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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거친 펜선, 영화를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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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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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지금 마쓰모토 다이요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인기 상종가

거칠고 일그러진 펜선으로 독특한 만화세계를 구축한 마쓰모토 다이요의 작품 두편이 일본에서 최근 영화화됐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핑퐁>과 번역되지 않은 <푸른 봄> 두편이다. 두 작품이 일본에서 특히 화제가 된 것은 영화 <핑퐁>의 호화 캐스팅 때문이다. 일본 청춘영화에서 빠지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구보쓰카 요스케가 <핑퐁>의 천재 탁구선수 페코 역을 맡은데다, 일본 아카데미상을 휩쓴 의 각본을 맡은 구도 간쿠로가 각본을 맡았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영화 <쉘 위 댄스>와 <으라차차 스모부>에서 주연 같은 조연을 맡은 다케우치, 최근 한국에도 개봉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특색 있는 유바바의 목소리 연기를 한 나쓰키가 각각 탁구감독과 탁구장 여주인 역을 맡았다. 영화 <푸른 봄>에선 유명한 영화배우를 부모로 둔 덕에 더 유명한 청춘스타 마츠다 류헤이가 등장한다.

스포츠 만화의 문법을 깨다

사진/ <핑퐁> 1권 표지(왼쪽). 다른 만화와 달리 스타의 성공기만을 좇지 않는다. 공간예술인 만화에서 ‘빠른 공’이라는 시간개념의 표현은 이처럼 이뤄진다(오른쪽).
결론부터 얘기하면 영화 <핑퐁>은 원작만화가 지닌 거친 호흡과 터치를 스크린에 다 담아내지 못했다. 달(月本·스키모토)과 별(星野·호시노)로 설정된 두 천재 탁구선수들의 알레고리 역시 너무 평범하게 재현되었다. 역시 캐스팅에 문제가 있었다. 앞서 언급한 호화 캐스팅 멤버들이 지닌 독특한 이미지, 이를테면 구보쓰카가 지닌 터프한 반항아 이미지는 그가 아무리 천진난만하고 장난기 심한 연기를 해도 지워지지 않아 다소 어색한 감이 있었다.


만화나 영화 <핑퐁>이 많은 일본인들로부터 사랑받는 까닭은 기존의 스포츠 만화문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기존 스포츠 만화의 주종을 이룬 것은 주인공들이 혹독한 훈련을 통해 좌절을 극복하고 반드시 정상에 선다는 내용으로, 이른바 <공포의 외인구단> 식이다. 물론 <핑퐁>에서도 페코(별로 상징되는 호시노의 별명)라는 한 천재 탁구선수가 뼈아픈 좌절을 겪은 뒤 다시 정상의 자리를 탈환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페코보다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또 다른 천재 탁구선수 스마일(달로 상징되는 스키모토의 별명) 쪽에 맞춰져 있다.

별은 늘 스스로 빛을 발하지만, 달은 별의 빛을 받아야만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달은 굳이 스스로 빛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스마일 역시 마찬가지다. 페코는 늘 자기가 이 혹성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반드시 이겨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마일은 페코 못지않은 실력이 있으면서도 결코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가 시합 중에 늘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은 시합에 이기고 지는 것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탁구는 “영어 단어 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심풀이 땅콩”이다.

사진/ <핑퐁>에서 탁구감독 버터플라이조에게 날개를 달아준 컴퓨터 그래픽 장면. 감독은 다양한 특수효과를 쓴다.
고교 탁구선수권 대회를 마친 뒤 페코는 유럽의 탁구 1부리그에서 활약하지만, 스마일은 어린 시절 탁구를 배우던 허름한 탁구장에서 코치를 한다. 그의 희망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어느 쪽이 더 탁구를 즐기는 것 같은지 우리들 모두에게 묻고 있다. 빛나는 별, 스타에게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지만, 그 그늘에 가린 달의 탁구도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역설. 별들에 대한 달의 반란을 작가는 꾀한다.

