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423
등록 : 2002-08-21 00:00 수정 :

크게 작게

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예전의 초등학교 책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동네 놀이터에 몇명의 어린애들이 모여든다. 그 가운데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한다. 애들은 그들끼리 여러 의견을 내놓는다. 호랑이·귀신·도깨비·공동묘지 등등. 그러나 모두에게 만족스런 답은 찾지 못한다. 그래서 지나가는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들로부터도 흡족한 대답을 듣지 못한다. 해가 질 무렵 한 노인이 나타난다. 애들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노인에게 묻는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망각”이라고 말한다. “젊은이도 늙으면 모든 것을 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사랑하는 마음조차 잊힌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은 망각이라고. 이윽고 땅거미가 지면서 노인은 갈 길을 간다. 애들도 뿔뿔이 흩어진다. 마치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기라도 하는 양 놀이터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어찌 보면 초등학생에게는 부담스런 내용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린 마음에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주었다는 점에서는 아주 적절한 얘기라고 여겨진다.

이어령씨는 ‘언어의 마술사’라고 할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나다. 이를 토대로 평론가·언론인·교수·장관 등을 거치면서 우리 문화계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의 글쓰기는 방대한 자료모음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오늘날 누구나 쉽게 떠올리듯이 이러한 자료모음에는 컴퓨터가 제격이다. 실제로 그는 문인으로는 드물게 일찍 컴퓨터를 익혔다. 그리하여 컴퓨터와 두뇌라는 두 거대한 기억공간을 맘껏 활용했다. 이후 컴퓨터는 계속 발전했다. 그러나 두뇌는 반대로 서서히 시들어갔다. 어언간 그도 정년 퇴임을 맞았다. 그즈음 고백하기를 나이가 듦에 따라 기억의 소멸이 느껴져 두렵다고. 어쨌든 이상의 얘기는 정상적 노화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찰턴 헤스턴은 <벤허> <십계> 등으로 이름을 떨친 미국의 명배우다. 올해로 78살. 그런 그가 최근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녹화 테이프를 통해 자신의 근황을 공개했다. “언제 말할 수 없게 될지 몰라 미리 인사드린다. 변함 없이 사랑하되 동정하지는 말아달라”고 했다. 그는 배우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절친하다. 레이건도 1994년 같은 병에 걸렸음을 공표했다. 그 뒤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91살인 그는 마침내 50여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낸시 여사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가까운 한 사람은 “그녀와 함께한 대부분의 세월은 백지상태가 됐다”고 전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현란한 기억으로 가득 찬 두뇌가 본래의 공백으로 돌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장수하기를 바란다. 다만 단순 장수가 아니라 ‘무병 장수’를 원한다. 이때의 무병은 정신적 및 육체적인 건강을 뜻한다. 그런데 알츠하이머병은 두 가지를 모두 좀먹는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모른다. 뚜렷한 치료법도 없다. 이 병에 걸리면 뇌의 조직이 줄어든다. 그에 따라 기억도 비어간다. 끝내 기억의 소멸 자체를 모르게 되는 것은 그나마 축복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인 자의식을 죽는 순간까지 잃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최근 미국의 한인 학자가 알츠하이머병과 관련된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생물학의 시대로 예견되는 21세기에는 그에 힘입어 병적인 노화의 두려움 하나가 깨끗이 걷히기를 고대한다.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