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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휴가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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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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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노부부 또는 아줌마 혼자 농사짓는 집이 많은 우리 마을에서는 고추농사가 한해 살림의 성패를 좌우한다. 태양초로 이름 높은 영광고추는 그만큼 손이 많이 가고 여름부터 가을걷이까지의 유일한 돈줄이다.

고추 따고 말리고 장에 내다팔기까지의 일품은 작은 손이라도 귀한데 휴가 때 밀어닥치는 휴가 농사꾼이 반가운 것은 말해 무엇하랴. “올케야? 이번 휴가 7월31일부턴데 고추 한창 딸 때지?” 사람 좋은 큰고모는 벌써 한달 전부터 휴가 고추농사 준비를 알리는 전화를 1주일 단위로 해댄다.

올해 ‘휴가농사’ 인파(?)는 서울 사는 큰고모와 시동생네 식구, 막내 시누이 등 어림잡아 10여명을 헤아릴 것 같다. 큰고모야 친정부모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파서겠지만, 3년째 휴가를 고추농사에 고스란히 반납하는 식구들이 고맙다. 동서는 집에서 바글거리는 아이들 다섯이나 거두느라 일품은 못 거들어도 15∼16명 밥해 먹이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는다. 집에서나 산·바다에서나 휴가철에도 쉬지 않는 노동이 있다면 가사노동이리라. 집안일보다 밭일이 낫지 싶어 동서도 늘 고추밭으로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3살짜리 딸을 아직 떼어놓지 못해 매번 ‘티도 안 나지만 안 하면 큰일나는’ 가사노동으로 밀려난다.

시부모와 함께 농사지으며 사는 농촌 며느리들은 휴가철이 괴롭다. 날은 뜨겁지, 집은 좁지, 여름 반찬도 부실하지, 모기는 많지, 뜨거운 여름날 식구들 치다꺼리하려면 가히 명절증후군에 버금가는 ‘휴가증후군’에 시달린다. 부모 맘이야 내 삭신 녹아내려도 자식과 손자새끼 얼굴이라도 뵈어주고 놀다라도 가면 좋지만 농사일에 바쁜 며느리는 내 휴가는 고사하고 손님 같은 식구들 맞이에 일품이 자그만치 드는 게 아니다.

여자들끼리 돈독해진 자매애 덕일까? 다행히 우리집 여자들만은 휴가철 고추따기와 가사노동을 나눌 줄 안다. 시누이, 올케, 시어머니, 며느리 따지지 않고 일하고 들어와 한끼 별식은 큰고모가 맡고 메인요리는 어머니가 그리고 작은 반찬들은 동서와 내가, 셋째와 막내 고모는 설거지와 청소, 조카들을 거둔다. 아들 둘에게 청소를 맡기며 가끔 시동생도 가사노동에 끌어들이려 하지만 형수 눈치에 시늉만 낼 뿐 번번이 실패다.

아버님과 고모부는 워낙 부지런하셔서 이름모를 채전거리를 한 바구니씩 캐다놓아 저녁 마당가에 차려진 밥상을 풍성하게 한다. 하루 노동 끝에 마신 소주 한잔과 함께 하늘을 찌르는 전셋값, 생산직 노동자의 고달픔, 영세사업장 사장의 어려움, 초등학교 들어간 성호와 영재 이야기, 쌀농사 걱정들이 쏟아지고 서른 넘은 셋째시누이 결혼 이야기까지 나와야 부스스 자리 털고 파장을 맞는다.

이틀 동안 딴 고추를 마당과 비닐하우스에 가득 널어놓고 풍성해진 마음 안고 영광의 작은 바닷가 모래미 해수욕장에서 고추에게 질세라 빨갛게 몸을 달구며 마지막날의 휴가를 즐긴다. 컵라면에 수박 한통만으로 배부른 하루 해수욕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 1년 동안 우리집 수문장이었던 개들이 자취를 감춘다. 아버님은 사위대접을 위해 우리들 놀러간 틈에 보신탕으로 만들어내신다. 올해 우리집 지리(개 이름)의 운명도 이미 결정나 있다.


초복·중복이 지나도록 아껴둔 닭 3마리와 성호의 애완토끼도 ‘지리’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듯싶다. 시골 밤하늘의 별무리를 오롯이 맞으며 곤한 잠들 수 있게 대형 모기장이라도 빌려봐야 쓰겄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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