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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공의식의 신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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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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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둘러싼 과학 미스터리 다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

사진/ (한겨레 황석주 기자)
체스 세계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한동안 고민하더니 항복을 했다. 불과 19수 만이었다. 상대는 아이비엠(IBM)이 만든 슈퍼 컴퓨터 딥 블루였다. 무게 1.4t짜리 쇳덩어리가 인간을 처음 무너뜨렸다. 1997년 5월의 일이다. 언론은 “기계의 지능이 인간을 넘어섰다”고 흥분했다.

체스게임의 핵심은 바둑과 마찬가지로 수읽기와 모양이다. ‘내가 이렇게 두면 상대는 이렇게 둘 것이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두고…’가 수읽기다. 컴퓨터는 이것이 장기다. 체스의 달인이 수십 수를 읽으면, 딥 블루는 500억 수를 본다. 반면 모양은 인간이 강하다. 달인은 적어도 10만개 정도의 유형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그때그때 상황을 직관적으로 판단해 전략을 세운다. 이 점에서 컴퓨터는 짜증스럽게 고지식하고 단순하다.

그렇다면 카스파로프는 왜 졌을까. 심리적 압박 때문에 졌다는 설명이 유력하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카스파로프가 둔 수의 절반가량을 딥 블루는 미리 예상했다. 숙고 끝에 한수 두었는데 컴퓨터는 노타임으로 응수한 것이다. 내 승부수에 상대가 끙끙대고 고심해야 기운이 나는 법이다. 결국 카스파로프를 무너뜨린 것은 기계가 아닌 그 자신이란 얘기다.

추리와 과학이 넘나드는 기나긴 모험


사진/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는 <뇌>에서 두개의 플롯을 과거와 현재로 교차하며 줄거리를 풀어간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일곱 번째 소설 <뇌>(원제는 <최후의 비밀>, 열린책들 펴냄)는 저명한 신경정신의학자 사뮈엘 핀처가 딥 블루를 상대로 인간의 설욕전을 벌이는 설정으로 시작된다(실제 설욕전은 오는 10월 바레인에서 블라디미르 크람니크와 새 컴퓨터 프로그램 딥 프리츠 사이에 열린다). 여기서 핀처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지만 그날 밤 톱모델인 약혼자와 사랑을 나누는 도중 돌연 죽는다. 무언가 심상찮은 낌새를 맡은 전직 기자 이지도르와 주간지 과학부의 아름다운 여기자가 심층취재에 나서면서 추리와 과학이 넘나드는 기나긴 모험이 펼쳐진다.

베르베르의 다른 소설처럼 <뇌>에서도 두개의 플롯이 주거니 받거니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줄거리를 진행시킨다. 기자들의 탐사가 현재 시점이라면 평범한 은행원인 마르탱의 이야기는 과거 시점에서 나란히 펼쳐지는 플롯이다. 교통사고로 눈과 귀 그리고 뇌를 뺀 모든 신경체계가 마비된 마르탱은 핀처 박사와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지능의 화신으로 탈바꿈한다. 마르탱과 핀처는 마침내 인간 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최후의 비밀’을 찾아낸다. 전기자극을 통해 쾌감을 무한대로 높일 수 있는 부위다. 핀처의 사망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인 “우리는 무엇에 이끌려 행동하는가”라는 질문은 베르베르가 놓지 않던 화두다. 앞서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이번과 똑같은 두 기자들이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를 탐구했다면, 이번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인간의 본질이 뇌 기능에 있다면, 그 기능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베르베르가 내놓은 답은 쾌락과 자극이 아니라 사랑과 공감을 통한 의식의 확대라는 것이다. 그는 최근 방한 기자회견에서 “오늘날 과학에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인 결론보다 소설을 읽어가며 기억에 남는 것은 인간과 기계의 숙명적인 싸움이다. 인간과 기계는 어떻게 다른가, 인공지능은 인간지능을 넘어설 수 있을까, 인공의식은 가능한가 따위의 질문이 저절로 떠오른다.

기억력 감퇴와 판단 착오로 애먹은 이들이거나, 사람들의 변덕과 일관성 없음에 환멸을 느낀 이들이라면 기계의 지능에 기대를 걸 법하다. <뇌>에서도 마르탱의 의식 한귀퉁이를 차지한 인공지능 아테나는 “언젠가 우리는 깨달을 거야. 컴퓨터 대통령이 통치할 때 우리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라고 속삭인다. 베르베르를 대변하는 듯한 이지도르는 이렇게 반박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그것은 기계가 제아무리 정교하고 복잡하다 해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어떤 것, 핀처는 그것을 동기라고 불렀지요. 내가 보기엔 유머와 꿈과 광기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지요.”

그들은 과연 우리 곁으로 다가올까

지난해 개봉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기계의 지능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현실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곳에 있다. 아서 클라크의 원작을 스탠리 큐브릭이 1968년 영화화한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보여준 우주왕복선이나 비디오폰 같은 공상과학기술은 실제로 2001년 현실화됐다. 하지만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을 갖는다던 슈퍼 컴퓨터 ‘할’은 아직 나오지 못했다. 기껏 일시적일지 모르는 체스 챔피언을 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딥 블루는 인간이 집적한 기능을 일시에 발휘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마치 석탄이 수억년 전 오랜 세월 받은 햇빛 에너지를 일시에 내보내는 것과 같다. 거기엔 아무런 비약도 창조도 없다. 최근 IBM은 딥 블루보다 1천배나 강력한 세계 최대의 슈퍼 컴퓨터를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1초에 10억번의 100만배나 많은 계산을 할 수 있는 이 컴퓨터 용도는 체스나 인공지능이 아니라 생명공학연구다. 우리 몸에 100조개나 있는 세포 하나를 연구하는 데도 테니스장만한 크기의 슈퍼 컴퓨터가 필요하다.

실제로 영화를 만들기도 한 베르베르는 <뇌>도 영화화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스토리는 영화를 보듯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불쑥 제시하는 놀라운 과학적 사실, 특유의 유머와 감각적 표현이 돋보인다. 특히 많은 한국 독자들에 대한 배려도 눈에 띈다. 여주인공은 태권도를 하고, 텔레비전에선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뉴스가 나온다. “먼저 짠맛이 나는가 싶더니 곧이어 단맛이 느껴지고 마침내 쓴맛과 신맛까지 가세”하는 동양의 케이크떡도 소개된다.

하지만 전체적인 재미는 <개미>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다. 뇌의 ‘최후의 비밀’ 부위를 자극받으려는 강한 동기가 두뇌기능의 놀라운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가정도 비약이다. 모험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처럼 덧없다.

조홍섭/ 한겨레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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