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눈을 압도하는 서울 거리의 간판들.쾌적한 도시환경을 위한 정비가 시급한 상황이다)
“닭집에 뭐하는 거래?”
“몰라, 예술이래.”
“닭집에 뭐가 있다고 예술을 해?”
9월20일 저녁 서울 홍익대 앞 서교오피스텔 뒷골목. 골목 중간의 작은 닭집인 경기닭집 앞을 지나가는 두 아주머니가 닭집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힐끗 쳐다보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이른바 ‘시장통’으로 불리는 이 골목에서는 이날 오후 내내 뚝딱뚝딱거리는 작업소리가 계속됐다. 마흔두곳의 작은 음식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허름한 골목에서 좀처럼 보기드문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와 열곳의 가게를 화폭삼아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드는 전시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간판에 콜라쥬와 오브제가…
(사진/'돼지'그림만으로 정육점임을 알려주는 문병두씨의 작품(위). 원조골뱅이집의 원래 입간판과 새로 만든 정수진씨의 간판)
그 예술은 바로 흔하디 흔한 ‘간판’이다. 천편일률적인 간판을 새로운 시각이미지 실험의 재료로 삼자는 ‘시장통 메이크업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대화처럼 조그만 닭집인 경기닭집에도 커다란 천에 닭과 사람을 그린 강경민씨의 ‘예술’ 간판이 변변한 간판조차 없던 닭집 위에 새로 걸렸다.
‘시장통 메이크업전’이 열리는 홍대 앞 시장통 골목은 여느 골목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서울의 뒷골목이다. 그리고 온갖 색깔과 글씨로 범벅이 된 난삽한 간판들이 행인의 눈을 압도하는 곳이다. 세련된 상업지역으로 꼽히는 홍익대 앞에서도 가장 낡고 퇴락한 골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간판 역시 폼나고 산뜻한 것보다는 유치하고 요란한 것들만 덕지덕지 건물을 뒤덮고 있다. 그런 간판에 예술적 시도를 덧씌워 가게의 특성과 거리 분위기에 맞는 새로운 시각이미지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시장통 메이크업전’이다. 이 골목 10곳의 점포 간판을 젊은 미술가들이 각각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오후 6시께 모든 작품이 걸리고, 전시회는 시작됐다. 열개의 ‘작품’들은 20여m 안팎의 골목 군데군데 전시회를 알리는 붉은 깃발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골목 초입의 동보정육점에는 문병두씨가 만든 새 간판이 달렸다. 투명한 아크릴판에 돼지가 새겨져 불빛을 받으면 돼지의 하얀 모습이 더욱 부각되는 간판이다. 이어지는 신발가게에도 인조잔디로 만든 널판에 신발이 콜라주처럼 그려진 정주은씨의 ‘작품’이 걸렸고, 원조골뱅이집 입간판은 정수진씨가 ‘골뱅이’로 흔히 부르는 컴퓨터 자판의
‘@’가 접시 위에 가득한 그림으로 바뀌었다. 맨 마지막 서교매운탕집 간판은 만화형식으로 만들어진 권기수씨의 작품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압도하는 서울 거리의 간판들을 보는 순간 구토증상이 몰려왔어요. 도대체 왜 저렇게 어지럽고 시각적으로 폭력적인 간판들만이 거리를 뒤덮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가장 친숙한 시각문화로서 간판을 주목해 간판을 예술가의 미감으로 ‘메이크업’해보자고 한 거죠.”
