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성들 사이에 장신구 확산…남녀 구분 어려운 섬세한 제품 인기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절묘한 발끝 동작과 허벅지 근육의 격렬한 움직임뿐만이 아니다. 안정환의 ‘아줌마 파마’는 이제 장안의 유행이 됐고, 인터넷상에서는 안정환의 반지와 김남일의 목걸이에 대한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이전 같으면 경기장 안팎에서 선수들의 목 언저리에 살짝 드러나는 얄팍한 목걸잇줄이나 왼쪽 귓볼을 가르는 귀걸이를 볼 때 “하라는 운동은 안하고…”라는 식의 반응이 많았지만, 지금은 “운동도 잘하는 멋쟁이”라는 반응이 훨씬 더 많다.
장 엄격한 직종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들어 목걸이·귀걸이·팔찌 등의 장신구가 여성이나 ‘튀는’ 소수 남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옷이나 시계처럼 평범한 남성들 사이에서도 자신을 표현하는 일상적 소도구로 자리잡는 흐름이 두드러진다.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문화연대) 정책실장 이원재(30)씨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이른바 ‘운동가’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그의 차림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이 실장은 캐주얼 차림에는 가죽 목걸이나 팔찌로, 정장 차림에는 귀에 붙는 귀걸이로 차림새를 마무리한다.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내 신체에 개입하는 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신구로 나의 취향을 드러내는 건 음악이나 다른 기호에 취향을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이씨가 귀를 뚫은 98년만 해도 그의 ‘취향’은 그다지 존중받지 못했다. 대학원생 시절, 세미나에서 선배들은 귀걸이 빼기를 정중히 제안하거나, “남자가 왜 그러냐”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지금도 관료 같은 ‘근엄한’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 나가서는 ‘뭐 저런 애가 있느냐’는 눈길을 받기도 한다. 최근 문화현상에 대한 코멘트를 받으러 온 방송사 기자는 귀걸이나 목걸이가 “시청자들에게 신뢰를 주지 않는다”고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의 차림을 보는 시선은 2,3년 전과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기 검열도 있었고, 직접적인 비난도 들었지만 요즘에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거의 없어요. 제 친구들도 대부분 귀를 뚫었고요.”
명동에 있는 패션몰 아바타에서 액세서리 매장을 운영하는 김정아씨는 요즘 남성 제품 코너를 준비하고 있다. 눈에 띄게 늘어난 남성 손님들 때문이다. “남자 혼자 오는 경우는 아직 많지 않지만 여자친구와 함께 와서 목걸이나 귀걸이를 고르는 남자들이 많아요. 여자친구들이 적극적으로 남자친구의 장신구 착용을 권유합니다. 귀를 뚫으러 오는 남자들도 튀는 패션피플이나 어린 학생들보다 수수한 차림새의 20∼30대가 많고요.”
광고나 방송 등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직장뿐 아니라 언론사나 증권가 등 비교적 엄격하게 복장의 관습을 지키는 직장의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도 장신구에 대한 관심사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외국계 증권사에 다니는 윤석범(31)씨는 전에 다니던 은행에서 정장 사이로 살짝 보이는 장신구 덕에 여직원들의 ‘애정어린’ 눈길을 한몸에 받았다. 지금은 외부인을 자주 만나야 하는 마케팅팀에 속해 이전보다 제약을 많이 받는 편이지만 자유복이 허용되는 주말에는 스스럼없이 장신구를 착용한다.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도 그와 비슷해 이제는 전혀 튀는 스타일이 아니다. “늘 같은 셔츠에 같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 선배들을 보면 돈 벌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주로 여자친구한테 선물받는 귀걸이나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데 투자를 많이 하는 동료들이 꽤 많아요.”
