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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난타의 휴예들 ‘무대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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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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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형식 파괴하는 비언어 퍼포먼스… 파격적 실험극에 세련미로 상품성 높여

흰 막을 드리운 커다란 무대는 텔레비전 화면이다. 채널이 숨가쁘게 돌아가다 지지직거리더니 번개치는 이미지와 함께 굉음이 터진다. 텔레비전 화면조정에 쓰이는 칼라바가 생명체로 탄생되는 순간이다. 빨강(구제민), 노랑(홍대룡), 파랑(박기현), 초록(차지연)의 칼라바가 알록달록한 원색 형상으로 나타나 전자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타악 연주뿐 아니라 퍼포먼스와 마임을 곁들인다. 택견을 응용한 액션극도 펼친다.

줄거리는 없으니까 느낌을 즐겨봐

국산 창작품 <칼라바쇼>(9월29일까지 서울 대학로 폴리미디어씨어터, 02-741-8357)는 텔레비전과 공연의 만남이다. 이유리 프로듀서(PD)는 “기획단계에서부터 공연의 눈높이를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이 시대의 일반 시민에 고정시켰다”고 말한다. 4명의 공연자가 드럼페스티벌 대상 수상자 2명을 포함해 국악 장단과 드럼·재즈 등의 분야에서 10년 안팎의 경력이 있지만, 연출자와 제작자는 방송일을 하던 이들이다. 하지만 텔레비전이라는 소재를 빌려왔을 뿐 본질은 비언어 퍼포먼스나 뮤직 퍼포먼스다. 줄거리는 단절된 에피소드 속에 해체돼 사라져버렸다. 때문에 관객은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신경’쓸 필요가 없다. 음악도 굴곡 있는 멜로디가 아닌 장단 중심의 타악이 이끌어간다. 수입품 <스텀프>에 이어 국내에서 만든 <난타>의 성공이 없었다면, <칼라바쇼>는 무모한 실험극으로 비쳤을 것이다.


7월31일부터 무기한 공연에 들어간 <델라구아다>(세종문화회관 뒤편 델라구아다홀, 02-501-7888, 1588-1555)는 더 파격적이다. 줄거리와 대사가 없는 건 물론이고, 기습적 퍼포먼스는 서커스보다 격렬하다. 모든 배우들은 한 가닥 줄에 몸을 매달고 공중을 휘젓는데, 서커스처럼 예쁜 미소와 우아한 자태로 묘기를 펼치는 게 아니다. 고통스런 표정에 괴성을 지르며 전투를 벌이듯 수직 벽을 오르내리거나 6명의 남녀가 한데 뒤엉켜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몸짓으로 공중을 떠돈다. 지옥도가 따로 없다. 세종문화회관 주차장 일부를 개조해 만든 21억원짜리 전용공연장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다. 사방 벽과 공중, 의자 없는 객석 모두가 무대 공간이다. 관객은 모든 걸 서서 지켜봐야 한다.

바야흐로 비언어 퍼포먼스의 전성기다. 8월 중순에는 <난타> 제작진이 후속작 <유에프오>를 선보이고, LG아트센터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광산 노동자의 춤과 노래를 본뜬 뮤직 퍼포먼스 <검부츠>를 수입·상연한다. 이들 공연들에는 직선적이든 분절적이든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으니 거기에 담아 풀어낼 주제도 없다. 다만 공연자의 꿈틀대는 몸과 감각을 자극하는 음악으로 청각과 시각의 쾌감을 극대화하려 한다. 공연의 뮤직비디오화, CF화라고 할까. 또 관객에게 거리감을 두고 관찰한 여지를 두지 않는다. 한사코 공연 내부로 끌어들여 동화시키려 든다. <칼라바쇼>는 관객을 줄기차게 ‘긴장’시킨다. 객석에서 관객을 무대 위로 끌어낸 뒤 대형 기저귀와 금속판을 입히고는 네명의 공연자와 꽤 오랜 시간을 어울리게 한다. 에피소드를 이어가는 중간중간에는 사회자 노릇을 하는 개그맨이 아예 객석에 머물다시피 하며 마당극 분위기로 잡아간다. 공연 마지막에는 한바탕 춤판을 요구한다. 미리 나눠준 휴지와 신문지 등을 마구 집어던지게 하며 관객 스스로 신나게 놀라고 한다. 그래서 공연이 끝날 때쯤 극장 안은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는 파격이 연출된다. <칼라바쇼>가 후반부로 가면서 관객의 참여를 점차 고조시키는 방법을 쓴다면, <델라구아다>는 공연 초반에 객석을 테크노 음악에 휩싸인 레이브 파티장으로 바꿔놓는다. 객석 한가운데로 소나기 같은 물이 쏟아지고 배우들의 적극적인 지휘에 힘입어 온몸을 물에 적셔가며 관능의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칼라바쇼>나 <델라구아다>의 모든 방향은 세상사에 지친 관객의 ‘고통’을 말끔히 없애는 쪽으로 맞춰져 있다.

