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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전협정의 ‘저주받은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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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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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참여 못한 채 단독북진 위협으로 대미종속 심화… 평화협정만이 서해 평화 약속

사진/ "남쪽만 빠졌던 회담." 51년7월 정전회담에서 북족 대표인 남일 대장(뒤에 선 사람)등이 회담장에 들어서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필자가 오랜 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한 친구가 그동안 한국에서 유행한 유머 몇 가지를 소개해준 적이 있다. 다들 재미있는 이야기였지만 정말 배를 잡고 웃은 이야기는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학교 선생님께서 6ㆍ25를 맞이하여 반공표어 숙제를 내고 다음날 한 아이에게 발표를 시켰더니 “6ㆍ25는 무효다. 다시 한판 붙어보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면 재미있는 유머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이 말이 국회 내 제1당의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들 입에서 나온다면 소름끼치게 섬뜩한 이야기로 돌변한다. 이성을 되찾고 서해교전이라는 불행한 사태를 짚어보자는 태도에 대해 원내 제1당의 대통령 후보는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다”라고 몰아세운다.

정전협정 체제는 왜 불안정한가

우리 팀이 독일과 월드컵 준결승을 치르던 날은 공교롭게도 6월25일이었다. 월드컵의 열기 덕에 정말 올해만큼은 전쟁을 ‘기념’하는 대신 우리 팀의 선전과 승리에 감격하면서, 그리고 “오, 필승 코리아”를 많은 외국인들이 그렇게 들었듯이 “Oh Peace Korea”의 함성 속에 6월을 ‘조용히’ 보내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 꿈은 3,4위전이 열리던 6월29일 오전에 무참히 깨어졌다. 서해에서는 또다시 남북 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우리 장병 4명이 전사하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불행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3년 전 6월에도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내년 6월, 후년 6월은 또 무사히 넘길 것인가? 현재와 같은 상태가 방치되는 한, 꽃다운 나이에 스러지는 우리 장병들, 그리고 역시 귀한 자식이었고 조국을 사랑했을 북의 젊은이들이 무리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사태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대북 강경론자들은 이런 사태가 햇볕정책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일은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군사적 위험을 관리하는 유일한 장치는 1953년 7월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불완전하나마 유일하게 한반도의 위기를 관리하는 정전협정의 기능은 상당 부분 마비되어 있다. 91년 3월25일 유엔 쪽이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 쪽 수석대표로 한국군의 황원탁 소장을 임명하자, 북쪽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한국군이 정전위 수석대표를 맡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회의를 거부하다가 94년 12월에는 북쪽 대표단을 판문점에서 철수시켜 정전협정체제를 실질적으로 마비시켰다. 정전협정과 법적 지위가 다르지만, 91년에 남북은 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7ㆍ4남북공동성명에 이은 역사적 문건인 기본합의서는 국회의 비준을 받지 못해 사문화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한반도의 군사적 위기상황을 관리할 수 있는 쌍방이 합의한 장치는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

두 차례 서해교전의 발발 원인이나 한반도 정전협정체제의 불안정성은 이미 53년 7월의 정전협정 자체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개전 원인은 그대로 둔 채 무력사용의 중지 만을 규정한 정전협정은 그 자체로서 많은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90일 안에 고위급 정치회담을 열어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관련된 문제들을 논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열린 제네바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정전협정에 대한민국 쪽이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전협정체제의 불안정성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승만 시대의 ‘저주받은 유산’이 되어 이승만 정권 이후 들어선 이남정권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정전협정 시작된 뒤 더 치열한 전투

