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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테러리스트도, 도둑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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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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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 흥행 위협하는 <공동경비구역 JAS>의 순항… 인간의 얼굴을 한 북한군을 애도하다

(사진/<쉬리>의 기록을 깰 수 있을까.<공동경비구역JSA>는 개봉 2주 만에 서울 관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한국영화의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추석 연휴와 함께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두주 만에 서울 관객 100만을 돌파했다.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인 <쉬리>가 개봉 22일 만에 100만명을 동원한 것에 비한다면 놀라운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의 기록만 보면 서울 272만명, 전국 600만명을 동원한 <쉬리>의 기록을 깰 수 있다는 예측도 가능하다. 개봉 첫 주말 이 영화를 보고 간 서울 관객은 17만명. 블록버스터라고 일컫는 대형영화들이 보통 첫주에 치고 빠지는 데 비해 둘째 주말 22만3천명으로 관객 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JSA> 흥행의 비상한 조짐을 보여준다. 두주 동안 세개의 스크린에서 이 영화를 개봉한 서울극장의 관객 점유율은 평일을 포함해 80%에 이르고 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대박’


이 정도면 ‘쉬리 신드롬’을 능가하는 위력이다. <…JSA>의 공식 홈페이지(www.cyberjsa.com)에는 매일 200건에 이르는 감상 소감이 올라오고, 컴퓨터통신과 인터넷의 플라자는 연일 <…JSA>에 찬사를 보내는 네티즌들의 평으로 도배되고 있다. 심지어 이 영화의 삽입곡 <이등병의 편지>가 들어 있는 김광석의 음반까지 최근 들어 판매량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점은 이 영화의 ‘흥행 대란’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작비 30억, 홍보비에만 10억 이상 들어간 <…JSA>가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하리라는 것은 개봉 전부터 예상됐지만 <쉬리>에 도전하는 돌풍을 일으키라는 예견을 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제작사인 명필름조차 손익분기점인 서울 50만명 정도가 ‘희망’이었다. 시사회 당시 평론가들의 거의 일치된 찬사를 받으면서도 제작진은 이 정도의 대박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예로 볼 때 오히려 평단의 호평이 흥행면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의미했던 탓도 있었다.

<…JSA>는 충무로의 통념대로라면 대박영화의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한 영화다. 우선 이 영화에는 출연만으로 대박 기준선인 서울 60만을 보장하는 특급스타가 없다. <반칙왕>의 송강호가 간판이긴 하지만, <…JSA> 이전까지는 ‘희극지왕’이 아닌 송강호를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액션이나 로맨스 같은 흥행의 공식들을 의식적으로 배제하면서 국내 상업영화가 피해가야 할 첫 번째 장르라고 하는 스릴러 양식을 도입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것은 비슷한 소재를 철저하게 흥행공식에 대입한 <쉬리>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JSA>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인 소피(이영애)는 아예 여성성이 탈색되어 있는 인물이다. 극도로 절제된 총격전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총 한번 멋있게 뽑아들지 못하는 것도 이 영화의 특징이다. 구성을 3부로 나누어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구성 역시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은 방식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충무로의 경험칙들을 보기 좋게 배신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대들의 발걸음만 분주하던 극장가에 나이든 성인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서울극장 기획실의 서대선씨는 “평일에도 다른 개봉영화의 2배 이상 관객이 들고 있으며 보통 20대가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30대 이상의 관객이 평일에 많이 보러 오는 것도 <…JSA>만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JSA>를 보러 오는 성인 관객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극장보다는 비디오에 더 친숙함을 느끼는 30대 이상이라는 사실은 이 영화가 <쉬리>처럼 전 국민적인 신드롬이 돼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아닌게 아니라 <…JSA> 개봉관에 가면 직장 동료들과 ‘단체관람’을 왔거나 오랜만에 나들이 나왔음직한 중년의 부부들이 눈에 많이 띈다. 9월15일 오후 서울 종로의 시네코아 앞에서 만난 주부 조유진(38)씨도 그 중 하나다. “평소에는 직장일과 가사에 바빠서 극장갈 엄두도 못내는데 주변 사람들이 하도 많이 이야기를 하기에 도대체 어떤 영화인가 궁금해서 큰 맘먹고 보러 왔다.”

