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06월19일 제414호>
모낸 들녘은 벌써 손마디만큼이나 올라온 연초록끼를 감추지 못하고 온통 연둣빛의 감탄사를 불러낸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땅 위에 빈틈없이 심어진 고추며, 밭벼며, 콩이며, 홍화들이 옹기종기 생김대로 키재기를 하고 자전거를 탄 무리의 동네 아이들이 시골마을 골목길을 가르며 사람사는 맛을 돋운다.
아침 출근길 찌는 듯한 더운 바람에도 아랑곳않고 밭을 매는 아짐들 중에 어머니가 섞여 있나 눈여겨봤던 지산댁네 콩밭에는 아직도 지는 해를 뒤로 뉘며 서너명의 아줌마들이 나른한 김매기를 하고 있다. 한창 고사리를 품어안고 있던 집 뒤의 들봉산은 시원한 바람을 몇 줄기 내어 보낸다.
영광에 터를 내린 지 벌써 12년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여자가 농사짓겠다고 서둘고 다녔던 모습을 떠올리면 풋풋한 용기가 가상하다. 농민의 삶에, 농사짓는 일에 들떠 검정 고무신 하나 구겨넣고 대학 농촌활동으로 시작된 촌사람들과의 만남은 농민운동 동지인 남편을 만나 그의 고향을 터전삼아 정붙이게 되었다.
동월리 시화마을 아줌마로 땅 한 뙈기 없는 동네 최대 규모의 소작농으로 농사짓고 살아가는 동안 사내아이 둘과 불어가는 몸의 살들, 농사이력, 농민회 투쟁전력, 그리고 더해진 빚은 농민이 되어가는 수순이기도 했다. 담배 닷 마지기, 다랑이논이 12개가 넘어도 겨우 세 마지기였던 산골의 고추밭, 대파며 감자로 망해먹은 마사토의 모래밭, 반듯한 논들, 집울타리가 되어준 농익은 무화과들이 벌써 추억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다. 동네 농민회 만들어 보겠다고 또래의 청년들과 잘 어울리고 ‘우리 동네 담배엮기 1등’이었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간 지 벌써 5년의 세월이다. 없이 살지만 ‘넘 둘러먹지 못하고 용한’ 시어른들과 살림 합치고 한창 마음을 잡지 못할 때 땅과 자연은 내게 위로와 격려를 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직장생활 끝에 원불교 성지인 영산원불교대학 여성문화연구소와 하정남 교무님과의 인연은 강화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군단위 여성의전화를 꾸리게 했고 ‘촌여성운동가’로 씩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나를 그 안에 밀어넣었다. 내게 변하지 않는 명제가 있다면 ‘농촌에 살리라’이다. 남편 없이 서울여자가 사내아이 둘 데리고 시부모랑, 그것도 별로 돈 안 되는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로, 저항 많은 남자들 이겨먹고 살기가 어떠냐고들, 힘들지 않냐고 물어온다. 그러면 난 “나를 성장시켜주고 지켜주는 촌여자들이 빽”이라고 현답한다. <한겨레21>과 인연 맺으며 많은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싱글맘으로 촌동네에 뿌리 내리기를 시도한 탁 선생과 아이들, 우리 동네 수영이네, 한국댁, 파프리카 아줌마, 동월리 사람들, 우리 시부모 군산댁과 군산 양반, 그리고 건강이 안 좋아지신 서울의 친정 부모님들…. 농촌을 사랑하는 맘 하나 믿고 쓰일 이 글이 혹여 촌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다. 이태옥/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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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은 이번호부터 매주 ‘영광댁 사는 이야기’를 싣습니다. 전남 영광 여성의전화 이태옥 사무국장이 쓰게 될 이 칼럼은 오늘의 농촌 풍경과 농사짓는 이들이 사는 모습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그려나갈 것입니다. 이곳에 실리던 ‘클릭, 건강 만들기’는 새로 시작되는 ‘몸살리기’와 함께 별도의 페이지에 게재됩니다. 편집자 |

일러스트레이션/ 방기황
동월리 시화마을 아줌마로 땅 한 뙈기 없는 동네 최대 규모의 소작농으로 농사짓고 살아가는 동안 사내아이 둘과 불어가는 몸의 살들, 농사이력, 농민회 투쟁전력, 그리고 더해진 빚은 농민이 되어가는 수순이기도 했다. 담배 닷 마지기, 다랑이논이 12개가 넘어도 겨우 세 마지기였던 산골의 고추밭, 대파며 감자로 망해먹은 마사토의 모래밭, 반듯한 논들, 집울타리가 되어준 농익은 무화과들이 벌써 추억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다. 동네 농민회 만들어 보겠다고 또래의 청년들과 잘 어울리고 ‘우리 동네 담배엮기 1등’이었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간 지 벌써 5년의 세월이다. 없이 살지만 ‘넘 둘러먹지 못하고 용한’ 시어른들과 살림 합치고 한창 마음을 잡지 못할 때 땅과 자연은 내게 위로와 격려를 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직장생활 끝에 원불교 성지인 영산원불교대학 여성문화연구소와 하정남 교무님과의 인연은 강화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군단위 여성의전화를 꾸리게 했고 ‘촌여성운동가’로 씩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나를 그 안에 밀어넣었다. 내게 변하지 않는 명제가 있다면 ‘농촌에 살리라’이다. 남편 없이 서울여자가 사내아이 둘 데리고 시부모랑, 그것도 별로 돈 안 되는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로, 저항 많은 남자들 이겨먹고 살기가 어떠냐고들, 힘들지 않냐고 물어온다. 그러면 난 “나를 성장시켜주고 지켜주는 촌여자들이 빽”이라고 현답한다. <한겨레21>과 인연 맺으며 많은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싱글맘으로 촌동네에 뿌리 내리기를 시도한 탁 선생과 아이들, 우리 동네 수영이네, 한국댁, 파프리카 아줌마, 동월리 사람들, 우리 시부모 군산댁과 군산 양반, 그리고 건강이 안 좋아지신 서울의 친정 부모님들…. 농촌을 사랑하는 맘 하나 믿고 쓰일 이 글이 혹여 촌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다. 이태옥/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