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청춘은 가도 포로는 싫어!

423
등록 : 2002-08-21 00:00 수정 :

크게 작게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휴 그랜트가 반가운 독신남들의 수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8월23일 개봉)의 주인공 휴 그랜트는 38살의 나이에도 혼자서 즐겁게 산다. 자신만의 삶의 공간을 지중해 휴양지 ‘이비자’ 섬으로 여기며 만족스러워한다. 당연히 결혼이나 자식을 거부한다. 유일한 불편함이라면 끊임없이 ‘섹스 파트너’를 찾아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를 보고 세명의 독신남이 수다를 떨었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의 김지운 감독(38), 황신혜밴드의 멤버였고 지금은 월간 음악잡지 < MDM >을 발행하는 조윤석(37)씨, <한겨레21>의 이성욱(34) 기자. 김 감독은 완벽에 가까운 이비자 섬이었고, 동료들의 요구로 비자발적으로 참여한 이 기자는 잡초로 무성한 무인도였으며, 조씨는 그 중간 어디쯤이었다.

혼자 사는 이유, 편하니까

사진/ 조윤석ㅣ음악잡지 < MDM > 발행인·전 황신혜밴드
조윤석(이하 조): 영화가 딱 내 이야기네. 10년 전쯤 결혼한 적이 있어요. 3년 만에 헤어졌지만. 결혼을 다시 한다? 잘 모르겠어요. 모든 시간을 일에 쏟고 있는 처지거든요. 내 명함에 지금 홍익대 앞에서 하고 있는 온갖 잡다한 일을 주욱 적어놨는데, 한번은 단골 밥집 아줌마가 자꾸 중신을 서겠다며 그 명함을 가져갔어요. 그런데 반응이 당사자는 만나보고 싶다고 하는데도 부모님이 절대 안 된다며 막았대요. 가족을 위하기는커녕 밖으로만 나돌아서 부인 고생시키기 딱 알맞다, 이런 거겠죠 뭐.


이성욱(이하 이): 저는 굳이 결혼을 거부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공포감 같은 게 있어요. 지난해에 순식간에 연애를 시작해서 번개치듯 결혼까지 갈 뻔했는데, 어느 순간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포기해야 할 게 너무 많은 건 아닐까, 영화의 대사처럼 ‘인간은 결국 섬인데’ 이런 생각도 들고. 결국 인연을 깨는 계기가 됐어요. 그때 알았죠. 내가 결혼에 대한 공포감이 있구나 하고.

김지운(이하 김): 휴 그랜트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혼자 사는 것 같지는 않아요.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나 혼자 사는데 누굴 챙겨주느냐는 거였어요. 그래서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데 나도 좀 그런 편이죠.

이: 김 감독처럼 이른바 결혼 적령기가 지났음에도 어떤 강박을 느끼지 않는 게 흔한 건 아닐 텐데요.

김: 제가 혼자 사는 이유는 단순해요. 혼자 있는 게 편하니까. 결혼에 대한 공포나 책임감?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결혼하면 어떤 사람이 옆에 있을 테니까 신경써야 하고 바라봐야 하고. 조윤석씨는 지금이 더 편하지 않나요?

조: 진짜 편해요. 결혼했을 때도 편했는데 지금이 더 편하죠. 편한 것만 따지면. 결혼하면 할 일이 배로 늘어나잖아요.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도 없고.

이: 휴 그랜트의 면모 중에서 저랑도 비슷한 게 몇가지 있죠. 무엇보다 아이를 멀리하는 것. 결혼하면 아이를 낳느냐 마느냐를 놓고 옛 여자친구와 심하게 갈등을 겪기도 했거든요. 그럼에도 섹스는 지속돼야 한다는 이기적 심리도 나와 닮았어요.

조: 아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결혼 생활할 때는 미루다가 낳지 않았어요. 애가 무섭죠. 나와 같은 괴물을 하나 더 세상에 내놓는 게 끔찍하고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기대도 많을 텐데, 얼마나 신경쓰이겠어요.

김: 옛날부터 딸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나처럼 결혼 생각이 없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들을 갖고 싶어했죠. 그래서 애를 낳되 아들이면 네가 갖고 딸이면 내가 갖는다,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한 적도 있는데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요.

이: 어찌 보면 가족을 꾸리는 게 더 이기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좀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가족제도가 없어지지 않는 한 사유재산제는 해체될 수 없을 거고. 지금 받고 있는 박봉의 월급은 나 혼자 적당히 살아가기에는 큰 부담이 없지만 식구 하나 더 생기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죠. 가족을 만들면 내 것에 더 집착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수입을 올릴 궁리를 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조: 이 사회는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애를 인질처럼 옆에 두고 뼈빠지게 일해서 바치게 하는 시스템이니까. 선배들 보면 공립학교 보내면 되지 어쩌고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애를 낳으면 스스로가 좋아서 눈물겹게 희생을 하거든요.

눈물겨운 희생은 아무나 하나

사진/ 김지운ㅣ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
김: 휴 그랜트가 사는 게 영화감독을 하기 전에 했던 10년간의 백수생활 모습이랑 비슷해요. 그때도 혼자가 불편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혼자 집에 있으면 사람이 건조해지는 것 같기는 해요.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인상적인 장면을 봤을 때, 누구와 함께 나누면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결혼이라는 게 친구처럼 시작해도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에게 아내로, 남편으로 요구하게 하는 게 생기잖아요. 저는 결혼에 대한 공포라기보다 의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옴니버스 영화 <쓰리>(8월23일 개봉)에서 김 감독이 만든 <메모리즈>도 안락한 가정에 대한 꿈이 얼마나 공포스런 현실로 바뀔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요?

