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탕’ 대신 ‘계속합니다’ 간판을 걸어야 했던 블랙코미디… '개벼다귀' 육수의 정수를 보여주는 평양옥
나지막한 한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낙원동의 막다른 골목. 한낮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정오께, 사내 서너명이 골목 안에 들어서서 어느 집 대문을 밀더니 한 사내가 안에다 대고 은밀히 묻는다. “계속합니까?” 대문 안의 대답. “네, 계속합니다.”
1984년 여름이었던가. 오랜만에 그 집을 찾아온 내가 직접 본, 간첩들이 암호를 교환하고 접선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들은 무엇을 계속하느냐고 물었고, 또 무엇을 계속한다고 답하고 있었던가? 그것은 바로 보신탕이었다. 보신탕 한 그릇 먹겠다는데, 이 무슨 해괴한 짓들인가?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모른다. 80년대 어두운 시대의 그 블랙 코미디를.
80년 5월,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세계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88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기울인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88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80년대 초반부터 경기장 건설 등 올림픽 개최를 위해 대대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대로 모든 게 잘 진행되는 것 같았는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몇몇 서구 국가의 올림픽위원회와 브리지트 바르도 등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들먹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한국이 보신탕을 금지하지 않으면 88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바야흐로 반만년 이상 이어져온 한국의 음식 주권이 위협받는 순간이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전국에 보신탕 판매를 금지시켰고, 이 땅의 보신탕 문화는 단절의 위기에 놓였다. 대부분의 보신탕집들은 문을 닫거나 업종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일부 몰지각한 서구 여론과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무릅쓰고 끝까지 음식 주권을 지킨 집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버젓이 ‘보신탕집’ 간판을 내걸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 즈음 새로이 생겨난 이름들이 보양탕·영양탕·사철탕 등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소개한 낙원동의 보신탕집은 아예 간판을 떼어버리고 조그마한 나무 판자 입간판에 “계속합니다”라고만 써서 세워놓았으니, 어두운 시대 보신탕 수난사의 한 장면이었다.
보신탕의 원래 이름은 개장국으로 추정된다. 놀부에게서 쫓겨난 흥부네 아들 12명은 한창 나이의 왕성한 식욕에 먹을거리가 없어 언제나 먹을 것 타령을 했다. 그래서 <흥부가>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어무니, 개국에 이밥 말아 한 그릇 먹으면 좋겠수.” 또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들에는 ‘개장국’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런 문헌들을 보면 보신탕은 최소한 일제시대까지는 개국·개장국이라고 불렸다. 한국전쟁 뒤 개고기를 즐겨먹던 이북 사람들이 많이 내려오면서, 또 전후 피폐한 상황에서 개장국이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선호되면서 보신탕으로 이름이 변한 것 같다.
아주 독창적인 보신탕집을 한곳 소개한다. 서울 서대문 네거리 부근에 있는 평양옥(02-363-7058) 주인 김미자(44)씨는 경기도 팔당에서 20여년간 보신탕집을 연 친정어머니의 비법을 전수받아 본인 역시 지금까지 20여년간 같은 자리에서 보신탕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집의 독창성은 육수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삶은 개고기를 찢고 난 뒤 버리던 뼈들이 아깝다는 생각에서 24시간 푹 고아보았더니, 뼈는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아주 뽀얀 육수가 나오더란다. 육수와 고기 삶은 물을 각각 반씩 섞어 탕과 전골을 끓이는데 고소한 맛이 끝내준다. 수육 또한 끓는 육수에 적셨다가 먹으면 무척 부드럽고 쫄깃쫄깃하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을 비유해 일컬던 ‘개뼈다귀’도 이렇게 잘 이용하면 유용한 것이 된다. 수육·전골·무침 모두 1인분에 2만2천원이고, 탕은 1만5천원이다. 여주인의 손이 넉넉하여 어지간히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1인분이면 족하다.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사진/ 평양옥의 독창성은 육수에서 찾을 수 있다. 개고기를 찢고 난 뒤 남은 뼈로 우려낸 육수는 고소한 맛이 끝내준다. (김학민)
보신탕의 원래 이름은 개장국으로 추정된다. 놀부에게서 쫓겨난 흥부네 아들 12명은 한창 나이의 왕성한 식욕에 먹을거리가 없어 언제나 먹을 것 타령을 했다. 그래서 <흥부가>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어무니, 개국에 이밥 말아 한 그릇 먹으면 좋겠수.” 또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들에는 ‘개장국’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런 문헌들을 보면 보신탕은 최소한 일제시대까지는 개국·개장국이라고 불렸다. 한국전쟁 뒤 개고기를 즐겨먹던 이북 사람들이 많이 내려오면서, 또 전후 피폐한 상황에서 개장국이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선호되면서 보신탕으로 이름이 변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