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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국어가 수학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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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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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일러스트레이션/ 차승미.
우리 학생들이 고등학교까지 다니면서 배우는 학과목은 대략 20가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과목은 수학인 것 같다. 요즘 들어 영어 열풍이 거세기는 하다. 그러나 수학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다. 학생들뿐 아니라 부모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수학에 물심양면으로 가장 많이 투자한다. 이에 대해 “수학을 잘하려면 먼저 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뜻밖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구석이 있다.

수학의 기본 개념인 등식을 보자. 등식은 등호(=)로 연결된 식을 말한다(흔히 방정식이라고 하는 것이 등식이다). 그런데 등호의 역할을 잘 살펴보면 일상 언어에서의 주격조사인 ‘…은’, ‘…는’, ‘…이’, ‘…가’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왼쪽 변은 주어, 오른쪽 변은 술어에 대응한다. 따라서 등식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문장이다. 중1 수학에서 배우는 일차함수 형태는 “y = ax + b”이다. 이것을 말로 풀이하면 “y는 x의 a배에 b를 더한 것이다”가 된다. 여기서 보듯이 식과 말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 두 가지 모두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란 점에서 그렇다. 이상의 내용은 “수학은 언어다”라는 간명한 표현으로 새겨두면 좋다.

우리는 흔히 수학을 잘한다고 하면 “수식을 잘 다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 내용에 비춰볼 때 수학의 핵심은 표현이다. 따라서 수학을 잘하려면 먼저 표현력을 키워야 한다. 그렇게 표현된 말을 식으로 번역하는 것도 넓은 의미로 볼 때 표현력에 속한다. 결국 수학을 잘한다는 것은 “‘생각-말-식’으로의 변환을 잘한다”는 것이다. 국어가 수학에 앞서는 것이다.

이렇게 식을 꾸미면 그것을 푸는 것은 단순 작업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근래 들어 웬만하면 컴퓨터에 맡긴다. 가까운 예로 요즘 수많은 가게가 물건값을 자동 계산대에서 처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일기예보를 슈퍼 컴퓨터에 의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데이터의 양과 처리 과정이 방대하다는 점만 다르다. 다시 말해 수식의 풀이는 ‘기계적 과정’이다. 따라서 수식을 잘 다룬다고 해서 수학을 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그렇다고 수식 다루기를 아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 생활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숙달하는 것은 누구나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다). 그러나 ‘생각-말-식’으로의 표현 과정은(적어도 아직까지는) 컴퓨터에 맡길 수 없다. 즉 수학의 핵심 부분은 ‘인간적 과정’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의 상식과 달리 수학은 매우 인간적인 학문이다.

이처럼 일상 언어와 수학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국문학을 비롯한 여러 언어학은 인문과학, 수학은 자연과학으로 분류해왔다. 이런 분류가 은연중에 우리의 머릿속에 언어학과 수학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고정 관념을 심어놓았다. 그러나 하나의 정교한 수식을 만드는 것은 한줄의 아름다운 시구를 얻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노력과 다를 바 없다. 나아가 지난 수학사를 돌이켜보면 그보다 소설적인 이야기가 드물다고 할 정도다. 수학은 말하자면 미망(迷妄)의 너울에 가린 아름다움이다. 너울은 우리를 기다리는 수학이 아니다. 수학으로 다가서는 우리가 그 너울을 걷어야 한다. 문학을 대하는 마음으로 수학을 대하면 수학도 한결 반가이 맞을 것이다.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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