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문학상 받은 심윤경의 <아름다운 정원>, 우리는 정원을 어떻게 빠져나왔을까
신인작가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1977년부터 82년까지 서울 한복판 산동네에 살던 한 소년의 성장기를 그린 장편 성장소설이다.
이미 우리는 성장소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헤세의 <수레바퀴 속에서>는 억압적 제도와 규율과 맞서는 한 소년의 정신적 방황을,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예술적 정염에 휩싸인 한 청년의 고통과 환희를 그렸다. 이렇듯 성장소설은 주인공이 싫든 좋든 간에 자신을 둘러싼 대립적 세계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독자는 어린 영혼이 놓인 상황이 극적일수록 좋다는 일종의 사디즘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셈이기도 하다. 우리 소설사에서는 그 상황이 상대적으로 더 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역사가 그만큼 심한 굴곡의 궤적을 밟아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앞에 언급한 어느 서구 작가들의 성장소설도 보여줄 수 없었을 만큼 지독스러운 세계(제주 4·3) 속에 내던져진 주인공을 탄생시킨다.
8살 꼬마의 눈으로 70년대 바라봐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 배경으로 삼은 시대 역시 만만치 않다. 그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통해 확립한 파시즘이 절정에 이른 때이며, 그에 맞선 민중의 저항의지 역시 80년 5월 광주를 통해 뚜렷이 실체를 드러낸 무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 시기를 다룬 몇편의 성장소설을 갖고 있다. 그런데 김인숙의 <79-80>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주인공이 시대와 대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선험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반면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화자가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런 의지는 배제되어 있다. 그런 만큼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는 독자는 상대적으로 행복하다.
소설은 초등학교 1학년생 동구에게 동생이 생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갈등의 탄생이었다. “동생이 계집아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조산소에서 장장 네 시간을 울고 악다구니를 한 할머니는 자기가 산모이기라도 한 양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안방에 그대로 널려 있는 화투짝들을 보자 눈에 핏발을 세우고 끝까지 신중하게 떼어보았다.” 결과는? “사흑싸리 껍데기! 육시랄하게 복도 없는 지집년이 나왔구나!”
이 정도로도 독자들은 장차 이 집안에서 벌어질 갈등의 정체를 어느 만큼 파악하게 된다. 끔찍할 정도로 남존여비 사상에 물들어 있는 할머니는 며느리를 달달 볶는 것을 낙으로 삼는 위인인데, 소설을 다 읽고 난 독자는 할머니의 전형성만으로도 이 소설의 의미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할머니는 어린 동구의 눈에도 이미 자신이 깨치고 나아가야 할 대립적 세계의 표징일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시종 신인답지 않은 입심으로 그런 할머니를 적확하게 그려낸다.
엄마는 산동네에 사는 주부답지 않게 세련된 인물인데, 그런 만큼 할머니나 그 품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효성 지극한 남편과 처절할 정도로 갈등을 일궈낸다. “날이 흐렸는데도 우산도 안 챙겨 다니는 정신머리없는 사람들”을 비웃는 그녀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시어머니로부터 늘 “야, 이젠 시에미를 지 새끼 다루듯 하는구나.” “니가 평생에 쌀 서 말을 어디서 벌어봤다고 니 맘대로 쌀을 퍼다 떡을 하냐?”는 욕만 얻어먹는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갈기고 걷어차고 후려치는, 그렇지만 어쩌다가는 식구들을 데리고 외출도 하는 ‘교양’을 지니고 있다.
이런 가족 구성이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무수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봉건적 가족제도에 대해 지칠 만큼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소설을 빛나게 할 독특한 인물을 기다리는데, 그가 여동생 영주다. 할머니 때문에 자칫 ‘복자’라는 이름을 가질 뻔한 영주는 오빠 동구의 눈에 “마치 갓 쪄낸 백설기나 두부처럼 하얗고 따뜻하고 향기로운” 존재로 비친다. 영주는 세돌도 안 된 나이에 스스로 글을 깨쳐 아직 한글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는 오빠하고는 아예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독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식구의 출현에 상당한 기대를 걸지만, 뒤에 그 기대는 처절한 아픔으로 바뀌면서 소설을 한편의 탁월한 성장소설로 매듭짓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말 그대로, 껍질을 깨는 아픔 없이 어찌 세상 속에 편입될 수 있단 말인가!
영주 못지않게 비중 있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이 동구의 담임 여선생이다. 그녀는 당대를 지배한 고루한 질서를 처음부터 거부하는 거의 유일한 ‘정치적’ 캐릭터로 소설에 등장한다. 동구가 한글을 제대로 깨치지 못한 이유가 ‘난독증’ 때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그녀는 보충수업을 통해 결국 제자를 ‘해독 가능한’ 세상 속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동구가 발을 내디딘 세상은 과연 해독 가능한 것이었을까? 독자는 여기서 신인답지 않은 작가의 잔인함에 혀를 내두른다. 동구가 결혼하고 싶어한 여선생은 소설에서 유일하게 시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술하는 하나의 기표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소멸의 기표, 아니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기표였다.
탄탄한 서사에 빛나는 묘사 돋보여
독서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비단 서사에만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할머니의 입에서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오는 육두문자라든지 기막힌 관찰의 결과로 얻어낸 해학적 묘사(예컨대 “평소에는 시금치처럼 물렁하게만 봤던 사루비아도 낯으로 그 줄기를 훑으니 제법 까시러운 센털이 있어서, 내 얼굴에는 채찍으로 맞은 듯한 흉한 벌건 줄이 대번에 죽죽 그어졌다.”-아버지한테 걷어채어 나동그라지는 동구 생각!)는 소설을 기름지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이는 미학적 엄숙주의에 빠져버린 최근 우리 소설의 경향에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해석할 만도 하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산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실재하는 3층집의 아름다운 정원일 텐데, 책을 덮고 나면 아마 우리 모두 이제는 저마다의 기억 속에 어슴푸레하게 남을 똑같은 정원에 대해 한동안 깊은 상념에 잠길 것이다. 어린 내 영혼의 그 어떤 고통이나 슬픔조차 아름답게 만들어버린 정원! 도대체 우리는 그 정원을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김남일/ 소설가

사진/ (한겨레 김경호 기자)

사진/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한겨레 신문사 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