“내용 없는 상업적 게임일 뿐이다”

연극평론가 안치운(호서대 디지털문화학부 교수)씨는 비언어 퍼포먼스가 압도하는 공연계 경향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2000년대 들어와서 나타나는 <난타> 이후의 흐름은 돈놓고 돈먹기식 게임이나 다름없다. 공연 언어의 민주화가 아니라 자본 투자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돈이 될 만한 것만 끌어모았다. 국내 공연예술계의 양심 부재와 맞물려 끝자리까지 온 것 같다. 대중들은 세계 연극이 이런 쪽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제작자도 이런 공연을 만들어야 세계의 흐름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해마다 아비뇽페스티벌에 다녀오지만 여전히 중심은 정극이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라는 궁금증이 들 정도로 파편적 이야기가 단점으로 비춰지긴 해도 공연 형식의 틀을 깨는 파격성이나 발상의 전환은 높이 살 만하다. 또 ‘수호천사’라는 뜻의 <델라구아다>가 탄생한 과정을 의식하고 본다면, 배우들의 격렬한 몸동작과 고통스런 표정에서 보이지 않는 틀에 갇혀 사는 우리의 내면을 슬쩍 엿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의 출생지는 아르헨티나의 거리다. 1985년 정치적으로 어수선한 틈에 드라마 학교를 갓 졸업한 피촌 발디누와 디키 제임스는 언더그라운드 거리공연 그룹에 들어가 독특한 거리 퍼포먼스를 실험했다. 이들의 공연이 점차 명성을 얻어가면서 정치적·사회적 여건 속에 힘들게 사는 대중을 위한 서커스 페스티벌을 열기에 이르렀고, 92년에는 암벽 등반가들과 팀을 결성해 실험성을 더했다. 95년 아르헨티나의 빈민가를 뜻하는 ‘villas’를 쇼 이름으로 정하고 공연을 시작한 것이 ‘델라구아다’가 됐다. 이 공연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렌트>의 제작자 제프리 셀러와 케빈 매컬럼의 눈에 띄어 오프브로드웨이에 입성하면서 공연 무대를 세계로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공연 자체는 <칼라바쇼>나 <델라구아다>보다 단조롭지만, 남아프리카 뮤직 퍼포먼스 <검부츠>(8월14∼18일 LG아트센터, 02-2005-0114)는 역사성과 계급성을 자양분 삼아 태어난 공연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느낌을 준다. 아프리카인 특유의 흥겨운 멜로디와 함께 12명의 흑인이 선보이는 검부츠(고무장화)춤의 유래는 비참하다. 19세기 황금의 도시로 불린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지하 금광은 쇠사슬에 묶인 채 비참하게 일하는 흑인 광부로 가득 차 있었다. 자주 물이 넘쳐오르는 지하에서 백인 소유주들은 펌프질로 물을 퍼내는 대신 고무장화를 지급했다. 작업 중에 얘기를 하는 것조차 금지하자 광부들은 검부츠를 때리는 등 소리를 내어 나름대로 대화 방법을 개발했고, 아프리카인의 리듬감각에 힘입어 검부츠춤이 탄생했다. 70년대 폭력이 난무한 남아공의 소웨토 지역에 청소년들이 노래와 연기를 닦을 수 있는 타비송 청소년 클럽이 만들어지고 이곳에서 검부츠춤에 자작곡을 추가한 공연이 탄생한다. 젠지 므벌리, 나이젤 트리피트 같은 서구의 연출가·디자이너가 여기에 유럽적이고 현대적인 움직임을 덧붙여 지금의 뮤직 퍼포먼스가 완성됐다.

아프리카의 고뇌를 아카펠라로 듣는다

웃옷을 벗어부치고 육중한 고무장화를 신고 무대에 서는 12명의 흑인 젊은이들은 관능적인 움직임과 함께 넬슨 만델라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죽은 광부들을 추모하는 아카펠라로 흥겨운 공연을 이어간다. 쿠바산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왁자지껄한 클럽식 공연이 서구인의 취향에 맞게 우아한 재즈 스타일로 포장됐듯, <검부츠>와 <델라구아다>가 때깔 좋은 상품성을 갖게 된 건 서구의 공연예술가들 덕택인 것 같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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