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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주방장을 빼낸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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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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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민주화운동의 자금 마련을 위해 보신탕집을 차리게했던 ‘화곡보신육’

사진/ 화곡보신육의 전북 장수군 음식풍의 풍성한 밑반찬. (김학민)
이탈리아 르포 작가 오리아나 팔라치의 <남자>라는 소설이 있다. 1970년대 그리스 독재정권 아래서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작가의 애인이 이 소설의 모델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비밀경찰에 구금되어 지하감방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온갖 악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를 악착같이 참아내는 이 사내의 투쟁이 눈물겨웠다.

이 사내는 민주화 투쟁이란 기본적으로 “독재자가 좋아하는 것은 따르지 않고, 독재자가 싫어하는 것은 적극 실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자기의 모든 행동을 이 원칙에 따라서 한다. 그리하여 이 사내는 비밀경찰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시시덕거리며 농담으로 일관한다. 독재자가 원하고 기뻐하는 것은 고문의 고통에서 오는 비명과 신음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과 보신탕에 얽힌 이야기는 417호에서 대충 기술했다. 그 당시 나는 친구들과 보신탕이라도 먹으러 갈라치면, 그 가운데 머뭇거리는 친구들에게 위의 <남자> 이야기를 해 분위기를 제압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보신탕을 금지했는데, 이 금지를 무시하고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불복종운동 아니냐, 독재자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의 출발이 아니냐, 이렇게 보통사람들도 일상의 삶 속에서 민주화 운동이 가능한 것이다, 어쩌고저쩌고.

민주화 세력과 전두환 정권과의 긴장이 고무줄처럼 팽팽하던 87년, 이렇게 보신탕을 통해서도 민주화 투쟁을 열심히 하던 한 그룹이 아주 ‘기발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당시 재야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사람들이 그들이다. ‘할일은 많고 자금은 없던’ 이들은 어느 날 화곡동의 유명한 보신탕집에 모여 소주 한잔을 걸치게 되었는데, 이야기 끝에 그 집의 하루 매상을 어림해보다가 민주화운동 자금조달을 위해 직접 보신탕집을 열어보자고 합의했다.

당시 민문협의 대표이던 전 YTN 사장 김종철씨는 수배 중이었는데도 그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수완좋게 그 집 주방장을 스카우트하여 기술적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당시 놀고 있던 장선우 감독의 동생 부부를 관리사장에 앉혔고, 유인택(영화사 기획시대 대표), 김영철(한겨레 스포츠레저부장)씨 등이 재야 어른들을 손님으로 끌어오는 ‘삐끼’ 역을 맡았다.


87년 ‘여름 특수’를 겨냥해 부랴부랴 6월 초 당산역 부근에 식당을 열었는데, 정국은 바로 6월항쟁 국면으로 들어가게 되어 모두 보신탕집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보증금 등 식당 설립자금을 모으면서 실질적으로 민문협을 이끌어온 김종철씨가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되고 말았다. 그해 6월 한달, 나는 오후가 되면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고, 밤늦게는 당산동에 가서 매상을 확인하고, 다음날 오전이면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면회를 가 김종철씨에게 민주화운동 상황과 보신탕 매상현황을 보고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80년대 문화일꾼들 모두 그 집의 개고기 맛에 혹하고, 그 집의 매상에 놀라고, 그래서 민주화운동 자금조달의 비책으로 보신탕집을 열기로 결정하고, 주방장을 빼낸 그 집. 바로 화곡동 본동시장 부근 화곡보신육(02-692-3404)을 10여년 만에 찾았다. 나지막한 단독주택이 아직 그대로였고, 여주인 조선제씨(60)의 수선스러움도 그대로였다. 전북 장수군 음식풍의 밑반찬 또한 옛 그대로 푸짐했다.

이 집의 특징은 개고기에서부터 밑반찬에 이르기까지 푸짐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냥 마구 가져다준다. 그러나 반말지거리 여주인의 설레벌레에 쉽게 넘어가지는 마시라. 꼭 먹을 만큼만 흥정하고 드시도록.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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