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김남일 선수는 2002 월드컵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으로 꼽힌다. 월드컵 전에는 거의 무명이었지만 이제는 인기가 우리 선수들 가운데에서 선두를 다툰다. 그런데 그의 인기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통상 관심의 초점이 되는 화려한 공격이나 매끈한 외모와는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기본 임무는 악착 같은 수비로 미드 필드 부근에서 상대의 공격을 쓸어내는 것이다. 그런 수비를 너무 잘 해냈다. 지단·피구·토티 같은 세계적 스타들도 그 앞에서는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 히딩크 감독이 지어줬다는 ‘진공청소기’란 별명은 그야말로 “딱 맞췄네”이다.
1929년에 발생한 대공황의 원인이라고 제시된 것들은 수백 가지에 이른다. 그 가운데에는 그 시기에 태양 흑점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사뭇 과학적인(?) 분석도 있다. 그런데 공룡의 멸종 원인에 대한 논란은 그 정도에서 대공황에 대한 다툼을 넘어선다. 수많은 논문이 갖가지 원인을 지적해왔다. 불과 70여년 전에 일어난 대공황에 대한 분석은 대략 일단락된 상태다. 그러나 그보다 거의 100만배 이전, 곧 지금으로부터 6500만년 전에 일어난 공룡 멸종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지금껏 제시된 원인들 가운데 거대 운석의 충돌이 가장 유력하다. 그런 충돌에 의한 결과가 얼마나 극적인지는 영화 <딥 임팩트>가 실감나게 전해준다. 운석 충돌에 따른 직접적인 파괴로 인한 화재와 해일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먼지 겨울’이다. 충돌로 발생한 엄청난 양의 먼지는 대기층 전체를 몇해 동안 뒤덮는다. 그 때문에 햇볕이 차단되어 지표면은 싸늘하게 식어간다. <딥 임팩트>에서는 극적 효과만을 부각시킨 나머지 정작 중요한 이 효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그러나 언뜻 조용하게만 보이는 후속효과로서의 먼지 겨울이 지닌 영향력은 참으로 크다. 그렇게 만들어진 겨울이 몇해나 지속된 것은 1억6천만년이나 번성해 온 공룡을 휩쓸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지구를 끝없이 지배할 것으로 보이던 무적의 왕자는 일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 이런 정도의 엄청난 충돌은 매우 드물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처럼 확률이 낮은 데에는 목성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목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이다. 질량은 지구의 318배로 다른 모든 행성을 합한 것보다 크다. 이러한 질량에서 나오는 중력은 주위를 배회하는 운석들을 쓸어 담는다. 그래서 목성을 ‘태양계의 진공청소기’라고 부른다. 1995년 1월에 관측된 슈메이커-레비 혜성과 목성의 충돌장면은 이런 역할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더욱 다행인 것은 지구의 궤도가 목성보다 안쪽이란 사실이다. 이를테면 목성은 지구의 등 뒤에서 우리의 안전을 책임지는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만일 목성이 없었다면 너무나 잦은 운석 충돌 때문에 지구에도 생명체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생명 현상의 발현에서 대부분 태양·물·대기 등의 적극적인 요소에 우선 주목한다. 그러나 목성과 같은 소극적인 안전요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축구에서의 수비수는 평소엔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빛을 발한 김남일 선수의 플레이로 그런 역할의 중요성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진공청소기, 묵묵하지만 믿음직한 그들의 활약에 거듭 찬사를 보낸다.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일러스트레이션/ 차승미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