사진/ 51년7월 정전회담 때 유엔군 대표로 참석한 미 해군 터너 조이 중장.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38개월간 지속된 한국전쟁에서 정전회담은 무려 25개월을 끌었다. 중국군의 5차대공세가 대실패로 판명나자 공산군 쪽은 공산군 쪽대로, 유엔군 쪽은 유엔군 쪽대로 각각 전쟁을 지속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쪽도 상대방을 군사적으로 압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미친 짓’이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 간의 물밑접촉을 거쳐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는 51년 6월23일 미국 내 방송연설이라는 특이한 방식으로 정전회담을 제의했다. 미국은 6월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의 성명을 통해 이북 원산항 인근의 덴마크 병원선에서 회담을 갖자고 제의했다. 이에 공산군 쪽은 다음날 7월10일부터 15일 사이에 개성에서 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미국은 이승만이 반대했음에도 이를 수락하여 51년 7월10일 역사적인 첫 회담이 개성에서 열렸다.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전선이 이동하는 격전은 전쟁 발발 초기부터 정전회담이 시작되기 직전인 51년 5월까지 벌어졌다. 그 이후 정전협정 체결까지의 약 2년간은 일종의 땅따먹기 싸움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고지 빼앗기싸움 중심으로 벌어진 2년간의 전투에서 양쪽은 초기 격전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무수한 포탄을 썼으며, 개전 초기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정전협정 체결이 가시화된 53년 6월 이후 극에 달해, 6월 한달 동안만 쌍방이 각각 자기 쪽 피해로 인정한 수가 3만여명씩 모두 6만여명을 넘어섰고, 7월 중순에는 한주 동안 양쪽을 합쳐 거의 10만여명이 죽었다.

왜 한국전쟁에서의 정전협정을 이토록 오래 끌었으며, 정전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일까? 전통주의적 설명은 정전협상이 장기화된 원인을 공산군 쪽의 유연성 부족에서 찾았다. 이 입장에 따르면 장기화된 교섭이 마침내 타결될 수 있었던 까닭은 미국의 핵위협에 중국이 굴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로즈메리 풋 교수는 정전협정이 빠르게 진행되지 못한 것은 미국 쪽의 유연성 부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공산군 쪽이 정전협정 체결에 응한 것도 중국이 미국의 핵위협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의 협상 자세가 경직화된 이유로는 첫째, 미국은 정전협상에 강력히 반발하는 이승만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둘째, 당시 미국 안에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고 있어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셋째, 미국 군부는 공산군 쪽과의 협상 자체가 큰 실수라고 인식하면서 군사적 압력에 의한 타결을 추구했고, 넷째, 미국은 과거 역사에서 무력을 동원한 경우 대부분 승리했기 때문에 외교와 타협의 기술을 발전시킬 필요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인도주의적’포로송환 원칙의 함정

정전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군사분계선과 포로문제였다. 이 가운데 군사분계선 문제는 52년 1월27일에 일찌감치 타결되었다. 공산군 쪽은 처음에는 전쟁 발발 이전의 38도선을 경계로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상당한 정도로 양보하여 현재의 휴전선과 비슷하게 획정지었다. 그러나 정전협정에서는 육상 군사분계선만 획정하였을 뿐 해상 군사분계선은 미확정상태로 놔두었기 때문에 북방한계선 문제와 같은 분쟁의 불씨를 남겨두게 되었다. 유엔군 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북방한계선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남쪽 배가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한계선으로 정전협정과 관계없는 유엔군 사령부의 내부 방침이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여당인 시절 국회에서 국방장관 이양호가 북방한계선을 북쪽 경비정이 ‘침범’한 것이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냐는 야당 의원의 거듭된 질문에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라고 두 차례나 밝힌 사실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포로문제는 더욱 복잡했다. 유엔군 쪽은 상당한 물리적 강압을 수반하기는 했지만, 13만2천여명의 포로 가운데 송환 거부자를 6만여명이나 만들어내어 공산군 쪽을 놀라게 했다. 반면 공산군 쪽은 개전 초기 6만5천여명에 달하는 유엔군 포로의 명단을 1만1559명만 제시하여 유엔군 쪽을 놀라게 했다. 대부분 유엔군의 폭격으로 죽거나 도주하거나, 아니면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석방’이란 국군포로들이 인민군에 편입된 것을 뜻한다. 제네바 협정 118조에는 전쟁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 없이 석방, 송환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독일군과 일본군 포로를 송환하지 않고 소련의 전후 복구사업에 강제동원한 것과 같은 일을 막기 위해 서방 쪽의 강력한 요구로 확립된 원칙이었다. 그러나 자동송환 원칙은 유엔군 쪽이 제시한 자원송환 방침, 즉 포로 개인의 의사에 따라 송환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에 의해 제네바 협약 발효 이후 첫 번째 포로문제 처리에서부터 거센 도전에 부닥친다.

