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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가족애로 버무린 ‘SF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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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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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도대체 무엇을 담으려 했는가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을 일주일 만에 흥행 챔피언에서 끌어내린 <스타워즈 에피소드2-클론의 습격>의 위력처럼 올해 할리우드 여름대작들의 강세는 충분히 예견돼왔다. 마치 ‘더 이상 오락적일 수 없다’는 듯 질주하는 <맨 인 블랙2>에 이어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7월26일 개봉하는 것으로 ‘3대 빅카드’의 상륙은 마무리된다. 한결같이 공상과학(SF) 장르를 취하는 세 영화 가운데 문제작은 <마이너리티 리포트>로 꼽혀왔다. 톰 크루즈와 스필버그가 만났다는 화제성 때문이 아니라 원작이 필립 K. 딕의 동명소설이라는 게 그 이유다. 딕은 영화의 SF 장르에 육중한 금자탑을 새롭게 쌓게 한 당사자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영화화한 <블레이드 러너>와,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스크린에 옮긴 <토탈 리콜>은 모두 걸작으로 꼽힌다. <블레이드 러너>의 리들리 스콧이나 <토탈 리콜>의 폴 버호벤이 대가급 감독의 대열에 올라서는 데 이들 작품이 가장 큰 구실을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토탈 리콜>의 철학적 면모를 기대하지 마라

<블레이드 러너>나 <토탈 리콜>은 주입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화두로 끄집어내면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사실적으로 던져줬다. 필립 K. 딕의 흔적을 스펙터클이란 이름 아래 지워버리지 않았기에 이들 영화는 철학적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그렇다면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2054년 미래의 워싱턴을 묘사하는 지점에선 영화와 소설이 비슷하게 물려 들어간다. 그곳에선 범죄가 완벽하게 예방된다. 돌연변이 예지자 세명이 자기 삶을 희생해가며 예측하는 미래의 범죄자들을 특수경찰국이 모두 잡아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쉽게 풀리지 않는 모순이 생긴다. 원작에서 특수경찰국 국장 앤더튼 자신도 이 모순을 잘 안다. “범행 자체는 전적으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돼버렸어. 우린 그들을 유죄로 보지만 그들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한다네. 다행히 그들은 아직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어떻게 보면 무죄라고도 할 수 있지.”

완벽한 감시체계라는 미래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더욱 강렬하다. 길거리와 건물 안팎의 벽면에 흘러넘치는 홀로그램 광고들은 행인들의 망막을 읽고 신분을 알아낸다. 그러면 광고는 즉시 일대일 대응으로 바뀐다. “미스터 앤더튼, 우리 회사가 만들어낸 이 상품은 말이죠…” 하고 말을 거는 식이다. 지하철 곳곳에도 망막 스캐너가 있어 타고 내리는 승객을 늘 감시한다. 톰 크루즈가 연기한 앤더튼은 원작보다 젊어졌지만, 더 우울하다. 현실에서 당한 고통을 잊기 위해 마약을 상습적으로 복용할 정도다. 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톤의 화면은 일관되게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연출하며, 자동 항법장치로 움직이는 자동차 등 SF에 걸맞은 미래의 소품들 역시 인상적이다.

2054년 워싱턴은 새로울 게 없었다

하지만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면서 딕의 진짜 요지를 외면하고, 엉뚱한 길로 들어선다. ‘소수 의견’이라 옮길 만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제목으로 달아놓은 건 다 까닭이 있었다. 예지자들이 미래의 살인자로 앤더튼을 지목하자 그는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다. 원작에서 위기에 빠진 앤더튼을 돕는 일단의 무리는 “다수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그에 대응하는 소수가 있게 마련”이라며 예지자들이 하는 예측이 늘 일치된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다수 의견이란 이름으로 무시당한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음모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갈수록 위세를 얻는 경찰조직과 한물간 군부 간의 권력 다툼이 숨어 있다. 또 앤더튼은 체제 보호와 자기 안전 사이에서 자기 운명을 선택해야 하는 기득권층의 대표주자일 뿐이다. 딕의 장기는 이처럼 과거와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사실적으로 미래에 투사하는 능숙한 솜씨에 있다. 스필버그는 의도적으로 이를 단순화한다. 앤더튼의 행동 동기나 음모의 배경에는 유괴당해 잃어버린 아들의 문제가 놓여 있다. 여기에 과도한 의욕의 소유자를 한명 더 얹어놨을 뿐이다. 스필버그에게 사회 작동의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안전하다. 아이를 둘러싼 가족애로 이야기의 동력을 삼는 건 를 비롯해 그의 전작들이 익히 써먹은 수법이었다. 스필버그의 상상력은 어린이에 대한 집착을 넘어 착취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애초 를 기획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나 필립 K. 딕이 ‘너무 행복한 사나이’ 스필버그를 만난 건 불행한 일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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