들과 한푼이라도 더 받아보려는 농민들의 승강이로 북적이는데 올해는 고추값이 재미없어서 고추장에 대한 기대마저 줄었다.
서울에선 채소값이 폭등이라는데 고추값은 600g 한근에 상품이 2500∼2800원선에서 맴돌더니 16일장엔 농가에 말린 고추가 워낙 없어서인지 3200원까지 갔단다. 아마 비 피해 없었으면 2천원대에서 딸삭도(꼼짝도) 안 했을 텐데 제일 값을 쳐주는 세벌·네벌 고추가 없다고 어머님은 은근히 고추값 상승을 기대해본다.
그러나 고추 도매상 하는 후배는 일시적 현상으로 보고 낼 고추 있으면 빨리 내란다. 중국고추와 재고물량, 면적확대로 날씨만 좋으면 도로아미타불 된다고….
가격 올라봤자 그림의 떡이다. 비로 손해본 물량에 대한 계산은 빼버리고 우선 얼마 올랐다는 데 만족한 농민식 계산은 ‘고추 팔아 한 계절을 나고 싶은’ 농민들의 심리전처럼 느껴진다.
이맘때면 고추장에 가자고 새벽녘에 어머니는 조용히 나를 깨우시는데 올 들어서는 한번도 새벽 고추장에 못 나가봤다. 지난 장날 경운기에 잔뜩 싣고 갔던 아래뜰 아저씨도 털털거리며 되돌아오고 돈 급한 양동 양반은 썩 좋은 물건이 아니라 2500원에 줘버리고 왔다면서도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막소주 한잔 들이켜신다.
오늘 아침 볕에 마을회관 앞은 골골한 고추들에게 점령당했다. 하늘 눈치 보느라 고추 너는 투박한 손들은 허둥대기만 한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