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시 철암동 건축도시 만들기 프로젝트… 집수리 땀방울에 축제의 열기 치솟아
강릉행 열차가 잠시 머무는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은 무심히 볼 때 평범한 중소도시의 역이다. 그러나 이 기차역은 그 마을의 분위기와 규모를 귀띔해주는 장소라는 평이한 상식을 여지없이 깬다. 역 안에서 8차선에 이르는 방대한 철로들, 3층 규모의 널찍한 역사를 볼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은 정돈된 지방도시의 적당히 번잡스런 풍경이다. 하지만 역 문을 나서자 여행자를 맞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셔터를 내린 낡은 상점들과 휑한 거리뿐이다. 철암역은 단지 한 마을로 들어가는 관문이 아니라 시공간의 연속성을 훌쩍 뛰어넘는 일종의 블랙홀과도 같다.
탄가루 날리던 자리에 적막감 휘돌아
외지인들에게는 멀끔한 철암역 밖에서 만나는 피폐한 풍광이 비현실처럼 느껴지겠지만 이곳에서 비현실은 철암역이다. 석탄산업이 호황을 누린 1970∼80년대 이곳에는 2만명이 넘는 인구가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3교대로 24시간 돌아가던 탄광은 쉼없이 석탄을 토해냈고, 광부들의 지친 육신을 위로하는 선술집들 역시 24시간 내내 붐볐다. 위풍당당한 철암역은 수많은 열차들이 수백t의 석탄을 싣고 서울로, 부산으로, 광주로 질주하던 과거의 기록일 뿐이다. 그러나 수많은 집들이 황폐해지고 비어 있는 철암동 풍경은 89년 석탄산업 합리화정책 실시와 93년 강원산업 삼표제작소 폐업 이후 4분의 3 이상의 인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현실이다.
“십리 건너 한 사람, 오리 건너 한 사람 만난다”는 식당 주인의 말처럼 지난 10년 동안 탄가루 대신 적막과 절망이 대기를 파고들던 이곳에 최근 미세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7월30일 찾아간 철암동 복개천 입구에서 휘날리던 ‘철암 콜(coal)페스티벌’ 깃발은 이곳의 작은 변화를 알려주는 징표다. 10일장이 들어선 복개천 주차장에는 작은 무대가 마련되었다. 그날 오후 찾아간 이곳에는 주민노래자랑이 한창이었다. 땡볕을 가릴 데가 없어 300개나 되는 객석이 많이 차지는 않았지만 아이와 주부, 노인 20여명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무대에 올라가 한껏 목청을 돋운다. 옆에 서 있는 천막에는 ‘탄광음식축제’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여기 막걸리 한 주전자 더”라고 소리치는 앉은뱅이상 앞에 앉은 노인들의 얼굴은 밝지만은 않았다. 이 축제는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고 다니는 전국노래자랑조차 열리지 않던 철암에서 처음 열리는 마을잔치다. 화려한 무대도 번듯한 테이블도 없어 축제의 풍경은 울긋불긋 물건을 진열해놓은 좌판의 풍경에 묻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축제는 관에서 큰돈을 투자해 요란하게 펼치는 전시성 축제가 아니라 마을주민들의 힘으로 준비한 순수 민간행사이기 때문이다. 예산도 홍보도, 행사 내용도 옹색함을 떨쳐내기 힘들지만 강원도 어느 대도시도 하지 못한 주민 주최의 축제가, 침체된 탄광지역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낙후한 철암에서 열린 것이다. 같은 시각 축제현장보다 북적거리는 곳은 마을 복지회관 위쪽 삼방동의 주택개조 현장이다. 시멘트 블록이 쌓여 있는 15평 남짓한 건물에 한창 지붕이 올라가고 있다. “00야, 스티로폼 좀 가져와”, “모래가 너무 많아, 비율이 8 대 1은 되겠다.” 지붕에 위태롭게 올라간 철암지역건축도시작업팀의 기획총괄을 맡은 건축가 주대관(엑토건축도시연구소장)씨 아래로 여남은명의 학생들이 단열재 시공에, 시멘트 제작에 한여름의 더위를 잊는다. 지난 7월10일부터 집수리 작업에 들어간 삼방동 독거노인 주택 다섯호 가운데 1호 공사현장이다. 서울의 건축가 그룹과 건축학과 대학생들로 구성된 철암도시작업팀은 지난 7월10일부터 이곳에 들어와 무상으로 집수리를 하고 있다. 예술적 재탄생 돕는 건축가와 대학생들
기차로 6시간 걸리는 이곳에 와서 무상으로 집을 짓고 있으니 사랑의 집짓기 운동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의 작업은 온정 넘치는 자원봉사가 아니다. 아니, 부분적으로는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집수리 작업은 30∼40대 소장 건축가들이 97년부터 준비해온 철암 회생 프로그램의 매우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분들이 사랑의 집짓기나 러브하우스처럼 오해하기도 하는데 성격이 다릅니다. 물론 거주인이 연탄가스나 추위, 비위생적 주거환경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취지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집주인이 세상을 떠나도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철암이라는 도시가 지속되기 위한 하드웨어를 구축해보자는 거죠.” 건축가 주대관씨의 그을리고 꺼칠한 얼굴이 20일 동안 벌인 집짓기 전쟁의 상흔처럼 보인다.