이 전시를 기획한 이세영씨의 말처럼 시작은 누구나 느끼는 문제에서였다. 이산가족을 만나러 온 북한 방문단이 서울 거리를 구경한 뒤 품평한 첫마디가 “도대체 왜 저렇게 외국어가 많고 요란스런 간판들이 거리를 뒤덮고 있느냐”는 지적이었을 만큼 서울의 간판문화는 많은 이들로부터 심각한 문제로 지적돼 왔다. 건물 외벽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간판들이 건물 전체를 덮는 경우도 흔할 정도로 서울은 간판으로 ‘오염’돼 있다. 오로지 자기 상점만을 알리기 위해 절규하듯 요란한 색깔과 글씨로 치장한 간판들이 덩어리를 이루고 있어 행인들은 되레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문제는 질서도 없고 주변과 조화도 없이 온 거리가 그렇게 난잡스런 간판에 뒤덮이는 바람에 도시의 이미지를 망치고 보행자들에게도 불편스럽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나아기지기는커녕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보기싫은 커다란 제호부터 없어지다
(사진/권기수씨의 서교매운탕집간판(위). 정수진씨가 작품을 설치하고 있다) ‘시장통…전’은 그런 서울의 거리에 대한 젊은 미술기획자들의 대안제시다. 권용주, 이세영, 이소연씨 등 20대 중반의 젊은 미술기획자들이 처음으로 여는 데뷔전시이기도 하다. 박용석, 홍장오, 권기수, 이성현씨 등 20∼30대의 젊은 작가들이 참여한 이 전시는 새로운 예술의 해를 맞아 문예진흥원이 후원하는 기획공모전에서 당선된 전시회다. 무엇보다도 거리의 간판을 미술가들이 직접 만들고 그 간판이 업소의 진짜 간판으로 쓰인다는 점, 그 골목이 전시회장이고 가게가 작품으로 행인들에게 다가간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기획처럼 전시는 쉽지 않았다. 시장통 골목은 무허가 상가건물이 언제 헐릴지 몰라 상인들도 건물에 대한 애착이 없고, 당연 간판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이었다. 한국 미술의 구심점이랄 수 있는 홍익대 앞이어서 많은 미술학도들과 미술가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토론을 벌이는 골목이면서도, 미술과는 거리가 먼 풍경만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열곳 가게를 섭외해 가게마다의 특성과 주인의 성격, 거리풍경과의 조화를 고려해 가장 그 가게를 대변해줄 수 있는 간판을 만들기에는 거리 환경이 워낙 열악했다.
일단 마흔두곳의 가게를 모두 돌아다니며 섭외하는 데만 한달이 걸렸다. 간신히 10개 가게를 섭외한 뒤에도 난관은 단계별로 이어졌다. 간판을 작품으로 하는 만큼 일방적인 관람용이 아니라 공공미술적 개념을 적용해야 하는데 그런 의도를 주인들에게 관철시키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점포주인들은 상호나 메뉴를 크게 써주는 간판을 원했고, 작가들은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작품 성격상 점포주와 작가의 교감이 중요했기 때문에 결국 원안대로 가지는 못했다.
난산 끝에 완성된 간판은 저마다 다양한 실험성과 형식, 해석을 담아 제각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는 완벽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간판 가득 커다란 글씨로 쓰게 마련인 제호를 없앤 것이다. 제호 없이 가게가 파는 물건을 오브제처럼 묘사하기도 했고, 유머와 재치를 보태 간판을 회화작품처럼 꾸미기도 했다.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 가장 대안적인 작품은 동보정육점의 돼지 그림 간판과 신발가게의 새 간판. 모두 가게의 품목만을 구체화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뭘 파는 가게인지를 충분히 전달한다. 원조골뱅이집의 입간판 작품 역시 기존 상업간판의 꼴과 특성을 그대로 유지해 미술작품으로서보다는 간판적 기능에 충실하고자 한 작품이다.
반면 실험성이 충만해 선뜻 간판으로 보이지 않는 작품도 다양하다. 지민호씨의 장충왕족발집 간판은 돼지가 지나가는 모습과 돼지발이 그려진 두개의 도로표지판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가게 앞 길바닥에 횡단보도 표식을 그려 도로표지판과 건널목을 보고 자연스럽게 족발집으로 안내되도록 설치했다. 그리고 가게입구에는 슬라이드 영사기를 달아 밤이면 길바닥을 스크린삼아 돼지와 돼지발 모습이 비춰져 행인들의 눈길을 붙잡으며 간판의 호객기능을 한다. 그 왼쪽 진미식당 입간판은 그 자체가 현대조각품이다. 이성현씨가 만든 이 간판은 여러 겹의 비닐막에 사람의 몸 이미지를 중첩시킨 뒤 불빛을 비춰 현대적 이미지를 강조했다.