만화 속의 등장인물은 목소리도 피부색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만화를 읽는 독자들은 각자의 상상력을 동원해 펜선과 펜선 사이의 2차원 공간을 구체적 이미지가 있는 3차원의 영감을 지닌 인간으로 만들어낸다. 여기에 원작만화를 영화화해야 하는 감독의 고민이 있다. 영화감독은 한명의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이미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고민을 비껴가기 위해 영화 <핑퐁>의 감독이 택한 것은 컴퓨터 그래픽이다. 물론 감독 자신이 영화 <타이타닉>의 컴퓨터 그래픽부 출신이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버터플라이조’라는 닉네임이 있는 탁구감독의 지친 어깨에 실제로 아름다운 나비의 날개를 달아놓았는데, 그것은 스마일과 거의 같은 길을 걸어온 별이 아닌 달의 삶에 대한 애정과 찬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빠른 탁구공의 움직임을 실사영화로 표현해내기 위해선 역시 또 다른 연출방식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화에서 마쓰모토 다이요가 빠른 공을 표현하기 위해 택한 만화연출 기법은 공을 라켓으로 때리는 장면과 공이 테이블 위를 때리고 지나가는 장면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만화는 본래 시간을 표현할 수 없는 장르다. 따라서 만화에 ‘빠르다’라는 시간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튀어오르는 공과 작게 묘사된 라켓과의 원근대비, 상대방을 서로 연결시킨 독특한 화면분할, 강한 흑백 콘트라스트, 강력한 배경선과 동작선을 한 페이지 안에 절묘하게 비벼넣었다.

영화 감독은 이를 빠른 장면과 느린 장면의 교차 연출기법으로 대체했다. 시간을 부릴 수 있는 장르답게 느린 모션에선 라켓을 쥔 선수의 강한 표정을 부각시킨 뒤,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공을 아주 느리게 잡아가다가 그 공이 테이블에 닿는 순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재빨리 사라지는 방식, 즉 시간을 대비시킴으로써 속도를 연출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물론 영화는 만화보다 더 다양한 연출무기들을 갖고 있다. 탁구경기의 거친 호흡을 표현하기 위해 만화의 거친 배경선과 동작선은 긴장감 넘치는 음악으로, 페코와 스마일의 따뜻한 이야기는 멀리 에노시마가 보이는 아름다운 가마쿠라의 해변풍경으로 대치된다. 흐름을 가르는 정지화면 역시 영화만이 선보일 수 있는 것이다. 형편없다고 생각한 아쿠마에게도 패배하자 탁구와의 결별을 선언하며 강물로 뛰어드는 페코의 모습을 중간에서 끊는 영화의 첫 장면은 역시 만화에선 흉내내기 힘든 탁월한 연출장면임에 틀림없다.

숨막히는 청춘을 담아낸 카메라

사진/ 만화 <푸른 봄>의 표지(왼쪽). 영화 <푸른 봄> 포스터. 영화는 만화가 표현해내고자 한 이미지보다 리얼하다.
영화 <푸른 봄>은 허영만 원작을 영화화한 <비트>를 떠올리게 하지만 분위기는 무척 다르다. 영화는 만화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지 않는다. 만화가 옴니버스 형식이기 때문이겠지만, 영화는 만화가 표현하고자 한 이미지보다 리얼하다. 만화의 부분부분만을 영화화하고 만화에서 볼 수 없는 인물까지 영화에선 등장하지만, 반항과 잔인함, 고민과 터질 듯한 청춘의 이미지는 영화쪽이 만화보다 더 절실하다.

귀를 찢을 듯한 록음악, 여기저기 갈겨쓴 거친 낙서들도 갇힌 청춘들의 절규를 잘 대변해준다. 마쓰모토의 거칠고 뒤틀린 펜선에 의해 비어져나오는 숨막히고 일그러진 청춘의 이미지는 결코 학교 밖으로 나가지 않는 카메라워크에 의해 강렬하게 재현된다. 교실과 복도, 옥상, 동아리방과 학교 화장실만을 계속 오가는 카메라는 모두를 질식시키고 만다.

영화 <푸른 봄>이 이처럼 만화가 지닌 이미지를 더 새롭게 재해석한 반면, 영화 <핑퐁>의 경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다소 원작만화에 줄곧 끌려다녔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두 영화가 동시에 상영되는 시부야 선라이즈 극장에서 길게 줄을 선 쪽은 영화 <핑퐁>이다.

마쓰모토 다이요의 만화 <철근 콘크리트>도 곧 애니메이션화될 거라고 한다. 독특한 캐릭터로 일본에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한 출세작이기도 하다. 판형이 정형화되지 않은 탓일까. 그의 만화는 아직 우리말로 거의 번역되어 있지 않다. 거칠고 쿨한 그의 그림세계에 빠져들면 올 여름 더위도 말끔히 사라질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도쿄=글·사진 신명직 통신원 mjshin59@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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