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례엄마의 내년 마늘농사
등록 : 2002-07-23 00:00 수정 :
어머니는 우리 마을 일례엄마와 몇주 전부터 함평장으로 ‘종자마늘’ 사러가자고 날짜 맞춰놓았다. 함평장에 일요일 맞추기 어렵고 고추 따기 시작하면 날짜 받기 옹삭하니 며느리 집에 있는 날 갔다오자며 아침 6시부터 두 노인은 약속을 주고받는다.
전날 글쓰기 소모임인 ‘베짜는 마을’ 직녀들과 익산기행으로 늦은 터라 온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진작부터 모셔다 드리자고 먹은 맘이라 오후에나 가자고 대답하고 떨쳐내지 못한 피로에 오전 내내 느릿한 한나절을 보내고 오후 3시, 함평으로 길을 나선다.
괜히 당신 땜에 나서는 길이라 생각해서인지 남한테 신세지기 싫어하는 분이 더욱 미안한 얼굴로 촌에 흔하디 흔한 봉숭아 꽃을 소재삼아 젊은 날의 봉숭아 물들이기 이야기로 분위기를 일신한다.
그러고 보니 일례엄마에겐 댁호가 없다. 40살이 넘은 미혼 딸 이름 그대로 아직까지 일례엄마다. 근자에까지 막내 시누이 이름 따서 은미엄마였던 우리 어머니도 재작년부터 군산댁이란 댁호로 불리는데 일례엄마는 동네에서 댁호 없는 몇 안 되는 아줌마 중의 하나다.
중풍으로 일찌감치 일손 놓은 남편 대신 젊은 날부터 혼자 농사일에 매달려 고생한 폭치곤 가까이 뵈니 아직 곱다 싶다. 왠지 친정엄마 닮았다는 생각도 들고….
군산의 외삼촌과 시숙들에게 마늘 스무접 팔아 20만원 받았는데 종잣값 하면 없겠다는 어머니의 은근짜한 자랑에 올해 열서너접밖에 못 거둔 아줌마는 속이 상한가 보다. 며칠 전 청산댁에게 마늘 일곱접 판 돈 잃어버릴 뻔한 이야기로 옮기며 은근히 남편에 대한 원망이 배어난다.
고추밭에서 만난 청산댁은 마늘 일곱접 흥정이 끝나자마자 남편 혼자 있는 집에 7만원을 갖다주었단다. 밭 매고 들어서는 아줌마에게 남편은 청산댁이 쥐어준 7만원 중 5천원은 동네 전방에서 술사느라고 썼는데 나머지가 없어졌다고 호들갑이다. 차분한 성정인 아줌마는 ‘오메이(주머니)랑 잘 찾아보씨요’라며 여기저기 옷을 뒤지다 보니 마침 잠바 주머니에서 반갑게도 돈이 나오더란다. 아마도 남편 몸이 불편해 윗주머니를 만져보지 못했나 보다. ‘그래도 내 돈 될라고 엄한 디 안 가고 오메이에 들어 있더랑께’라면서 오히려 원망을 반가움으로 내뱉고 만다.
오늘 함평 가려고 서둘러 오전 내내 고추밭 돌보고 허기져 둘러앉은 점심상에서 “어째, 눈주위가 심하게 씰룩거려라우? 어째 이러까?” 했더니 “엄마 나도 그래. 못 먹어서 그래”라던 스물이 넘은 철없는 막둥이 아들 소리가 왜 그리 크게만 들리던지….
함평 마늘가게에서의 흥정이 맘에 찼는지 어머니는 두 덩어리나 올린다. 오늘 함평행의 주선자인 아줌마는 한 덩어리이고….
2년 동안 먹어본 사람이 내년엔 더 많이 달라고 했다며 밭에 놓지도 않은 마늘 팔 사람 주워섬기는 어머니 말에 아줌마는 “우리 같은 사람은 팔 디도 없응께 쬐끔만 놀라요”라며 초라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 동네 부잣집 누구네의 말 못할 근심보다 그래도 몸 건강하고 사지육신 놀릴 수 있는 것이 어디냐며 아줌마는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린다 해도 한사코 마을회관 앞에 내려 무거운 마늘을 이고 골목길로 사라진다.
때맞춰 내년부터 중국산 마늘에 대한 긴급제한조치가 해제돼 농민들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내년엔 일례엄마 마늘농사로 번 ‘돈 자랑’ 좀 들어보고 싶었는데 오늘 산 마늘종자가 제값 하기는 벌써부터 어려울 듯싶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