“저 네온사인을 이기지 못하겠다”
(사진/강영민씨의 '경기닭집'간판(위). 박용석씨의 '감자탕 이층집'간판) 가장 실험적인 간판은 배동혁씨가 만든 간이식당 모모집. 배씨는 간판을 단순히 건물 입구에 다는 판 형식이 아니라 모모집 전체의 이미지로 해석했다. 그래서 낡고 허름한 모모집 건물 전체를 연두색 비닐로 덮고 가게 입구 차양에는 주인 아주머니의 파마머리를 연상시키는 꼬불꼬불 은박실뭉치를 붙였다. 처음에는 “가게를 완전히 우스꽝스럽게 버려놓는다”며 괜히 전시섭외를 받아들였다고 걱정하던 주인 아주머니도 자꾸 보면서 눈에 익고 진미식당이 골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장통…전’은 10월20일까지 한달 동안 10곳 소점포들이 작품으로 골목 전체가 열린 전시장으로 시민들에게 그대로 전시된다. 작품 간판을 내건 가게들은 빨간 깃발을 꽂아 작품임을 알릴 뿐 늘 그랬든 골목 속 가게 그대로 유지된다. 그리고 작품 간판들은 전시를 마친 뒤에도 대부분의 가게에 기증돼 가게의 간판 구실을 이어가게 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참신함이 돋보였지만 이번 전시는 많은 아쉬움도 남겼다. 그것은 우리 간판의 문제점이 너무나 심해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였다. 단순한 돼지그림으로 픽토그램처럼 만든 동보정육점의 간판은 이미 이 작은 정육점 전면을 덮은 3개의 간판과 선전문구가 전면유리에 크기에서부터 압도당해 보였다. 다른 가게들 역시 워낙이나 낡고 칙칙한 건물들, 그리고 그 위에 붙어 있는 현란한 원색 문자들 속에서 돋보이기가 힘들었다. 작가 배동혁씨는 “어떻게 꾸며도 저 네온사인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물론 소득은 있었다. 무엇보다도 미술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상인들에게 이번 전시회는 문화의 향기를 느껴보는 귀중한 체험을 선물했고, 간판문화에 대한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진미식당 주인 박녹주(46)씨는 “요란하지 않고 은은하고 세련된 새 간판을 보고 미술이 생활과 먼 것만은 아니라고 느꼈다”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새 간판 보면서 괜찮아하는 표정을 보면 뿌듯하다”고 만족해했다. 또한 싼값으로도 미술적 노력이 가미되면 새로운 간판문화를 일굴 수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 제작된 간판들은 평균 50만원씩 들어갔다. 단순히 간판이 아니라 가게 분위기를 고치느라 일부 작품에 그 이상이 들어가는 바람에 높아진 금액이다. 정수진씨의 원조골뱅이집 입간판은 불과 5만원 정도 들었을 뿐이다. 기존의 유치찬란한 간판과 비교해도 많지 않은 금액이다.
(사진/배동혁씨가 꾸민 모모집 앞에 선 세 기획자들.왼쪽부터 이소연,권용주,이세영씨)
결국 문제는 모두의 문제다. 어느 한 간판만으로는 도시의 풍경은 바뀌지 않는다. 네온사인 자율화 이후 서울 거리의 간판들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이런 경향이 지방도시에도 그대로 이식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안적 모색도 나오고 있다. 간판업체에 디자이너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고, 지난해에는 한 전문대학에 간판디자인학과가 생기기도 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아셈과 올림픽 등 주요 국제행사를 앞두고 간판 색깔을 통일하는 시안을 제정하는 등 간판 규제안도 강화되는 추세다. 아직은 그 성과가 미미하지만, 이번 ‘시장통…전’은 젊은 미술인들이 생활 속의 문제인 간판을 주목하고 그 대안을 찾으려 시도했다는 점, 또한 미술이 생활 속으로 돌아오는 몸짓이라는 점에서 반가운 소식이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