강원산업의 후신인 강원랜드로부터 2천만원을 후원받아 시작한 집짓기 작업의 완성 시기는 본래 7월 말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7월30일날 본 집들은 전체 공정의 반 정도를 넘기고 있었다. 예상보다 턱없이 늦어졌다. “일단 계획 자체에 무리가 좀 있었고, 중간에 비가 많이 와서 늦어진 것도 있죠.” 직접 나무를 자르고 시멘트를 개는 것이 학생 자원봉사자들이니 전문적 건설인부들보다 아무래도 손이 더디다. 7월 중순 유네스코(UNESCO)에서 외국 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하러 왔지만 그들이 보인 호의보다 실제 거둔 성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철암을 그리러 온 화가 한응전씨까지 스케치북을 던져놓고 날마다 공사장에 매달려 있다.
“학상들 이렇게 고생해서 어떡혀.” 공사 중에 큼지막한 수박 한 덩어리를 들고 온 김정자(66) 할머니는 집수리 4호 주택에 사는 독거노인이다. “봄에 학상들이 집에 몇번 왔다갔다하더니 집을 고쳐준다고 하대. 내가 돈이 있어야지. 됐다고 하니까 돈은 10원도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째 세상일이 그러나. 그래서 또 싫다고 했는데 자꾸 괜찮다니까 그냥 둔 거요. ” 충북 충주에서 나고 자란 김정자 할머니는 30년 전에 갓 돌 지난 여섯째를 업고 가족과 함께 철암으로 이사왔다. 장애인인 남편이 일을 할 수 없어 여섯 아이들과 함께 눈앞의 끼니 걱정을 하던 그에게 사촌오빠가 탄광에 가면 굶어죽지는 않는다고 말해줬다. 선탄장에 취직해 탄더미에서 석탄 고르는 일을 한 지 불과 한달여 만에 운반수레에 옷이 끼어 수십m를 구르는 사고가 일어났다. 정신을 되찾은 건 사고가 난 지 나흘 만이었다. 한달 뒤 성치 않은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 진통제에 몸을 의탁해 막노동판과 식당, 밭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렸지만 워낙 팍팍한 살림이라 제대로 교육시킨 자식이 없었다. 타지로 뿔뿔이 흩어진 자식들도 먹고살기 바빠 김씨가 의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동사무소에서 달마다 나오는 생계보조비 15만원으로 생활하는 그는 심장이 좋지 않다. 동네병원에서는 서울의 큰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지만 차비가 여의치 않아 그것도 미루고 지낸다. “겨울에 바람만 불면 지붕이 날아갔어. 내가 딴 이야기는 안 했지만 지붕이 날아가지 않게 지어달라는 부탁은 하나 했지. 참 복도 없어. 바깥양반이 3년 전에 저 세상 갔거든. 5, 6년만 더 살았으면 70평생에 한 1년이라도 뜨신 방에 몸 누이고 살다 갔을 텐데….”
절망에 찌든 사람들에 희망을 심는다
철암 지역에 남아 있는 주민들의 상당수는 김할머니처럼 “오도가도 못하는”노인들이다. 기대도 희망도 없이 사는 주민들에게 철암도시작업팀이 내놓은 회생 프로그램이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0년 전부터 선거철이면 약속한 산업단지 유치가 번번이 무산됐다. 교통입지도 좋지 않고 사회간접자본도 전무하다시피 한 이곳에 공장단지가 들어선다는 건 애당초 현실성이 떨어지는 구상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건축가들이 이 도시를 주목하고 회생 가능을 점친 까닭은 바로 이러한 불가능 때문이었다.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 건축가들로서는 희망의 단초였지요. 자본의 힘이 작동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처럼 순식간에 파헤쳐지지도 않습니다. 더디더라도 도시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재생을 도모할 수 있는 거죠.”
