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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골병든 세상을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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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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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농성장에 5개월째 머물고 있는 환경미술가 최병수씨의 ‘살림의 예술’

사진/ 환경미술가 최병수씨는 삶의 현장에 예술적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농성장에서 쫓겨나 병실로 간 최씨. (박승화 기자)
환경미술가 최병수(42)씨가 머물고 있는 북한산 기슭의 경기도 송추 작업장에 찾아가기로 한 7월25일,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오전 10시쯤 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라는 안내인의 목소리가 연거푸 나오다 가까스로 연결된 통화에서 최씨의 지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병원인데요….” 그날 새벽 북한산 관통도로 건설반대 농성장에서 벌어진 난입사건과 최씨를 연결시키지 못한 건 기자의 불찰이었다. 지난 3월부터 농성장을 지키던 최씨는 현장에 들이닥친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해 응급실에 실려가 있었다.

용업업체 직원에 구타당해 병원신세

병원에서 만난 그는 온몸이 시퍼런 멍투성이에 찢어진 오른발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언제 그런 사고가 있었냐는 듯 유쾌하고 기운찼다. “망루에서 혼자 자고 있는데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전기톱으로 망루로 이어진 다리를 끊었지. 얼마 동안 전기톱을 가지고 접근을 막았는데 기름이 떨어지니까 이놈들이 이만한 쇠파이프를 들고 뒤쪽에서 막 몰려오는 거야. 손발이 꽁꽁 묶여서 멧돼지마냥 끌려내려왔지요. 하하. 참 허무하더만.”


잠시였지만 미술작업용 휘발유와 시너까지 뿌리며 혼자 대치했던 상황은 말로만 들어도 위험천만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을 최루탄 가루를 산소삼아 시위현장에서 살았던 그에게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듯 최씨는 여유있어 보였다.

승려도 아닌 최병수씨가 북한산 농성장에서 5개월째 머무는 이유는 이렇다. “지난 3월에 수경스님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근데 북한산을 보니까 나무들이 모두 잘려가지고 말이 아니더라고. 이러니 아프지 않으실 수가 있었겠요? 부안에 있던 짐들 다 용달차에 실어서 이곳으로 올라왔지요.” 최씨는 북한산에 오자마자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 붉은 페인트를 칠해 피흘리는 북한산을 나타내는 설치작업을 했다. 뫼 산자 모양을 한 나뭇가지를 주워 산솟대를 세웠다. 그는 2000년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운동 때도 간척으로 죽어가는 갯지렁이를 형상하는 솟대를 세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솟대 끝에는 새가 얹혀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기 때문이다.

그는 산솟대를 북한산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완성했다. 그의 작업은 늘 이런 식이다. 가지고 다니는 끌과 망치, 톱과 도끼로 뚝딱뚝딱 작품을 완성한다. 몇날며칠을 작업실에 은둔하며 산고 끝에 작품을 내놓는 예술가의 통념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미술 하기 전에 12년 동안 내가 가졌던 직업이 스무 가지가 넘잖아요. 새로운 일을 배우려면 어깨 너머로 빨리빨리 익혀야 하거든. 눈치가 빨라졌지. 어떤 상황에서도 막 짜내면 그냥 나와요. 노가다지 뭐.”

최씨는 87년 연세대생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거대한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옮겨 민중미술에 큰 흐름이 된 걸개그림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당사자다. 이를 계기로 전업작가에 뛰어들기 전까지 최씨는 중학교 중퇴 뒤 선반공·보일러공·목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순발력을 단지 여러 종류의 손노동에서 익힌 기술에 바탕해서만 볼 수는 없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위현장에서 분초를 다투며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의 작품에서 ‘현장’은 디테일보다 중요한 생명력이었다. “어릴 때부터 뚝딱뚝딱 만드는 걸 좋아하기는 했지만 화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지금도 그래. 싸워야겠다는 생각에서 미술을 선택한 거니까 나에게 그림이나 조형물은 도구인 셈이지.”

