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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갈래갈래 쫄깃쫄깃한 칡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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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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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유생 김원립의 한이 서린 신갈에서 유서깊은 신갈칡냉면을 찾아보라

사진/ 신갈칡냉면의 차림상. 양념통 하나 없이 무채한 접시와 가위만 내놓는다. (김학민)
“갈래 갈래?”

“갈래 안 갈래.”

두 사람이 전혀 웃지도 않고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슬쩍 엿들어본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최소한 70년대 중반까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에 살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암구호와 같은 이 대화를 풀어보자.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교차하고, 경부고속도로 수원 나들목이 있어 수도권 남부의 교통 요충지가 된 신갈(新葛)의 옛 이름은 갈천(葛川)이다. 갈천의 ‘천’은 ‘내 천’이니 갈내, 입말로 하면 ‘갈래’이다. 그러므로 “갈래 갈래?”는 신갈 주변 마을사람 한명이 친구에게 “신갈 가겠느냐?”고 물은 것이고, “갈래 안 갈래”는 “신갈에 가지 안 겠다”는 친구의 대답이다.

신갈의 옛 이름이 갈천이 된 데는 한 역사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얽혀 있다.


남원 유생 김원립(金元立, 1590∼1649)은 1613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모하자 몇몇 유생들과 함께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광해군의 미움을 사 유배되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김원립은 전라도 능주부사로 복위되고 곧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청나라 군사에 쫓겨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농성하매, 김원립은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와 과천 부근에서 청나라 군사와 접전해 청군 다수를 주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김원립은 여러 내직을 거쳐 종성부사직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 국경 백성들이 몰래 청나라 땅에 사냥하러 들어갔다가 청군에게 붙잡혔다. 굴욕적인 삼전도 항복 이후 청나라의 눈치를 심하게 보는 그 즈음의 상황에서 조정은 할 수 없이 김원립의 죄를 물어 종성부사직을 물러나게 했다.(<인조실록> 인조25년 10월9일조) 김원립은 이후 실의에 차 용인에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며 노후를 보냈다. 그가 낙향했던 지금의 신갈땅이 그의 아호 ‘갈천’을 따 갈래라 불리게 된 것이다.

참고로 1920년대에 북만주에서 김좌진과 함께 무장독립운동을 총지휘했던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장군(국가보훈처 제정 2002년 4월의 독립운동가)은 김원립의 직계손이며, 70, 80년대 투철한 민주화운동가였고 현재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김근태 의원도 김원립의 직계손이자 김혁 장군의 방계손이다.

신갈, 곧 칡개천 마을에 제법 괜찮은 칡냉면집이 하나 있다. 신갈칡냉면(031-282-1942)이다. 원래 칡냉면은 냉면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면발을 직접 눌러 뽑는 것이 아니라, 식품회사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면을 사용하는 것에서 오는 ‘획일화된 맛’에 대한 선입견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신갈칡냉면도 회사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한가지이지만, 10여년 동안 칡냉면만 만들어오면서 터득한 이 집의 주방장이자 사장인 최인숙(57)씨의 손맛이 이를 완벽하게 극복하고 있다.

적당히 끓는 물에 적당한 시간 삶아 찬물에 헹궈냄으로써 면발은 쫄깃쩔깃 차진 생명력을 갖게 되고, 여기에 이 집의 비법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매콤새콤달콤 육수와 삶은 달걀 반쪽, 새큰하게 익힌 무채를 얹으면 대한민국에서 한다 하는 메밀냉면집은 금방 잊어버린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 집에는 겨자, 식초, 고추양념통은 하나도 없고, 반찬이라고 덩그러니 무채 한 접시와 음식가위만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내 손에서 나온 그대로가 제일 맛이 있으니, 양념 더 넣을 것 없고, 육수 더 부을 것 없이 그대로 먹으라는 주인 최씨의 자부심이다. 또한 냉면발을 가위로 토막토막 잘라 낚시질하듯 건져먹지 말고, 쫄깃쫄깃 긴 면발을 입으로 끊어가며 탐스럽게 먹으라는 주인 최씨의 조언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제대로 된 집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이 집도 칡냉면 이외에는 아무 메뉴도 내놓지 않는다. 수육도 없고, 지짐도 없으며, 술도 없다. 오직 칡냉면뿐이다. 주방장인 어머니와 손맞춰 대학졸업반 막내아들(권성철·27) 혼자 분주히 주문받고 홀 서빙한다. 가끔 구시렁거리기도 하지만 궂은일도 마다않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사리(1500원)를 추가로 시킬 수 있지만, 냉면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보통(3500원), 대(4천원), 특대(5천원) 중에서 특대를 시키면 허리띠를 풀어놔야 한다.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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