김: 행복을 추구하는 욕망에 깃든 허위의식이라고 할까. 신도시의 모델하우스를 보러간 적이 있어요. 문 열고 들어서면 마치 디즈니랜드가 펼쳐지는 것같이 아기자기하고 예쁜 모델하우스였는데, 신혼부부가 손잡고 드나드는 걸 보면서 ‘저들이 저것을 성취하기 위해 얼마나 끔찍한 현실을 감내해야 할까, 그러면서 둘이 균열하고 망가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지요.

이: 결혼을 하게 된다면 서로의 욕망에 대해서 인정하는 관계를 맺고 싶어요. 권지예씨 소설 <꿈꾸는 마리오네뜨>에 등장하는 한 부부는 각자 연애를 하면서도 상대방이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해요. 그러다가 그냥 상대방을 인정하고 가는 거죠. 그러나 우리 시스템에서 이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죠.

조: 로버트 앨트먼의 <숏컷>이란 영화에서 한 의사가 아내가 부정하지 않았을까, 하고 무척 오랜 시간 의심하며 괴로워하는 게 나오잖아요. 속만 끓이고 있다가 수년 뒤에 아주 즉흥적으로 그 남자랑 잤지, 하고 물었더니 아내가 태연하게 “잤다 어쩔래” 하고 나오니까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어요. 인상적이었죠.

이: 그렇지만 막상 닥치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해요. 예전에 여자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어떤 남자가 불쑥 찾아온 거예요. 정말 기가 막혔지요. 그때는 황당함과 배신감으로 뛰쳐나갔는데, 한참 뒤에 생각해보니까 오히려 내가 성숙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조: 말이 그렇지 피가 거꾸로 확 돌죠? 사는 게 눈물, 콧물 쏟고 악다구니치고 그래야 하니, 참.

짚신 찾아 삼만리, 어디에 있을까

사진/ <한겨레21> 문화팀장
김: 난 다른 사람들과 다투는 일이 없어요. 서로 다투고 개입하면서 끈적해지는 관계보다는 건조한 불편함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어릴 때부터 경제적으로 세상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한쪽 손으로 저걸 집으려면 이걸 버려야 한다는 걸 일찍 깨달은 거죠.

이: 저는 아직 결혼을 포기한 건 아니에요. 딸려오는 관계에 대한 부담은 나뿐 아니라 상대방도 마찬가지잖아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과 만나서 적절히 제어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어요. 판타지일 수는 있겠지만.

김: 저는 백수 때 오히려 화려한 애정행각을 벌였던 것 같아요. 감독 하면서 안 좋은 게 어느 정도 공적인 위치여서 그런 부분이 없어지더라고요. 백수 생활하면서 시간을 어떻게 죽이느냐에 관해서는 경지에 올라섰기 때문에 집에 있으면 정말 심심하지가 않아요. 휴처럼 모든 게 집에 있으니까.

이: 외부와 단절한 채 얼마까지 집에 있어봤어요?

김: 심할 때는 한달 가까이? 오랜만에 밖에 나가면 거리가 신선하게 느껴지는데 외로움이나 지루함 같은 걸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게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저 역시 가끔 주위에서 강요를 하죠. 지금은 편할지 모르지만 나이 들어서 혼자 있는 걸 생각해보라고. 그렇지만 나이 들어서 가족이 아니라도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조: 김 감독의 삶은 완벽한 판타지이자 드림이군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어요. 친한 외국인 중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영어 선생 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친구가 있어요. 멋진 남자라 바람둥이로 원없이 떠돌며 지냈고. 그런데 어느 날 술을 좀 많이 마시더니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계속 떠드는데 그 눈빛이 너무 공허했어요. 결국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찾게 되는 게 아닐까요.

이: 독신에 대한 환상도 있는 것 같아요. 난 이걸 포기할까, 그냥 갈까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는데, 주변에선 “섹스 파트너 있지?”, “얼마나 좋아, 나도 결혼만 안 했다면…”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분명 쓸쓸함이라든가 공허함 같은 게 있지요. 두 분은 크리스마스 같은 때는 어떻게 지내나요?

조: 문화방송과 함께 보내죠, 뭐. (웃음)

주스를 마실까, 커피를 마실까

이: 크리스마스야 이렇게 저렇게 모여서 놀 경우의 수가 많지만, 제게 문제는 명절 연휴예요. 그때는 모두 제 가족을 찾아가니까 진짜 놀 사람이 없거든. 지난 설 연휴 때 결심했잖아요. 명절 때만큼은 한국에 있지 않겠다고.

김: 혼자 살 수 있는 힘은 결혼이나 가족보다 끊임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놀거리를 만드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이: 애인이 있는 이성친구 중에 자기도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 그냥 평생 술이나 같이 마시며 지내자고 하는 이가 있는데, 이야기하다 보면 꽤 깊은 교감을 느끼거든요. 이런 친구가 좀더 많이 있으면 결혼하지 않고도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아요.

조: 그래서 친구들이 중요한 거야. 일종의 사회 안전망인 셈이죠.

김: 결국 주스를 마실까, 커피를 마실까 하는 선택상황과 비슷한 것 아닐까요? 혼자 살 수 있으면 사람들이 다 혼자 살 수도 있을 거예요.

정리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jongsoo@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