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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역시,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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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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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로 발매한 ‘신중현 작품집’에서 음반 판권에 얽힌 일방의 횡포 극복

사진/ 신중현 작품집 시리즈로 새롭게 발매된 <이정화>(왼쪽)와 <김정미>.
요즘 영화와 방송에 삽입되어 지각 히트하고 있는 델리 스파이스의 <챠우챠우>(김민규 작사·작곡)라는 곡이 있다. 델리 스파이스가 이 곡을 자신들의 음반에 재수록해서 판매할 수 있을까. 답은 ‘불가’다.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다. 원곡이 수록된 음반을 발매한 음반사로부터 판권을 사오는 방법이다. 문제는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음반 판권은 누구를 위하나

그렇다면 이 곡을 다시 녹음해 자신의 새 음반에 수록할 수 있을까. 그것도 ‘불가’다. 계약상 그렇다. ‘가수나 밴드가 다른 음반사로 이적한 뒤 똑같은 곡을 다시 녹음해 음반을 발매하면 기존에 만든 음반은 안 팔린다’는 음반사의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일정한 시한도 없이 자기가 만든 곡을 ‘영원히’ 녹음할 수 없다는 점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상한 것 또 하나. 본인 외에 다른 사람이 녹음하는 것, 이른바 ‘리메이크’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물론 이때도 판권자가 아니라 저작권자에게 일정한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만 리메이크 대상은 이미 검증된 곡이므로 대부분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편이다. 요즘 <챠우챠우>가 이준우라는 가수의 노래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런 절차를 밟았기 때문이다.

원곡의 판권을 소유한 음반사는 어떨까. 음반사는 마음대로 원곡(오리지널 레코딩)을 재활용할 수 있다. 원곡을 녹음한 주인들에게 허락받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베스트 음반’들은 이렇게 나온다. 조용필이나 정태춘 같은 거물급 음악인들조차 이런 일을 많이 당해 급기야 법정에서 시비를 가려야 했다. 결과는? 간단히 말하면, 다시 레코딩하는 것만 허용되었다. 법정 공방에 소요되는 물질적·정신적 비용을 고려하면 미미한 성과다.

‘한국 록의 대부’라고 칭송받는 신중현은 어떤가? 큰 차이가 없다. 몇달 전 이라는 이름의 네장짜리 CD가 나왔다. 1974∼82년에 신중현이 한 음반사를 통해 발매한 음반들을 모아 재발매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음반 역시 원곡의 주인인 신중현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발매된 것이 아니다. 음반 판매를 통한 수입은? 이런 ‘돈 문제’는 본인들에게 물어보고 확인하기가 참 곤란하다. 단, 이제까지의 관행이나 위 음반사의 최근 형편으로 보나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졌을 것 같지는 않다.

록의 대부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

그런데 최근 ‘신중현 작품집’이라는 시리즈로 발매된 두종의 음반은 무언가 다르다. 음반 이름을 정확히 말하면 <이정화- 싫어·봄비·꽃잎·마음>과 <김정미- 바람>이다. 음반의 주인공은 이정화와 김정미지만, 작곡·편곡·연주·제작 등을 신중현이 모두 담당했으므로 ‘신중현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정화와 김정미가 누구냐?”라고 물어보는 사람에게는 ‘한국 대중음악의 단절된 역사’에 대해 장광설을 떨어야 할 테니 생략한다. 그냥 “사서 들어봐라. 돈이 아깝지 않다”라고 말하고자 한다. 이런 경우는 ‘백문이 불여일견’이 아니라 ‘백견이 불여일문’이다. 그저 ‘한국적’이면서도 ‘사이키델릭’하고, ‘육감적’이면서도 ‘영적’(靈的)인 음악이라는 말로 음반평을 대신하겠다.

일단 케이스가 특이하다. ‘주얼 케이스’라고 부르는 CD의 겉포장이 아니라 LP(정확히 말하면 ‘비닐 레코드’)를 CD 크기와 비슷하게 축소한 모양이다. 표지(커버)를 만든 사람이 많은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오래된 사진을 스캔해서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해 색상과 대비 등을 섬세하게 조정하는 등 때 빼고 광 내서 보는 듯한 기분이다. 직접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일이 얼마나 수고로운지 알 것이다. 따라서 표지는 만족스럽다. 단, 디스크를 싸는 종이 포장지의 사이즈가 조금 커서 넣다 빼는 데 불편한 게 흠이다. 다른 음반들이 계속 발매된다고 하니, 다음에는 이런 점까지도 세심하게 신경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 7월 1970년대 ‘그룹 사운드’인 피닉스(Phonix)의 음반이 이런 표지로 재발매되었는데, 하나의 좋은 관습으로 정착하기를 바란다.