미국이 자원송환을 고집한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라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나마 결정적 승리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풋 교수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은 이런 정책이 과연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정책이었나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이 문제로 인해 정전협정의 체결이 지연되는 동안 열악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포로들의 인권은 더욱 유린되었기 때문에 포로들은 오히려 자원송환 원칙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전협정이 늦어지는 동안 발생한 양쪽의 엄청난 인명피해를 포함시킨다면 정치적 의도가 깔린 ‘인도주의’적 주장이 때로 얼마나 무의미한 희생을 초래했는가를 볼 수 있다. 포로문제는 53년 4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즉각 송환하고,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일단 중립국인 인도 쪽에 넘겨 처리하도록 하자는 양보안을 내놓았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여 인도를 위원장 국가로 하는 중립국 위원회에서 처리하도록 하자는 수정안을 내놓아 지루한 협상 끝에 마침내 타결되었다.

단독 북진, 이승만의 ‘몽니’

그러나 정전협정의 진정한 걸림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정전회담이 구체화되자 강력히 반발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미 서방 참전국들은 승리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무의미한 전쟁에서 발을 빼려고 하였다. 특히 소련이 연이어 핵실험에 성공하자 서방국가들은 자국의 안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유엔의 기류도 군사력이 아닌 협상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미 유엔은 미국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니었다.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한국전에 개입하였기 때문에 유엔의 결정에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강경파나 이승만은 유엔을 통하지 않고 미국이 단독개입하였다면 서방국가나 유엔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뒤늦게 아쉬워했다.

이승만에게는 전쟁의 지속 자체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반이었고, 북진통일론은 반대파를 제압할 수 있는 막강한 명분이었다. 이승만은 정전협상의 과정에 개입하여 그 내용에 영향을 끼치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조건을 삽입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무기가 있었다. 바로 그는 정전협상이라는 판 자체를 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가장 바란 것은 미군이 계속 공산군과 싸워주는 것이었지만, 미국은 더 이상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적들과 잘못된 싸움”을 계속할 의사가 없었다. 더구나 미국은 정전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에서 미 지상군을 완전 철수시키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군을 붙잡아두고자 했으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에 이승만이 빼어든 카드는 국군의 단독북진이었다. 이승만은 개전 초기에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이양한 것은 북진통일을 효과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것인데, 유엔군의 목적이 전쟁 발발 이전 상태로의 복귀에 있다면 작전지휘권을 회수하여 단독으로 북진할 수밖에 없다고 미국에 통보했다.

이와 같은 이승만의 태도는 영어식 표현으로 하면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었고, 미국이나 이남의 이북 전문가들이 즐겨쓰는 벼랑 끝 전술의 원형을 선보인 셈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을 미국에 예속된 존재로 보았으나, 이승만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박정희가 ‘반미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하지만, 박정희의 ‘반미’가 미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투정’으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것이었다면, 이승만의 태도는 미국의 약점을 꿰뚫어본 상태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몽니’였다. 미국은 52년에 한때 검토했던 이승만 제거계획인 에버레디(Everready) 계획을 다시 끄집어내어 이승만을 감금하고 군사정부를 세우는 것을 고려했으나, 이미 그럴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클라크가 느낀 거대한 모욕감