잘 만든 영화 한편이 사회적인 현상으로까지 발전한 데는 남북화해라는 사회적인 공기의 변화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시대의 변화가 영화에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표현한다. 정상회담 이후 발화하기 시작해 이산가족 상봉에서 절정에 다른 분단현실의 체감은 일반 관객로 하여금 ‘인간의 얼굴을 한’ 북한군을 받아들이는 감정의 기작에 효소가 되었다. 전후세대에게는 반세기 동안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여졌던 분단의 비극성이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부조리한 현실이 되면서 사람들은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하는 괴뢰군’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반공’이라는 억압에서 해방된 쾌감

그러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현실이 벌어지리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98년 겨울 이 작품이 기획됐고, 촬영이 끝나갈 무렵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류 탓으로만 영화의 ‘대란’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쉬리>나 <간첩 리철진>보다 깊이 있는 분단현실의 통찰과 이를 통해 불어넣은 북한인의 체열이 최근 불어오는 훈풍과 맞바람을 일으켜 관객의 마음에 좀더 극적인 파장을 일으켰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만들어진 위의 영화들에서 그려지는 북한군은 냉전 시대의 ‘배달의 기수’식 묘사보다는 진보했지만 <…JSA>의 북한군은 확실히 두 영화와 차별점을 갖는다. <쉬리>에서 고통에 의해 일그러진 ‘이유있는’ 악인 최민식이나, <간첩 리철진>의 어리숙하고 언뜻언뜻 연민어린 구석이 배어나오는 유오성에 비해 <…JSA>의 송강호나 신하균은 좀더 전인격적이다. 심지어 북한군 송강호의 그림자에는 남한군인 이병헌이나 김태우가 지니지 못한 영웅적인 면모가 어른거린다. 굳이 이데올로기를 따지자면 소설 <광장>의 이명훈처럼 망명한 전쟁포로인 이영애의 아버지나 이영애가 바라보는 분단의 현실에 가까운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한군과 다를 것 없고 때로는 남한군을 압도하기도 하는 영화 속 북한군의 인간적 풍모야말로 관객으로 하여금 줄곧 의심스러우면서도 애써 무시해야 했던 진실을 보여주는 창구가 된 것이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송강호나 신하균처럼 친숙한 캐릭터가 어수룩하면서 인간적인 북한군을 연기함으로써 벌어지는 스타 이미지와 관제적인 북한군 이미지의 충돌이 관객에게 새로운 감정을 제공한다”면서 “유머를 통해 영화 전반부에 이미 남한군보다 북한군에 동일시되는 관객은 북한국의 죽음을 슬퍼하고 이를 통해 유서깊은 무의식의 억압에서 처음으로 해방되는 쾌감을 맛본다”고 <…JSA>의 매력을 설명했다.

극장을 나오면서 “재미있었지만 착잡한 기분”이라고 말하는 한 젊은 관객의 소감은 의미심장하다. 통쾌함이나 달콤함이 아니라 착잡한 느낌을 주는 <…JSA>에 몰려드는 관객 행렬은 ‘적’에서 ‘우리’로 변하기 위해 통과의례를 치르고 있는 21세기 벽두 한국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인터뷰/ 박찬욱 감독

화해기류로 ‘뽐낼’ 기회가 사라졌네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영화판에서는 알 만한 영화광으로 소문난 사람이다. 그가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 등 이른바 B급 감수성이 녹은 영화를 만들다가 상업영화를 감독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놀랐다. 그러나 그가 ‘체제의 폭력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폭력’의 시기에 20대를 살았고, 30대에 영화에 관한 탁월한 글을 쓰면서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해왔으며, 10년 전에는 베를린에서 만난 남남북녀의 로맨스와 비극적 이별를 소재로 시나리오까지 썼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박찬욱의 <…JSA>는 그리 낯설지도 놀랍지도 않을 영화다.

-감독을 맡게 된 계기.

=내가 침묵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분단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아무도 그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이제 이야기할 때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20대를 보낸 80년대와 분단극복의 21세기와 채무관계를 청산할 기회라는 생각이었다.

-감독이 분석하는 흥행요인.

=민족적이고 감동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킬 만한 마음속의 지뢰를 누군가 대신 밟아주기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그 시간이 오래된 만큼 열광의 강도도 지나칠 정도로 뜨거운 것 같다. 사회 분위기의 변화에 따라 언론에서 많은 관심을 쏟아주었던 것도 무시 못할 요인이다.

-영화가 주장하는 ‘화해’가 현실화되니 좋긴 하나 피해도 크다고 했는데.

=영화를 찍을 당시 실제 남북회담이 성사되면서 어설프게 흉내내는 꼴이 될 것 같아 북한 의장대 사열장면 같은 것은 빼기도 했다. 그리고 기획 당시 우리로서는 용기를 가지고 냉전상황을 정면돌파해보자는 비장한(?) 각오가 있었는데 뽐낼 기회가 사라졌다. (웃음) 그러나 개봉시기가 우연히 겹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시류에 영합한 영화라고 말할 때는 정말 섭섭하다.

-북한군을 묘사하는 데 특별히 신경쓴 점이 있다면.

=옷이나 구사하는 말투처럼 쉽게 알 수 있는 이질적인 부분들은 묘사하기 어렵지 않았다. 다른 체제이기 때문에 나오는 우리와는 다른 말이나 생각들보다 오히려 전방의 군인으로서 양쪽이 얼마나 비슷한 존재인가를 염두하고 그려내는 부분에 많은 공을 들였다. 전체적으로 어느 순간 같다가도 체제의 문제 때문에 어느 순간 충돌의 기운이 감돌기도 하는 등 남한군과 북한근 사이의 긴장과 이완의 접점을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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