이상은 제품의 ‘포장’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내용물은? 여기서 일단 한숨을 내쉬어야 한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명반’의 칭호를 듣는 음반들 가운데 마스터 테이프가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왜? ‘물자가 귀한’ 시절이라서 “김추자 것 녹음되어 있는 테이프 위에 박인수 것 덧씌워서 녹음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아 있는 LP를 이용해 복각을 해야 했는데 그게 사람 잡는 작업이다. 상태가 양호한(이른바 ‘민트’) LP도 몇장밖에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의 LP는 마스터 테이프의 주행속도(이른바 r.p.m.)를 일정하게 잡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번 CD의 경우 원판 LP보다 주행속도가 조금 느린데 이것도 ‘대부’ 나름의 판단인 모양이다. 원판 그대로 복원되기를 원한 사람의 한명으로서는 조금 아쉬운 대목이지만 대부의 판단에 맡겨둘 뿐이다.

부클릿(이른바 ‘속지’)은? 이건 아쉽다. 먼저 음반 해설이 신중현 본인과 기획자의 짧은 글밖에 없다. 강헌이나 신현준한테 원고료 10만원 정도 주고 ‘라이너 노트’를 실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다. 이건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폰트나 디자인 등이 요즘 젊은 감각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은 문제다. 게다가 음반에 관한 정보가 충실하지 않다. 스튜디오는 어디였고, 엔지니어는 누구였는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없다. 악기 연주자의 경우, 이정화 음반에는 밴드 멤버(덩키스)가 적혀 있지만, 김정미 음반에는 ‘보컬 김정미, 세션 신중현, 작사·작곡·편곡 신중현’이 정보의 전부다. 이런 점도 ‘다음부터는…’이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이다.

언제까지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것인가

사진/ 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신중현씨. 그는 '신중현 작품집'을 발매하여 기존의 음반 판권 관행을 거슬렀다.
그런데 정작 궁금한 건 이런 것이다. 이 음반은 앞서 언급한 판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혹시 ‘한국 음반업계의 전설’인 킹박이라는 사람을 아는가. 박성배라는 본명보다 ‘킹박’이나 ‘박사장’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신중현 사단’ 대부분의 음반들은 물론 양희은의 대부분의 음반과 조용필의 데뷔 음반도 그의 수완으로 세상의 빛을 보았다. 킹·유니버어살·신향·대지 등의 이름을 단 레이블들은 모두 그가 개입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정화와 김정미의 음반도 킹박이 판권을 소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킹박은 음악인에게 “돈을 준 일이 거의 없는” 것과 “원작자 허락 없이 음반을 무단 발매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본인의 주장으로는 벌어들인 돈을 경기도 문산에 스튜디오를 짓는 데 전부 쏟아부었다고 한다(이 스튜디오는 현재 신나라 레코드가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병으로 쓰러진 뒤 근황을 아는 사람이 없고 소문만 간간이 들려온다. ‘돈 문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한국 음반산업의 역사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인데, 불우한 노년을 보내는 것 같아 애석하다.

그래서 ‘대부’에게 판권 문제를 슬쩍 물었더니 “뭐 돈을 받은 게 있어야지. 그냥 냈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역시 한국은 일단 저지른 다음 뒤에 수습하는 게 빠르지, 공식적 경로를 정식으로 밟아 추진하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다. 그러니 역시 대부는 대부다. 대부님, 밀어붙이세요, 후배들도 뒤따르게….

P.S.

문정동에 있는 스튜디오 ‘우드스톡’을 찾아가 보니 신중현은 자신의 곡들을 다시 녹음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음반은 신중현이 직접 설립한 신중현 M&C(Music & Creation)를 통해 다음 달쯤 대중 앞에 선보일 예정이다. “다시 녹음하는 작업도 좋지만, 더 맨(The Man)과 엽전들 시절 녹음한 것들 가운데 소문만 무성하고 구하기 힘든 23분 길이의 <거짓말이야>와 <선녀>, 11분 길이의 <안개 속의 여인>, 10분 길이의 <아름다운 강산> 등이 재발매되면 정말 좋겠습니다”라고 내가 말했더니, 신중현은 “어, 그런 거 있는 것 어떻게 알았어. 나도 그런 걸 하고 싶지”라고 말했다. 왜 못하고 있을까. 어쨌거나 나는 새 음반에 들어갈 음악들 못지않게 ‘옛날’ 음악들을 정말 들어보고 싶다.

신현준/ 한국대중음악연구가·http://homey.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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