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열정과 불안> 펴낸 조선희씨… 나침판 없는 세대 욕망의 이면 담아
일단 소설 <열정과 불안>(생각의 나무 펴냄) 독자들을 위한 정보 하나. 얼마 전 작가 조선희(42)씨는 친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한통 받았다. 이탈리아에 출장을 가는 김에 눌라치타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느냐는 교통편 문의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시골마을 눌라치타는 개인의 이해관계를 떠나 인간적 유대로 뭉친 공동사회, 주인공 영준이 꿈꾸는 유토피아다. 그러나 이 마을이 있다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베수비오 화산 사이에서 서성거리지 말 일이다. 눌라치타도, 이 마을을 소개하는 <유토피아 견문록>도, 이 글을 썼다는 에드워드 러셀도 모두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거짓말에 가장 지적인 독자를 자처하는 사람조차 깜빡 속는다. 기자에서 소설가로의 변신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건 작가 자신이 아니라 20년 가까이 신문과 잡지에서 그를 만난 독자들일지 모른다.
중견 언론인에서 신인 작가로
“매일 소설에 대한 덕담과 악담 사이에서 조울증을 왔다갔다 하지. 내가 이렇게 소심해질 줄 나도 몰랐어요.” 합치면 500쪽이 넘는 두권짜리 소설을 세상에 내놓고 요즘 겪는 작가의 심경이다. 연합통신에 입사했던 스물세살 적부터 이골이 날 정도로 글을 써왔지만 그는 지금 신입생인 것이다. 작품에 대한 날선 한마디에 밤잠을 설치고, 때로는 술자리에서 만난 평론가로부터 ‘수습기자’만도 못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열정과 불안>은 봉건세대의 세례를 받고 태어나 모더니즘의 청년기를 통과한 한 세대의 구성원들에 대한 이야기다. 대가족이라는 완전무결한 공동체에서 성장해 가족의 해체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연대와 우애라는 이상을 키우며 자라나 경쟁과 배신이라는 차가운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경계선 위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원고지 분량으로 따지만 1800매가 넘는 이 소설이 단숨에 읽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1권과 2권의 말하는 이가 서로 다른 입장의 두 인물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1권의 화자 영준은 ‘30년 일해서 도착하는 장소가 바로 로얄 패밀리 방석 밑’에 불과한 대기업 일자리를 때려치우고 대학시절 운동권 동기 민혁과 벤처 기업을 차리지만 대안의 삶, ‘눌라치타’에 대한 그의 열정은 친구의 배신으로 무너진다. 2권의 화자 인호는 대학시절 살벌한 캠퍼스에서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다니다가 민혁에게 따귀를 맞아 영준 일행과 기이한 인연을 맺게 된 정신과 의사. 1권이 이상주의자 영준의 좌절을 따라간다면 2권은 자유주의자 인호의 허기를 따라간다. 이를 통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서로의 방향은 다르지만 영준 세대들이 품은 열정의 이면에 일렁이는 불안이다. “열정과 불안은 한몸이다. 사람이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천배 정도를 욕망한다면 그 욕망을 채우는 기체는 불안일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작가 자신의 욕망은 어떤 것일까. “대학 때 세미나를 하면서도 내 마음을 움직인 건 맑시즘의 이론이 아니라 <금관의 예수>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같은 작품이었다. 내가 꿈꾸던 것도 어떤 주의나 관념이 아니라 정서적 갭이 없는 유년시절의 가족관계같은 것이었다. 반면 성장하면서 인호처럼 자유주의에 대한 갈망도 컸다. 또한 민혁이 가진 성공에 대한 야심이나 비열함 역시 내 안에 없지 않을 것이다.” 부딪히는 욕망과 열정 사이에 흐르는 불안으로 몸을 떨며 현실이 아닌 눌라치타를 꿈꾸는 것은 특정세대뿐 아니라 조씨를 포함한 모든 개인들이 사는 모습일 터다. 그는 이 작품을 쓰면서 20∼30대에 자신을 누르던 강박, 70∼80년대가 자신에게 강요하던 강박에서 벗어난 기분이라고 한다. “까뮈는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작가가 됐다고 말했고 장 그르니에는 글을 씀으로써 강박에서 벗어난다고 했는데 나 역시 이 소설을 쓰면서 부모 세대에게 물려받거나 젊은 날을 지배했던 이상과 자유에 대한 강박을 털게 된 것같아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모든 연인의 첫사랑이 그렇듯, 모든 작가의 처녀작이 그렇듯 그는 <열정과 불안>을 통해 하나의 통과의례를 겪은 것이다.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해 조선희씨의 첫 소설은 아니다. 그는 88년 중편소설집 <밤길의 사람들>을 통해 <퇴적층>을 발표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소설책을 품에 안고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소녀는 아니었다. 문학담당 기자를 하면서도 그는 작가가 돼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고. “연변에서 사람이 한명 오면 신문에 나던 80년대 후반,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연변사람의 눈에 비친 한국을 한번 소설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원고지 백매 정도를 끄적였는데 마침 평론가 김명인씨가 중편집을 준비한다고 해서 정말 우연히 작가 입봉을 했던 셈이다.” 사실과 독자 사이에서의 줄타기 같은 기사 작성에서 벗어나 소설을 쓰는 경험은 그에게 “광활한 지평 위에서 무궤도 열차를 타고 종횡무진”하는 것 같은 쾌감을 주었고, 이후로 막연하게 꿈꾸던 소설 창작이 그로부터 13년이 흐르고서야 그를 본격적으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박완서씨의 표현대로 “영화잡지 편집장이 더 좋은 자리, 더 재미있고, 더 높은 자리가 아닌가” 하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2000년 직장을 나와 2년3개월 동안 완성한 것이 <열정과 불안>이다. 무궤도 열차 탑승한 듯한 쾌감 “단편소설이 고구마 한 뿌리를 캐는 것이라면 장편은 밭 하나를 뒤짚어 엎는 것이고,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오장육부로 쓰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기운이 달려서도 당분간 장편을 쓰기는 힘들 것같고 앞으로는 단편을 써볼 생각”이라고.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또는 인터뷰할 때 “잘 쓸 때까지 쓸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소설이란 베스트셀러이거나 문학사에 남을 걸작 그 어느 쪽도 아니라면 허망한 것이다”(1권 171쪽)라는 입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의 생각이자 소설을 향한 열정일 것이다. 그 열정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는 불안이 그의 후속작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지 궁금하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이제야 비로소 강박에서 벗어났다." 작가 조선희씨는 <씨네21> 편집장을 역임한 언론인 출신으로 <열정과 불안>이 첫 장편소설이다. (김종수 기자)