99년 본격적으로 작업팀을 구성한 건축가들이 실측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주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워낙 외부인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한 터였다. “대통령도 어쩌지 못한 철암을 그깟 교수·예술가들이 구제할 수 있겠느냐”, “듣기는 좋은 이야기지만 그게 되겠느냐?”는 반응이 태반이었다. 외부 자본에 의한 변신이 아니라 도시의 고유성을 보존하는 회생 프로그램에는 주민들과의 토론과 공조가 필수임에도 지난해까지 건축가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은 냉담하기만 했다. 석탄 관련시설과 하천변 상가의 남루한 건물들을 관광자원화하고, 철암지역의 중·고등학교를 미술과 공예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대안학교로 육성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방안 등은 1∼2년에 어떤 보장을 해주는 대안이 아니다. 꽃노래 같은 약속에 지친 주민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원했다.
지난해 여름 건축도시작업팀은 선탄장에 조명시설을 시범적으로 설치했다. 독일의 루르 등 서구에서 폐광을 관광자원화하는 데 널리 이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여름 밤 하늘 위로 초록과 파랑, 노랑으로 빛나는 석탄장은 젊음을 저당잡히고 버려진 늙은 육체처럼 흉물스런 대낮의 모습이 아니었다. 예산문제로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지만 이 행사를 계기로 주민들의 마음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도시건축팀이 콜페스티벌을 기획한 연유도 주민들에게 들썩이고 꿈틀거리는 철암을 몸으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꿈틀거림은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체감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주민들도 동참… 역사를 갤러리로
“처음에는 쉽지 않았죠. 주민들과 함께 축제기획팀을 만들어야 하는데 팀 구성이 어려웠습니다. 예산확보도 여의치 않았고요. PC방에서 우연히 뜻있는 젊은 주민 몇몇과 만나면서 진행이 급진전을 이루었죠.” 축제의 총감독을 맡은 건축가 전인호씨는 이번 축제의 가장 큰 수확은 “손잡고 일할 수 있는 주민들을 만난 것”이라고 말한다. 김재호·김동현·이찬우씨 등 철암초·중·고 동창생인 나이 사십의 ‘청년’들은 발 벗고 나서 축제 추진에 나섰다. “노인분들은 거의 ‘되겠나’ 하는 반응이었어요. 1천만원 정도 목표한 주민모금운동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요. 그래도 극장 하나 없는 이 도시에 이런 볼거리·놀거리 하나쯤은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일을 시작했습니다.” PC방을 운영하는 김동현(40)씨는 한달 넘게 PC방 일을 제치고 축제에 매달렸다. 집수리 현장에 가서는 젊었을 적 익힌 설비기술을 발휘했다. 결국 500만원의 돈을 거뒀고, 태백시에 요구해 500만원을 받아냈다. 부녀회, 적십자 태백봉사회 등에서 나온 주부들은 매일 아침 5시에 나와 집수리 작업팀과 축제준비팀의 식사를 준비했다.
도시작업팀은 올 1학기부터 철암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달에 두번씩 토요일에 건축교실을 열고 있다. 철암회생 프로젝트의 하나인 미술과 공예교육 프로그램의 시범사업이다. “중고등학생들은 ‘쪽팔려서’ 교복 입고 근처 도시인 황지에 나가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어린 학생들조차 고향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 역시 철암은 떠나야 하는 곳으로 알고 있지요. 함께 건축의 개념을 배우고 지역의 건축물을 답사하면서 먼저 그런 생각들을 떨쳐내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교육 프로그램에 뛰어든 것은 도시작업팀뿐만이 아니다. 지난 해 10월부터 매달 철암그리기 작업을 하는 미술가 모임 할아텍은 한달에 한번 철암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미술교실을 연다. 또한 작가들의 철암그리기 작업은 놀고 있는 철암역 내 공간을 활용해 태백시 최초의 갤러리인 철암역 갤러리 오픈을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철암에 어울리지 않는 사치라는 비판도 있었어요. 물론 갤러리라는 곳이 일반인들에게 편한 공간은 아니지만 한명의 광부, 한명의 아이라도 보고 즐길 수 있으면 행복한 거 아니겠어요?” 70년대부터 지역운동을 해온 원기준 광산지역 사회연구소장의 말이다. 지난 2월부터 매달 철암그리기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해온 철암역 갤러리는 여름방학 동안 아이들이 미술교실에서 한 작업들을 전시하고 있다. 종이를 이어붙여 그린 커다란 철암동 풍경화에는 기차도 있고 탄광도 있고 동물원도 있고 근사한 쇼핑센터도 있다. 아이들이 꿈꾸는 철암에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이다.