캐주얼한 ‘브리지 주얼리’
윤씨처럼 정장 차림을 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와이셔츠 단추 대신하는 커프스링크스는 요즘 인기 있는 패션 아이템이다. 대부분 커프스링크스는 기업체 간부나 국회의원 같은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 권위나 품위를 드러내기 위해 착용해왔다. 그런 만큼 금이나 보석 등을 소재로 많이 써왔지만 젊은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커프스링크스는 가벼운 소재와 모던한 스타일이다. 연예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어 최근 빠른 매출신장을 보이는 주얼리 브랜드 타테오시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도 커프스링크스. 영국수입 브랜드인 타테오시안에서 나오는 커프스링크스는 시계나 나침반을 변형하거나 요즘 뜨는 축구공 등을 장난스럽게 이미지화한 제품들이다. 목걸이나 팔찌 등에 박혀 있는 보석도 화려한 순보석이 아니라 토파즈·자수정 등 저렴하면서 캐주얼하게 착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처럼 순보석과 가벼운 액세서리의 중간 가격대로 캐주얼하면서 적당한 고급스러움을 보여줄 수 있는 ‘브리지 주얼리’는 올해부터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요즘 두드러지는 남성 장신구의 특징은 여성 제품인지 남성 제품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섬세한 제품이 사랑받는다는 점에 있다. 남성 스타일리스트 정윤기씨는 “최근 불기 시작한 꽃미남 바람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은소재의 가는 목걸잇줄이나 가죽밴드에 십자가 펜던트 등 약간 복고적이면서 남녀 구분 없이 착용할 수 있는 제품들이 올 여름 인기 있는 아이템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정씨는 “70년대 이후 태어난 남성들은 멋을 내는 게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는 경향이 뚜렷하고, 강한 남성성보다는 섬세한 여성성을 미덕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여성적인 장신구 착용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고 지적한다. 국내 브리지 주얼리 브랜드로 남성 제품 제작과 마케팅에 중점을 둔 ‘바스타타’는 지난 봄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온 진주 펜던트를 남성 제품에 도입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남성들의 장신구에 대한 관심이 늘자 일반 주얼리 브랜드에서 남성 제품을 늘리는 한편, 남성 전용 컬렉션을 본격적으로 시장에 내놓는 브랜드도 생겨났다. 이탈리아의 주얼리 브랜드 수입사인 사스코 오에프는 지난 6월20일 국내 처음으로 남성 전용 주얼리 브랜드인 ‘카사노바’와 ‘21세기 센추리맨’을 출시했다. 카사노바는 팔찌 등 캐주얼 아이템 중심이고, 21세기 센추리맨은 정장족을 위한 커프스링크스 등이 중점 품목. 20대 초반의 젊은 남성보다는 20대 후반에서 30대의 직장인들이 주요 타깃층이다. 이탈리아에서도 국가대표 축구단에 제품을 협찬하는 스타마케팅을 통해 젊은 남성들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는 브랜드다. 이곳 매장을 찾는 고객 가운데 상당수는 여성이다. 남자친구나 남편에게 선물하려는 사람들 못지않게 직접 착용하기 위해 제품을 고르는 여성들도 많다. 사스코의 최봉심 홍보과장은 “최근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는 남자 배우에게 제품을 협찬하는 스타마케팅이 늘어나고 있고, 선이 굵은 남자 배우보다는 김재원씨나 류시원씨 등 여성적이고 귀여운 남자배우들에게 우선적으로 협찬한다. 남성 제품, 여성 제품의 구별이 무의미할 정도로 유니섹스 모드가 장신구 제품의 큰 흐름이 되었다”고 말한다.
‘꼰대’의 이미지 벗는다
30대 중반의 대기업 사원 이아무개씨가 좋아하는 장신구도 여성용에 가까운 가는 목걸이. 그는 3년 전 “30대가 됐다는 서글픔과 변화에 대한 욕구를 느끼면서 장신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음의 여유를 스스로 강제해야 할 시기에 뭔가 외형적으로 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목걸이와 팔찌를 하게 됐다”는 이씨도 처음에는 회사 사람들의 눈길에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보다 내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표식 같아서 좋고, 작지만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데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고 한다. 이제 주변의 동료들은 그의 이런 사소한 멋을 부러워할 정도. 그러나 한번 해보라고 권유하면 선배들은 씩 웃으며 “쪽팔려서”라고 얼버무린다.
남성들이 장신구를 착용하는 흐름을 대단한 문화적 행동으로 보는 것은 너무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만, 무표정한 거리와 사무실의 표정에 작은 활기를 불어넣는 에너지처럼 보인다. 자신이 무게만 잡는 ‘꼰대’ 선배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벼운 장신구를 착용하고 출근한다면 선배를 바라보는 후배들의 눈길이 사뭇 달라질 수는 있다. 특히 남성들의 장신구 착용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이 대체로 좋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올 여름 ‘쪽팔림’을 무릅쓰고라도 한번 도전해볼 만한 일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일반 주얼리 브랜드에서 남성 제품을 늘리고, 남성 전용 컬렉션을 본격적으로 시장에 내높는 브랜드가 생겨나고 있다. (이정용 기자)

사진/ 월드컵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낸 김남일 선수. 그의 목걸이는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정용 기자)

사진/ 자기 신체에 개입하는 것이 즐겁고, 자신감을 갖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게 장신구를 착용하는 남성들의 소감이다. (이정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