<열정과 불안>은 봉건세대의 세례를 받고 태어나 모더니즘의 청년기를 통과한 한 세대의 구성원들에 대한 이야기다. 대가족이라는 완전무결한 공동체에서 성장해 가족의 해체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연대와 우애라는 이상을 키우며 자라나 경쟁과 배신이라는 차가운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경계선 위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원고지 분량으로 따지만 1800매가 넘는 이 소설이 단숨에 읽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1권과 2권의 말하는 이가 서로 다른 입장의 두 인물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1권의 화자 영준은 ‘30년 일해서 도착하는 장소가 바로 로얄 패밀리 방석 밑’에 불과한 대기업 일자리를 때려치우고 대학시절 운동권 동기 민혁과 벤처 기업을 차리지만 대안의 삶, ‘눌라치타’에 대한 그의 열정은 친구의 배신으로 무너진다. 2권의 화자 인호는 대학시절 살벌한 캠퍼스에서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다니다가 민혁에게 따귀를 맞아 영준 일행과 기이한 인연을 맺게 된 정신과 의사. 1권이 이상주의자 영준의 좌절을 따라간다면 2권은 자유주의자 인호의 허기를 따라간다. 이를 통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서로의 방향은 다르지만 영준 세대들이 품은 열정의 이면에 일렁이는 불안이다. “열정과 불안은 한몸이다. 사람이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천배 정도를 욕망한다면 그 욕망을 채우는 기체는 불안일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작가 자신의 욕망은 어떤 것일까. “대학 때 세미나를 하면서도 내 마음을 움직인 건 맑시즘의 이론이 아니라 <금관의 예수>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같은 작품이었다. 내가 꿈꾸던 것도 어떤 주의나 관념이 아니라 정서적 갭이 없는 유년시절의 가족관계같은 것이었다. 반면 성장하면서 인호처럼 자유주의에 대한 갈망도 컸다. 또한 민혁이 가진 성공에 대한 야심이나 비열함 역시 내 안에 없지 않을 것이다.” 부딪히는 욕망과 열정 사이에 흐르는 불안으로 몸을 떨며 현실이 아닌 눌라치타를 꿈꾸는 것은 특정세대뿐 아니라 조씨를 포함한 모든 개인들이 사는 모습일 터다. 그는 이 작품을 쓰면서 20∼30대에 자신을 누르던 강박, 70∼80년대가 자신에게 강요하던 강박에서 벗어난 기분이라고 한다. “까뮈는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작가가 됐다고 말했고 장 그르니에는 글을 씀으로써 강박에서 벗어난다고 했는데 나 역시 이 소설을 쓰면서 부모 세대에게 물려받거나 젊은 날을 지배했던 이상과 자유에 대한 강박을 털게 된 것같아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모든 연인의 첫사랑이 그렇듯, 모든 작가의 처녀작이 그렇듯 그는 <열정과 불안>을 통해 하나의 통과의례를 겪은 것이다.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해 조선희씨의 첫 소설은 아니다. 그는 88년 중편소설집 <밤길의 사람들>을 통해 <퇴적층>을 발표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소설책을 품에 안고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소녀는 아니었다. 문학담당 기자를 하면서도 그는 작가가 돼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고. “연변에서 사람이 한명 오면 신문에 나던 80년대 후반,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연변사람의 눈에 비친 한국을 한번 소설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원고지 백매 정도를 끄적였는데 마침 평론가 김명인씨가 중편집을 준비한다고 해서 정말 우연히 작가 입봉을 했던 셈이다.” 사실과 독자 사이에서의 줄타기 같은 기사 작성에서 벗어나 소설을 쓰는 경험은 그에게 “광활한 지평 위에서 무궤도 열차를 타고 종횡무진”하는 것 같은 쾌감을 주었고, 이후로 막연하게 꿈꾸던 소설 창작이 그로부터 13년이 흐르고서야 그를 본격적으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박완서씨의 표현대로 “영화잡지 편집장이 더 좋은 자리, 더 재미있고, 더 높은 자리가 아닌가” 하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2000년 직장을 나와 2년3개월 동안 완성한 것이 <열정과 불안>이다. 무궤도 열차 탑승한 듯한 쾌감 “단편소설이 고구마 한 뿌리를 캐는 것이라면 장편은 밭 하나를 뒤짚어 엎는 것이고,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오장육부로 쓰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기운이 달려서도 당분간 장편을 쓰기는 힘들 것같고 앞으로는 단편을 써볼 생각”이라고.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또는 인터뷰할 때 “잘 쓸 때까지 쓸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소설이란 베스트셀러이거나 문학사에 남을 걸작 그 어느 쪽도 아니라면 허망한 것이다”(1권 171쪽)라는 입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의 생각이자 소설을 향한 열정일 것이다. 그 열정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는 불안이 그의 후속작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지 궁금하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