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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악몽의 쾌감을 즐겨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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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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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를 날리는 스크린 속의 공포체험… <디 아이> <폰>은 우리를 떨게 하는가

<식스 센스>의 소년은 “죽은 사람이 보여요”라고 말한다. 홍콩영화 <디 아이>(8월15일 개봉)의 시각장애인 문은 안구이식수술을 받은 뒤에 귀신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면서 두려움에 떤다. <식스 센스>와 <디 아이>가 옳다면, 우리의 주변에는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공존하는 것이다. 현실의 과학이나 논리에서는 단호하게 부정되는 그 무엇. 공포영화는 그 무엇을 파고든다. 그 무엇이 우리의 주변에 있다고, 또는 침입한다고 말한다. 관객은 인간을 위협하는 미지의 존재를 바라보며, 호기심과 두려움을 함께 느낀다. 공포영화는 현실에서 부정되는 것, 금기를 다루는 영화다. 금지된 것을 위반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다. 우리는 그 위반에 동참하고, 또는 소스라치며 두려움과 쾌감을 느낀다.

현실의 금기를 다루며 두려움 안겨

<가위>의 안병기 감독과 하지원이 다시 만난 <폰>(7월26일 개봉)도 그렇다. 그들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고, 그 원한과 복수는 초자연적인 공포로 돌아온다. <폰>은 전설의 고향 등에서 익히 봐온, 원한을 품고 죽은 여인의 복수극이다. 원조교제에 관한 기사를 썼다가 협박전화를 받은 지원은 전화번호를 바꾸지만, 여전히 이상한 전화가 걸려온다. 친구인 호정의 딸이 전화를 받았다가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뒤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불안한 지원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들을 찾아본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상하게 죽어갔다. 그리고 진희라는 여고생만이 실종된 것을 알게 된다. 진희가 사라진 뒤 친구들도 이상한 전화를 받았고, 한 친구는 스스로 자신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들었다.


공포영화는 극단적인 영화다. 인간과 초자연적 존재의 극단적인 감정과 행동을 그린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희생자는 죽어간다. 살인자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사람들을 도살한다. 평범한 공포영화 특히 난도질 영화는 단지 폭력의 쾌감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잘 만든 공포영화에는 분명하게 사회적 함의가 있다. 1920년대 독일에서 만든 초기의 공포영화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 <노스페라투> <골렘> 등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광기에 사로잡힌 당시 독일 사회의 불안을 은유적으로 드러내었다. 공포영화는 우리의 일상을 비현실로 끌어들이고 우리의 현실을 일그러뜨리는 마술 거울과도 같다. 사회적 배경이 모호한 <가위>보다 <폰>은 상류층 가정의 허위의식이나 원조교제의 고발 등 나름대로 사회적인 함의를 깔려고 노력했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다.

<폰>에서 대립되는 것은 사랑을 원하는 여고생과 완벽한 가정을 만들기를 바라는 상류층 여인이다. 누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랑과 가정을 위하여 두 여성은 목숨을 건다. 아니 그건 극단적 집착이다. 충분히 동정받을 수 있는 캐릭터임에도. 진희나 호정은 너무 편향적이어서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공포영화의 살인마가 아니라 원혼은 일반적으로 연민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스터 오브 에코>나 <식스 센스>가 말하듯이 그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단지 그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이니까. 하지만 <폰>의 여성 캐릭터는 내면의 무엇을 보여주지 않는다.

익명의 존재가 심장을 파고든다

<디 아이>에는 한을 풀어달라는 애절한 소원 같은 것은 들리지 않는다. 안구이식수술로 19년 만에 눈을 뜬 문이 처음으로 본 것은 검은 그림자.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차츰 그림자를 볼 때마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엘리베이터의 노인도, 식당에서 고기의 피를 핥는 여인도 자기만 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은 안구 기증자가 누구였는지를 조사한다. 타이까지 가서 찾아낸 기증자는 어린 시절부터 ‘마녀’라고 불린 여인이었다. 그녀가 실제로 어떤 위해를 가한 적은 없었다.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던 그녀는 핍박받다가 죽었다. 그녀는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방인이 된 것이다.

<드라큘라>에서 흡혈귀 이름이 드라큘라인 것을 안 하커는 단호하게 말한다. “네 정체를 알았으니 이젠 두렵지 않다”라고.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에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이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배척한다. 드라큘라는 이성과 합리주의의 시대에 당연하게 사라져야 할 비이성과 광기의 상징이었다. 공포영화의 괴물이나 악마는 주로 바깥세계에서 온다. 냉전시대였던 50년대에 괴물이나 외계인은 ‘공산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코폴라 감독이 재해석한 ‘드라큘라’는 현대 사회에서 물리쳐야 할 침입자가 아니라, 그릇된 가치와 질서에서 쫓겨난 이방인이다. 클라이브 바커의 소설을 각색한 <캔디맨>은 인종차별로 살해된 흑인노예가 현대 도시의 악몽으로 되살아나는 이야기다. 그는 호기심으로 거울을 보며 캔디맨을 세번 부르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난다. 사람들은 두려우면서도,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견고한 사회의 질서와 규범에서 벗어난 무엇인지를 갈구하는 것이다. 무지는 차별과 박해를 낳고, 죄의식은 공포를 부른다. 공포영화는 우리의 꿈과 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귀신과 괴물들은 인간의 억압된 자의식을 뚫고 나오는 본능적이고 순수한 존재라는 해석은 거기에서 나온다.

그런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단순한 놀람과는 다르다. 순간적으로 무언가 튀어나오고 잔인한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공포감이 생기지 않는다. <폰>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사회적인 의미나 캐릭터의 풍부함 이전에 진정한 공포다. 전작인 <가위>는 자극적인 음향효과와 돌발적인 충격효과만으로 관객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폰> 역시 마찬가지다. 귀신은 늘 급작스럽게, 귀가 따가운 음향과 함께 튀어나온다. 그건 강요하는 공포다.

낯선 일상이 안겨주는 지독한 공포

진짜 공포는 그런 게 아니다. 최근 폐막한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된 <검은 물밑에서>는 <링>의 감독 나카다 히데오의 신작이다. <링>에서 마지막 단 한 장면의 공포만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나카다는 ‘공포’의 본질을 알고 있다. 엄마는 목욕탕에 쓰러진 아이를 껴안고 황급하게 엘리베이터로 달려간다. 닫히지 않는 엘리베이터 문 바깥으로 자신의 집 현관문이 보인다. 그 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는 바로 그녀의 아이다. 그것을 안 순간, 엄마의 표정은 얼어붙는다. 아직 귀신의 모습은 나오지도 않는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조금씩 옆을 돌아다본다. 자신의 옆에 있는 아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어떤 충격효과도 없이 이 장면의 공포심은 극에 달한다. 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말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 이런 상황이 빚어졌는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한때 중고생 사이에서 유행한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란 말의 의미처럼, 공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 것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 느끼는 것이다. 익숙한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로 바뀔 때. 공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악몽이며 거울인 것이다. 우리 곁에 늘 있는.

김봉석/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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