축제 둘쨋날 밤 열린 재즈페스티벌철암이 시작할 무렵 객석이 빼곡히 들어찼다. 전날과 달리 멋진 조명을 설치하고 방송국 카메라도 등장하니 철암 주민들에게는 진기한 볼거리다. 흰 머리가 성성한 옆자리 할아버지에게 “재미있으세요?” 하고 물으니 “내가 음악을 아나. 그냥 보는 거지”라고 대답하면서도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국악을 현대화해 연주하는 최소리 그룹이 아리랑을 연주하자 노인들이 나와 덩실덩실 춤추고, 청소년들은 아이돌 스타의 콘서트에 온 마냥 깡충깡충 뛴다. 기분좋게 취한 한 주민은 “다들 일어나 박수쳐. 그래야 수준 있는 거야. 그래야 이런 잔치도 계속하지” 하며 분위기를 돋운다. 자정까지 계속된 콘서트는 기획자와 공연 뮤지션들의 염려와는 달리 주민들의 환호 속에 마무리됐다.
10년 뒤 철암은 어떤 모습일까
페스티벌의 성공은 철암이 사람 사는 도시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작은 출발이다. 아직도 풀어야 할 문제들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태백시에서 추진하는 태백 4차선 관통도로가 이곳에 뚫리면 상가들 대부분이 헐리고 철암의 기반이 뿌리째 무너진다. 상가 주민들 가운데도 도로공사에 따른 보상을 받고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시작업팀이 기획하는 탄전 관광자원화, 철암천 복원, 상가 리모델링 등이 완성되려면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10년 바라보고 시작한 일입니다. 더 걸릴 수도 있겠죠.” 건축가 주대관씨의 말대로 지금은 모든 게 시작, 아니 시작을 준비하는 서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페스티벌과 집수리 작업을 통해서 쓰러져가는 도시 철암은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라는 재생의 주춧돌을 조심스럽게 세우고 있다.
* 사진제공: 원기준 광산지역 사회연구소장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주민들이 떠나 을씨년스러워진 철암역 상가뒤편.
“십리 건너 한 사람, 오리 건너 한 사람 만난다”는 식당 주인의 말처럼 지난 10년 동안 탄가루 대신 적막과 절망이 대기를 파고들던 이곳에 최근 미세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7월30일 찾아간 철암동 복개천 입구에서 휘날리던 ‘철암 콜(coal)페스티벌’ 깃발은 이곳의 작은 변화를 알려주는 징표다. 10일장이 들어선 복개천 주차장에는 작은 무대가 마련되었다. 그날 오후 찾아간 이곳에는 주민노래자랑이 한창이었다. 땡볕을 가릴 데가 없어 300개나 되는 객석이 많이 차지는 않았지만 아이와 주부, 노인 20여명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무대에 올라가 한껏 목청을 돋운다. 옆에 서 있는 천막에는 ‘탄광음식축제’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여기 막걸리 한 주전자 더”라고 소리치는 앉은뱅이상 앞에 앉은 노인들의 얼굴은 밝지만은 않았다. 이 축제는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고 다니는 전국노래자랑조차 열리지 않던 철암에서 처음 열리는 마을잔치다. 화려한 무대도 번듯한 테이블도 없어 축제의 풍경은 울긋불긋 물건을 진열해놓은 좌판의 풍경에 묻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축제는 관에서 큰돈을 투자해 요란하게 펼치는 전시성 축제가 아니라 마을주민들의 힘으로 준비한 순수 민간행사이기 때문이다. 예산도 홍보도, 행사 내용도 옹색함을 떨쳐내기 힘들지만 강원도 어느 대도시도 하지 못한 주민 주최의 축제가, 침체된 탄광지역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낙후한 철암에서 열린 것이다. 같은 시각 축제현장보다 북적거리는 곳은 마을 복지회관 위쪽 삼방동의 주택개조 현장이다. 시멘트 블록이 쌓여 있는 15평 남짓한 건물에 한창 지붕이 올라가고 있다. “00야, 스티로폼 좀 가져와”, “모래가 너무 많아, 비율이 8 대 1은 되겠다.” 지붕에 위태롭게 올라간 철암지역건축도시작업팀의 기획총괄을 맡은 건축가 주대관(엑토건축도시연구소장)씨 아래로 여남은명의 학생들이 단열재 시공에, 시멘트 제작에 한여름의 더위를 잊는다. 지난 7월10일부터 집수리 작업에 들어간 삼방동 독거노인 주택 다섯호 가운데 1호 공사현장이다. 서울의 건축가 그룹과 건축학과 대학생들로 구성된 철암도시작업팀은 지난 7월10일부터 이곳에 들어와 무상으로 집수리를 하고 있다. 예술적 재탄생 돕는 건축가와 대학생들

사진/ 7월10일부터 철암지역의 독거노인 주택 다섯호의 집수리를 하고 있는 철암지역도시건축 작업팀.

사진/ 지난해 7월 철암역 선탄장에 설치했던 조명시험.

사진/ 7월31일 열린 재즈페스티벌 철암.

사진/ 지난 2월 철암역 내 빈공간을 활용해 만든 철암역 갤러리. 철암초등학교 학생들이 미술교실에서 작업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