미술은 싸움의 무기… 환경에 대한 열정

사진/ 지난해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현지 예술인들과 함께 제작한 솟대 앞에선 최병수씨. (CATALIN)
그는 <노동해방도> <반전반핵도> <장산곶매> 등 시위현장을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장면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는 작품을 그려왔다. 90년대부터 그의 작품 소재는 환경문제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촌 환경정상회담 행사장 앞에 걸려 <타임>에도 소개된 걸개그림 <쓰레기들>은 환경미술가 최병수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작품. 그러나 당시 그를 보는 ‘운동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환경운동이 본격화되지 않았던 때라 ‘최병수가 맛이 갔다’ 이런 이야기를 엄청 들었어요.” 그가 환경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10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어릴 때부터 노가다를 하면서 라면만은 절대로 먹지 않았어요. 나이든 사람들을 보면서 라면 같은 인스턴트 식품이 얼마나 사람을 망가뜨리는지 봤으니까요. 시위현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작업할 때는 라면 안 먹고 꼭 밥먹는다고 내 별명이 부르주아였잖아요.” 어릴 때부터의 체험을 통해 그는 먹을거리를 비롯해 자연을 거스르는 생활이 인간뿐 아니라 세상을 병들게 만든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다 88년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을 보며 환경문제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공장의 열악한 환경과 폐수로 인해 폐가 녹아내리는 지경의 노동자들이 임금투쟁을 하는 게 납득이 안 됐어요. 자본가의 지시에 따라 폐수를 강에 버리면서 임금투쟁을 하는 건 주인된 사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당시 그는 전노협에 ‘노동자들에게 환경의식을 불어넣자’는 제안을 했지만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반응만 돌아왔다.

그때부터 최씨는 개인적으로 환경문제를 고발하는 걸개그림과 설치작업을 해왔고, 환경운동이 본격화된 90년대 중반 이후 해마다 ‘지구의 날’이면 가장 바쁜 작가가 됐다. “이제 와서 사람들이 내가 앞서갔다고들 이야기하는데, 그게 아니지. 오히려 늦은 거예요.” 그는 새만금, 북한산 등 나라 안뿐 아니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비롯해 네덜란드 헤이그, 뉴질랜드 웰링턴 등 환경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세계 지구촌 어디든지 달려가 자신의 작업장으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농성장 주변에서 8월26일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리는 ‘리우+10’ 환경정상회담에 들고 갈 설치작업 준비에 바빴다. 그가 구상하는 있는 것은 지구를 상징하는 커다란 물웅덩이에 둥둥 떠다니는 여섯 대륙을 띄운 설치물이다. 떠다니는 대륙은 지구온난화로 잠기는 땅을 상징한다. 그와 함께 걸개그림으로 준비한 시안은 칵테일 잔에 장식으로 꽂힌 지구가 녹아내리는 그림이다. 세계 정상들이 칵테일을 즐기는 시간에도 남극의 빙산은 계속 녹아내린다는 따끔한 경고의 메시지다.

사진/ 지난 4월 최병수씨는 북한산 관통도로 건설로 인한 환경파괴를 <피흘리는 나무의 마음>이라는 설치작업으로 형상화했다.
“지구를 하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머리통만 큰 기형인간이에요. 편하게 살기 위한 기술만 개발할 줄 알지 정작 손발은 움직이지도 않고, 손발의 중요성을 모르거든요. 환경운동이란 병든 지구에게 다시 건강을 찾아주자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운동의 두 가지 의미(무브먼트와 스포츠)를 다 포함한 것이지요.”

한·베트남 공원에 평화의 솟대 준비

그러나 최씨의 작업이 환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올 초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때 미국의 패권주의를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듯 그의 작업이 ‘도구’로 필요한 현장에서 그는 언제나 붓과 끌을 들고 나타난다. 오는 11월 베트남 푸옌성에서 준공되는 한국-베트남 평화공원에 설치할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솟대와 우정의 돌 제작도 한참 구상 중이다. “문화나 예술은 종합병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환경문제로, 전쟁으로, 또 황금만능주의로 세상은 온통 병들어 있거든. 예술은 응급처치가 필요한 이 세상을 담갔다 치유해서 빼내는 병원 구실을 해야지요. 저요? 의사가 아니라 병든 세상에 붕대도 감아주고, 창문도 열어주고, 몸에 좋은 음식도 날라다 주는 그냥 노가다죠.”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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