사진/ 포로수용소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반공포로들. 미국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골머리를 썩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이승만이 부린 ‘몽니’의 절정은 휴전협정 조인을 앞둔 53년 6월18일 송환을 거부하는 공산군 쪽 포로 2만7천여명을 석방해버린 일이다. 이에 격노한 처칠은 이승만을 배신자라고 규탄했고, 이때가 8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자다가 일어난 유일한 때였다는 아이젠하워는 친구 대신 또 하나의 적을 얻었다고 탄식했다. 다행히 공산군 쪽은 이 문제로 판을 깨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정전협정은 체결되었다. 이런 무모함을 보이는 이승만을 내쫓기에는 너무 늦었고, 실제로 단독북진도 불사할 무모한 인물인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미국정부는 국무성 차관보인 로버트슨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로버트슨은 무려 19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이승만을 설득했다. 그는 이승만을 “교활하고 임기응변의 재주가 있는 장사꾼적 기질에 더하여, 그의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에 충분히 몰아넣을 수 있을 만큼 고도로 감정적이고 비합리적, 비논리적인 광신도”라고 규탄- 그 표현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에 가해지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했지만, “아시아에서 최대이며 가장 강력한 반공군대”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지었다.

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은 마침내 조인되었다. 이날 <뉴욕타임스>는 “양쪽은 마치 휴전이 아니라 전쟁선포에 합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보도했다. 정전체제하의 또 다른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이 협정에 조인한 미국 육군대장 마크 클라크는 조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부인을 부여잡고 자신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쟁을 승리로 끝맺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조인한 불명예스러운 군인이 되었다고 펑펑 울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당시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조그만 나라 이북과 가장 어린 나라 중국을 상대로 초강대국 미국이 16개국의 유엔회원국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적으로 무승부를 기록하였으니 클라크가 느낀 모욕감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승만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뒤엎는다는 위협을 가하여 미국에게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을 뿐 아니라, 한국군의 증강, 미국의 군사경제적 원조 등을 따내었다. 이남의 어느 대통령도 미국을 상대로 이런 외교적 ‘성과’를 얻어낸 사람이 없지만, 그 ‘성과’는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 대미예속의 강화, 이남의 군사주의화 등등의 저주받은 유산을 남긴 것이기도 했다.

내년은 정전협정 체결 50돌 되는 해

또 한국군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은 대북관계의 개선이나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이남은 실질적으로는 한반도 군사대치에서 한 주역이면서도 법적으로 온전히 당사자 지위를 주장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이런 상황은 이북에 꽃놀이패와 같은 좋은 선전거리를 준 것이다. 이북은 74년 이후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면서 이남의 존재를 무시했다. 조인 당사자가 아니니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데서 남쪽은 빠지라는 것이다. 형식논리상으로 보면 이북의 주장이 맞다고 볼 수 있지만, 이런 주장은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91년 노태우 정권이 남북평화협정을 제의했을 때 북은 남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북은 62년, 남에 대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나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은 북이 종래 남쪽은 무시하고, 미국하고만 상대하려던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 대신 남쪽과 실질적인 대화를 모색한 것이었다. 남은 남대로 정전체제의 국외자라는 이승만 시대의 저주받은 유산을 떨쳐버리고, 한반도 평화정착의 당사자로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수적인 일은 남쪽이 대미 자주성의 회복을 통해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되찾는 것이다. 북에 대해서는 밀리면 죽는다고 전쟁 확대를 소리높이 외치는 분들이 왜 미국에 대해서는 그리도 고분고분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전협정에서의 당사자 문제는 중국과 이북이 유엔의 회원국이 됨으로써 유엔의 두 회원국가의 군사령관이 유엔군 총사령관과 정전협정을 맺은 기이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런 기이한 모습도 바로잡아야겠지만, 서해교전과 같은 불행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나아가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정전협정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치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과제다. 이제는 전쟁의 달 6월을 기념하지 말고 불완전하나마 전쟁의 정지를 가져온 7월을 기억하자. 내년은 정전협정 체결 5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그 불완전한 50주년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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