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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족보 없어 더 맛있는 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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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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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식의 어두운 기억이 스며 있는 깃대봉집에서 산동네 서민들의 냉면맛을 보라

지난 6월 월드컵의 열기가 방방곡곡을 들뜨게 하고 있을 때, 서울의 거리거리는 태극기의 물결로 넘쳐났다. 그러나 이때의 태극기 물결은 3·1운동의 기록화나 해방의 감격을 담은 1945년 8월15일의 기록 사진과는 사뭇 달랐다. 남녀 공히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르기도 하고, 두건처럼 접어 머리에 쓰기도 하고, 심지어 여자들은 치마처럼 허리 아래에 걸치기도 했다.

그것은 그동안 애국심으로 상징 조작되어 국민에게 군사 독재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하게 하는 데 이용돼온 태극기의 권위·충성·근엄주의가 그 허울을 벗어젖히고 민족공동체의 구심 부호로써 시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간 순간이었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이른바 10월유신을 단행하고 본격적인 장기 독재정권으로 치달아갈 무렵 하기식이라는 것이 있었다. 중앙청이나 시청 등 주요 공공건물에는 매일 아침 태극기를 게양하고 저녁 6시에는 태극기를 내려야 했다. 이때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함께 흘러나온다.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람은 하던 작업을 중지하고, 지나가던 행인들은 혹시라도 애국심과 충성심이 의심받지 않도록 가던 길을 멈추고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시청 부근에서의 이 장면이 이 땅의 평범한 장삼이사들의 하기식이라면, 구중궁궐 청와대를 철통같이 지키는 경복궁 안 수방사 30대대에서는 좀더 괴기스러운 하기식이 열린다. 대통령의 신변경호뿐 아니라 심경까지 경호해야 한다면서 조금이라도 박정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인사들을 철저히 차단해온 경호실장 차지철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고 완전무장한 수방사 병사들을 열병시킨 채 하기식을 주도했다.

단 중앙에는 차지철이 굳은 얼굴로 사열을 받고 있었고, 양 옆으로는 총칼의 위력을 과시하고자 차지철이 억지 초청한 언론사 사장, 대학총장, 재계·문화계 인사들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군화끈을 질끈 동여매고 이들을 향해 경례를 붙이는 열병 지휘관 전두환 중령이 이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하기식은 나라로부터 잔뜩 의무만 요구받았지, 나라가 해준 것이라고는 별로 없는 민중들의 삶에도 악착같이 파고든다. 70년대에 서울에서도 유명한 판자촌 마을 창신동 산동네에도 꼭대기에 국기게양대가 설치되고, 매일같이 하기식이 거행되면서 삶과 노동에 지친 서민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다그쳤다. 창신동 사람들은 그 국기게양대를 그냥 깃대봉이라고 했다. 깃대봉 바로 앞에 그럴싸한 냉면집 깃대봉집(02-762-4407)이 있다.

나는 깃대봉집의 냉면은 평양식이니 함흥식이니 하는 냉면의 그럴듯한 족보와 격식에는 전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그 내력을 추측해봤다. 60년대 산업화로 농촌이 붕괴되면서 물밀듯이 도시로 쫓겨온 농민들은 도시 빈민을 이루면서 막노동으로, 행상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또 일부는 그들만의 산동네 공동체에서 구멍가게·연탄집·대폿집·식당들을 열어 ‘산동네 지역경제’를 형성한다.

그이 척박한 산동네 경제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싸고, 풍성하고, 서민들의 입맛에 맞아야 하는데, 깃대봉집의 냉면이 그렇게 시작되었으라는 짐작이다. 조성철(74)씨가 1960년에 이 산동네에 냉면집을 열었고, 지금은 조씨의 5남매가 모두 그 집에서 일하고 있다. 둘째딸 조성미(40)씨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나의 짐작과 바로 일치했다.

메밀보다는 고구마 전분을 많이 쓰기 때문에 면발은 하얗고, 면 위에 무김치가 얹어 나오기 때문에 냉면 김치도 따로 없다. 산동네 서민들의 입맞에 맞춰 주문받을 때 매운 것, 안 매운 것만 묻는다. 입구에서부터 주방 모두가 허술하지만 호호 불어가며 먹는 매운 냉면맛만은 일품이다. 동대문 이화여대병원 오른쪽 성벽길을 따라 300m 올라가면 성벽 사이 암문이 나온다. 이 암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깃대봉냉면집 깃대가 보인다. 맛 좋고 양 많고 값싸니(보통 3500원, 곱빼기 4천원), 가는 길이 좀 험하더라도 즐겁게 찾을 일이다.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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