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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치는 오락, 즐겨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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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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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전단

선거판에서 재미를 뽐낸 이색 정당들… 일본의 UFO당에서 스포츠 평화당까지

사진/ 발명정치의 선거전단 삽화.
8·8 재보선이 근래 들어 최저라는 30% 미만의 투표율과 함께 끝나고 바야흐로 연말 대선이 넉달 남짓 남은 상황이다. 여기에 민주당의 신당 창당과 정몽준 의원의 대선 출마 여부까지 가세하여 정국은 숨막힐 것 같은 긴장감이 돌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은 편치 않다. 누가 되고 안 되느냐에 따라 한 개인의 삶과 그가 속한 지역과 사회공동체의 명암이 교차하게 됨을 서로들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정치라는 것은 참으로 심각하다.

기상천외의 주장 내세운 정치신인들


얼마 전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10년 전 도쿄에 머물 당시 수집했던 선거전단이 눈에 띄었다. 1992년 7월26일 일본에서는 참의원 의석의 절반을 새로 뽑는 선거가 있었는데, 결과는 집권 자민당의 대승리였다. 그때는 요즘과 달리 경제사정이 그럭저럭 괜찮았고, 자민당 실권으로 이어질 장래 정계개편의 불씨도 아직 미약했다. 쟁점이었다면 여당이 선거 전에 강행한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 정도였다.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골자로 한 그 법안에 사회당을 비롯한 야당의 반발이 심했고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도 찬반 논란이 분분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는 특이한 현상이 하나 있었다.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군소 정당이 난립했다는 것인데 무려 20여개 신생정당이 등장했다. 지역구와 함께 비례대표도 뽑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득표만 해도 의석을 얻을 가능성이 있어, 기상천외의 주장을 들고 나온 정치신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사람들을 놀래기도 하고 즐겁게도 했다.

가장 시선을 끈 이는 ‘발명정치’의 대표 나카마쓰였는데, 그는 컴퓨터 플로피 디스켓의 발명자였다. ‘최신형 정치를 발명하겠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그가 발명한 특수신발을 신고 퉁퉁 퉁기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했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일종의 사회적 발명품이었다고 주장하며, 정치를 깨끗이 하고 경제를 좋게 하는 발명을 약속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특허발명품 ‘선거를 이기는 발명’을 비장의 무기로 활용했음에도 선거 승리까지는 발명하지 못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UFO당’도 화젯거리였다. 소련 우주선이 화성에서 촬영했다는 미확인비행물체(UFO) 사진과 레이건 대통령이 유엔에서 행한 연설 중 외계인에 관한 언급 일부를 선거전단에 전재하면서 우주화 시대의 정치를 역설했다. 20세기 정치사는 공산당에서 시작하여 녹색당으로 끝났다. 인류의 우주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리라 예상되는 21세기에는 우주당의 등장이 필연인가….

정치도 발명… 노령사회의 풍경

사진/ 노인복지당과 연금당의 상징. 노인문제를 '정책'이나 '문화'의 관점에서 보는 입장과, '경제'적인 것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립함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령화 시대를 알리는 인구조사를 발표했지만 일본은 사회 전체의 노령화가 이미 시작되어 노인정당도 등장했다. 노인이 되면 경제활동에서 멀어짐에 따라 그간의 저축이나 연금에 의존해서 살게 마련이다. ‘연금당’은 이런 현실을 반영했다. 현재의 연금으로는 노인들이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연금을 배로 증액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연금 재원을 공개하여 그 운영을 엄격히 관리하고, 연금개시 연령이 높아지는 것을 반대했다. 또 다른 노인정당은 ‘노인복지당’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의료계에서 아직까지 논란거리인 편안히 죽을 권리, 즉 존엄사의 인정을 요구했다. “비인간적인 수명연장 치료를 바꾸고, 환자의 자주적 의사를 존중하고 인격의 존엄을 인정하여 편안히 영면할 수 있는 권리를! 그리고 모든 의료에 호스피스의 마음을!”

현대 민주주의는 의회제도를 기반으로 하며,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고 대표할 이들을 민주적 선거를 통하여 선출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뽑힌 이들의 면면을 보면 어떻게 과연 이들이 국민의 대표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일반 국민과는 너무 다른 성장배경, 학벌과 인맥, 재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귀족원’ 선거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사진/ 전 일본 드라이버 클럽의 선거전단 삽화. 기둥 위에 올려진 자동차는,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맹수를 피해 나무 위로 도망간 연약한 동물처럼 보인다. 현대사회에서 자동차는 확대된 우리의 몸이며, 국가권력의 통제는 이를 좇아 확대된다.
이러한 회의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자 정당을 만들었다. 자가 운전자의 권익보호를 내세운 ‘전 일본 드라이버 클럽’과 ‘모터 신당’도 그런 일종이었다. 일반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인 자동차세와 고속도로 요금문제를 제기하여 폐지와 개선을 강령으로 삼았다. 전 일본 드라이버 클럽은 누구나 귀찮다고 여기는 차량검사제도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 책임제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당명만 보아도 무엇을 주장하는지 짐작게 하는 ‘중소기업 생활당’과 자유직업인을 위한다는 ‘프리워크 유니언’도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언제부터인가 카드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 그러나 간단하고 편리한 카드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이 많다. ‘자기 파산자’도 해마다 증가추세. 현재 개인차금 비율이 세계 제일이며, 파산 예비군은 400만명이라고 한다. 이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카드 생활에서 벗어날 것을 권고한다”는 ‘평민당’이라는 곳의 전단은 중산층의 통렬한 자아비판이란 생각이 든다.

양자택일의 고민 해소할 대안 없나

10년이 지난 탓에 종이가 노랗게 바랜 일본의 선거전단을 들춰보면서 한참 재미있었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 선거가 끝난 뒤 한국에 잠깐 들렀는데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의 ‘스포츠 평화당’ 이야기 등을 나누면서 뒤집어져라 웃었기 때문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인 보수 양당제는 너무나도 권태로운 정치체제란 생각이 든다. 흔히 희망의 상징이라 말하는 무지개도 일곱 색깔이 아니던가. 물론 대통령은 한명을 뽑아야겠지만, 달이 둘인 행성에서는 통치자인 왕도 둘이라는 어느 공상과학(SF) 소설의 구절이 떠오르면서 그것도 일종의 고정관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앞으로 거리마다 집집마다 선거전단이 뿌려질 것이다.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그것을 집어들고 조국의 운명에 관해 고민하겠지만 시간이 지나 종이가 바삭바삭해진 걸 다시 발견하고 나서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얘네들 웃기고 있잖아.”

도상학 연구가 alha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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